김동인은 ‘정답다(懐かしい)’ ‘느끼다(感じる, 覚える)’ 등 주로 감성과 관련된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의 번역에 고심한 바 있다. 이러한 단어가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인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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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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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은 ‘정답다(懐かしい)’ ‘느끼다(感じる, 覚える)’ 등 주로 감성과 관련된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의 번역에 고심한 바 있다. 이러한 단어가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인다는 ...
김동인은 ‘정답다(懐かしい)’ ‘느끼다(感じる, 覚える)’ 등 주로 감성과 관련된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의 번역에 고심한 바 있다. 이러한 단어가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인다는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 감성의 주체라는 뜻이기도 한바, 김동인 자신의 말대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위의 단어들이 보편화되지만, 실상 그 단어들은 “본시 갖는 의의와 전연 다른 방면에 활용하여 재래의 우리말이 표현할 수 없는 특수한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전유된 번역어이며, 따라서 기존의 한국어에는 근대적 의미의 감성을 표현할 단어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정신 작용에서 감정의 지위 격상은 존 로크를 기원으로 하거니와, 이를 가장 강화시킨 사람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상속자인 데이비드 흄이다. 그는 <인간본성론>에서 이전 시대의 도덕철학이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전제로 세워진 것이 오류임을 지적하면서 이성 혼자서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성이 감정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도덕이나 행위의 토대를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경향으로 급선회했는데, 이는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근대화된 도시와 그렇지 않은 농촌 간의 격차가 현격하게 드러났던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 그중에서도 변덕스러운 인간의 감정이었다. 새로운 사회질서의 구축이라는 문제는 근대 문명으로의 이행기에 있던 모든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문제였지만, 문명사적 전환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라는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가 오히려 그러한 문제를 좀 더 빨리 발견하고 개념화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감성이 인간의 본성 중 가장 중요하며 또한 가치나 행위의 최종심급으로 기능한다는 것에 어떤 갈등 요소가 내재해 있지는 않은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물론 이광수와 같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초창기 감성 옹호자들은 감성이 한 개인의 자아 각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사실 감성에 대한 찬양의 이면에는 그것이 정서적 과잉, 도덕적 타락, 육체적 쇠약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감춰져 있었다. 이러한 불안을 대표하는 어휘가 신경성(nerves)이다.
18세기의 새로운 인간본성론은 신경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신경해부학 및 신경생리학의 발전과 인간을 감각적 존재로 본 로크적 심리학 및 인식론과 보조를 맞추었다. 몸 전체를 통해 사고와 지각, 감각 등의 정보를 전달하고 조정하는 신경계에 의해,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에서 몸과 마음이 신경으로 연결된다는 일원론으로 관점이 이동했는데, 이때 감성은 이성을 대체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했다.
신경계에 대한 생리학적 이론의 융성은 18세기 유럽 의학계 전반의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감성을 강조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 의학계에서는 더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의 신경 의사(nerve doctor) 중 가장 유명했던 휘트이다. 신경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인 감성의 원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교하고 약하기 때문에 병들기도 쉽다. 신경이 인간의 심신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바가 크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반대로 신경의 병 역시 심신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하여 신경성은 많은 적든 모든 병에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근대적 감성의 형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신경성(질병)이 널리 전파되어 문명인의 2/3가 이를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 것은 19세기였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이를 이미 100여 년 전에 예기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한국근대문학에도 감성의 이면에 잠복한 신경성,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것은 당연하다. 정육론을 주장했던 이광수는 “신경쇠약이니 불면증이니 하는 정신적 피로로써 나는 병도 앓아 보고, 혹 근심도 하고, 울기도” 했다고 자신의 심경을 고백한 바 있으며, 섬세한 동시에 부서지기 쉬운 신경의 소유자로 예민하고 변하기 쉬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머릿속이 착란하여” 곤경을 겪던 <무정>의 이형식은 가까스로 이를 봉합하는 데 성공한다. 이광수의 후속 주자들이 맞은 상태는 보다 심각해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의 강엘리자베트는 극심한 심리적 고뇌에 시달리던 끝에 K남작의 변호사로부터 ‘정신이상’이라고 공격 받으며, 신경과민 상태에서 자살의 위기를 겪던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주인공 X는 “내가 미쳤나? 아니, 미치려는 징조인가?”라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