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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고려말 문무병용론의 새로운 제기와 그 의미 = Study on the discussion for equally appointing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n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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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032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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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고려말에 새롭게 제기되었던 문무병용론의 내용과 의미 등을 당대의 체제 개혁 작업과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초기에 문반은 정치, 무반은 군사 분야를 담당하는 양반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출신 성분 등의 차이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무반 측에서 나왔다. 갈수록 양자의 갈등이 커졌다. 예종 때 국학에 무학을 설치하는 등의 문무병용책을 펼쳐 해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무신정변으로 문반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원간섭기의 복잡한 상황을 거쳐 말기에서도 양자의 불화가 지속되었다. 내우외환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는 가운데 문무반의 알력이 여전해 혼란이 증폭되었다. 미봉책으로는 해결이 곤란했다. 체제 개편을 통해 구조적으로 혁신함으로써 문제를 풀어야 했다. 결국 문무병용론이 타개책으로 재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체제 개편과 관련된 병용론을 새롭게 제기했던 이는 공민왕 즉위직후의 이색이었다. 그는 국제 정세의 불안과 내부의 사회 모순이 심각하다며 위기 타개를 위해 우선 문무반의 갈등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무과를 설치해서 제위의 장교를 충당하자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백문보도 송나라 때 사마광이 건의했던 10과를 일부 수정한 천거제를 제안했다. 이는 관리의 전문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색 등은 문무 병용의 관철을 주장했으나 세부의 구체적인 방안까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방도로 병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이후 계속 제기되었던 바의 계기가 되었다. 홍건적의 갑작스런 침입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위기감이극에 달한 가운데 1차 침입 직후 치러진 과거의 시관들은 주로 방어책임자들이었다. 그들은 핵심 병서가 무엇이며 적절한 전략을 세우되의를 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질문했다. 이에 응시했던 정몽주는 최근 발견된 답안에서 문무 겸비자의 등용을 주장하며 그로써 백성과 군사를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방위력 증강이 가능함을 천명했다. 비록 과거 시험 문제와 한 명의 답안에 불과하나 방위와 관련된 당시의 사정이 집약되었다. 성격상 답안의 내용이 곧 바로 시행될 수 없었는데 신돈의 죽음 이후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즉 문무 병용의 실시를 위해 중앙과 외방에 문무 두 학을 개설해서 인재를 양성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이는 고려말 문무 병용의 실질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급한 군사력 강화가 무학의 신설로 표현된 까닭이 그 직후에 올린 우현보 등의 상소에서 확인된다. 즉 왜적 방어의 실패가 군대와 장수의 훈련과 교육의 부족, 선발제의 취약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면 병서로 사람을 뽑는 무과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죽음과 나이어린 우왕이 즉위로 정치적 혼란이 커지면서 무학 운영과 무과의 실시가 곤란해졌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파와 제휴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던 급진개혁파사대부들은 관료제 개편과 군사력 강화를 연계시켜 추진하면서 문무 병용을 기치로 내걸었다. 내용과 강도에서 이전의 방안들과 크게 달랐다. 먼저 그 토대는 사전 개혁에서 구했다. 현직자가 아니면 문무 모두 군역을 부담해야 했는데, 과전법의 실시로 실행되었다. 이에 의거해 관제와 군제 개편을 통해 구체화시켰다. 교육과 선발의 통합 과정을 토대로 실시되는 기초 교양에서는 문무학은 물론 잡학까지 익히되 그 뒤 적성에 맞는 분야로 진출하도록 했다. 관직에 대해 철저한 성적 평가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승진하게 했다. 이로써 가문배경이 아닌 실력과 적성이 출세의 기준이 되도록 했다. 이런 체제로 문무반의 대립과 불화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여 관료제의 운영의 정상화와 군사력 강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급진파의 방안이 실행되는 가운데 왕조 교체가 단행되었다. 그들의 주도로 수립되었던 체제는 마침내 새로운 국가 수립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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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에 새롭게 제기되었던 문무병용론의 내용과 의미 등을 당대의 체제 개혁 작업과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모습에 주목하였...

      고려말에 새롭게 제기되었던 문무병용론의 내용과 의미 등을 당대의 체제 개혁 작업과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초기에 문반은 정치, 무반은 군사 분야를 담당하는 양반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출신 성분 등의 차이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무반 측에서 나왔다. 갈수록 양자의 갈등이 커졌다. 예종 때 국학에 무학을 설치하는 등의 문무병용책을 펼쳐 해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무신정변으로 문반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원간섭기의 복잡한 상황을 거쳐 말기에서도 양자의 불화가 지속되었다. 내우외환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는 가운데 문무반의 알력이 여전해 혼란이 증폭되었다. 미봉책으로는 해결이 곤란했다. 체제 개편을 통해 구조적으로 혁신함으로써 문제를 풀어야 했다. 결국 문무병용론이 타개책으로 재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체제 개편과 관련된 병용론을 새롭게 제기했던 이는 공민왕 즉위직후의 이색이었다. 그는 국제 정세의 불안과 내부의 사회 모순이 심각하다며 위기 타개를 위해 우선 문무반의 갈등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무과를 설치해서 제위의 장교를 충당하자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백문보도 송나라 때 사마광이 건의했던 10과를 일부 수정한 천거제를 제안했다. 이는 관리의 전문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이색 등은 문무 병용의 관철을 주장했으나 세부의 구체적인 방안까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방도로 병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이후 계속 제기되었던 바의 계기가 되었다. 홍건적의 갑작스런 침입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위기감이극에 달한 가운데 1차 침입 직후 치러진 과거의 시관들은 주로 방어책임자들이었다. 그들은 핵심 병서가 무엇이며 적절한 전략을 세우되의를 헤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질문했다. 이에 응시했던 정몽주는 최근 발견된 답안에서 문무 겸비자의 등용을 주장하며 그로써 백성과 군사를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방위력 증강이 가능함을 천명했다. 비록 과거 시험 문제와 한 명의 답안에 불과하나 방위와 관련된 당시의 사정이 집약되었다. 성격상 답안의 내용이 곧 바로 시행될 수 없었는데 신돈의 죽음 이후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즉 문무 병용의 실시를 위해 중앙과 외방에 문무 두 학을 개설해서 인재를 양성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이는 고려말 문무 병용의 실질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급한 군사력 강화가 무학의 신설로 표현된 까닭이 그 직후에 올린 우현보 등의 상소에서 확인된다. 즉 왜적 방어의 실패가 군대와 장수의 훈련과 교육의 부족, 선발제의 취약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려면 병서로 사람을 뽑는 무과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죽음과 나이어린 우왕이 즉위로 정치적 혼란이 커지면서 무학 운영과 무과의 실시가 곤란해졌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파와 제휴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던 급진개혁파사대부들은 관료제 개편과 군사력 강화를 연계시켜 추진하면서 문무 병용을 기치로 내걸었다. 내용과 강도에서 이전의 방안들과 크게 달랐다. 먼저 그 토대는 사전 개혁에서 구했다. 현직자가 아니면 문무 모두 군역을 부담해야 했는데, 과전법의 실시로 실행되었다. 이에 의거해 관제와 군제 개편을 통해 구체화시켰다. 교육과 선발의 통합 과정을 토대로 실시되는 기초 교양에서는 문무학은 물론 잡학까지 익히되 그 뒤 적성에 맞는 분야로 진출하도록 했다. 관직에 대해 철저한 성적 평가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승진하게 했다. 이로써 가문배경이 아닌 실력과 적성이 출세의 기준이 되도록 했다. 이런 체제로 문무반의 대립과 불화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여 관료제의 운영의 정상화와 군사력 강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급진파의 방안이 실행되는 가운데 왕조 교체가 단행되었다. 그들의 주도로 수립되었던 체제는 마침내 새로운 국가 수립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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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main target of this thesis is to look into the content and meaning of the discussion for equally appointing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n the end of Goryeo Dynasty. In Goryeo Dynasty, it had installed and operated a official system composed of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from the beginning. However, due to the difference in its social status, the military officials were discriminated compared to the civil officials. Accordingly, the military officials had lots of complaints and hated the civil officials. The civil officials also did not like the military officers. During King Yejong era, he implemented a policy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and tried to reconcile both parties. However, it eventually failed. Due to an abrupt Military-coup Movement, many civil officials were killed. Due to this accident, the conflict between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 grew deeper. Such phenomenon continued even through the end of Goryeo Dynasty. However, due to the continuous trouble from within and without, the country became very dangerous. Right after King Gongmin were throned, a confucian named Yi Saek started the discussion about equally appointing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He wanted to have the military officers to be selected through the Kwageo(科擧,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s well. He thought it would make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equal by doing that. However, King Gongmin did not accept his proposal. In 1359, when the Red Turban bandits invaded, Goryeo Dynasty fell into a huge turmoil. At such time, for a stable society and a smooth operation within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 Jung Mong-Ju proposed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again. Eventually, the government ordered the schools nationwide to teach tactics. Nevertheless, it did was not successful. After the army came back from Wiwha Island, the aggressive innovative officers that regained the government implemented a overall organizational reform. They reformed the land policy and bureaucratic organization and proposed to set up a system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t finally became real and had influenced a lot to the operation of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 then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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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main target of this thesis is to look into the content and meaning of the discussion for equally appointing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n the end of Goryeo Dynasty. In Goryeo Dynasty, it had installed and operated a official system comp...

      The main target of this thesis is to look into the content and meaning of the discussion for equally appointing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n the end of Goryeo Dynasty. In Goryeo Dynasty, it had installed and operated a official system composed of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from the beginning. However, due to the difference in its social status, the military officials were discriminated compared to the civil officials. Accordingly, the military officials had lots of complaints and hated the civil officials. The civil officials also did not like the military officers. During King Yejong era, he implemented a policy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and tried to reconcile both parties. However, it eventually failed. Due to an abrupt Military-coup Movement, many civil officials were killed. Due to this accident, the conflict between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 grew deeper. Such phenomenon continued even through the end of Goryeo Dynasty. However, due to the continuous trouble from within and without, the country became very dangerous. Right after King Gongmin were throned, a confucian named Yi Saek started the discussion about equally appointing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He wanted to have the military officers to be selected through the Kwageo(科擧,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s well. He thought it would make the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equal by doing that. However, King Gongmin did not accept his proposal. In 1359, when the Red Turban bandits invaded, Goryeo Dynasty fell into a huge turmoil. At such time, for a stable society and a smooth operation within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 Jung Mong-Ju proposed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again. Eventually, the government ordered the schools nationwide to teach tactics. Nevertheless, it did was not successful. After the army came back from Wiwha Island, the aggressive innovative officers that regained the government implemented a overall organizational reform. They reformed the land policy and bureaucratic organization and proposed to set up a system to equally appoint civil officials and military officers. It finally became real and had influenced a lot to the operation of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 then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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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윤훈표, "麗末鮮初 軍法의 運營體系와 改編案" 한국사상사학 21 (21) : 151 ~ 195, 2003

      2 尹薰杓, "중세사회의 변화와 조선 건국" 혜안, 2005

      3 도현철, "이색의 유교교화론과 일본 인식 - 새로 발견된 대책문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 (49) : 151 ~ 174, 2010

      4 도현철, "안축의 대책문과 이민족 대책" 한국사상사학 (38) : 57 ~ 88, 2011

      5 도현철, "대책문을 통해본 정몽주의 국방 대책과 문무겸용론" 한국중세사연구 (26) : 233 ~ 264, 2009

      6 權寧國, "고려후기 군사제도 연구" 서울大學校 大學院, 1995

      7 김종수, "고려전기의 무반과 군반" 한국사연구 (164) : 157 ~ 191, 2014

      8 권영국, "고려전기 군정 ․ 군령기구의 정비" 역사와 현실 73 (73) : 127 ~ 157, 2009

      9 전경숙, "고려전기 군사기구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7

      10 김당택, "고려말 대외관계의 격동과 무장세력의 정치적 지향" 한국사시민강좌 35, 2004

      1 윤훈표, "麗末鮮初 軍法의 運營體系와 改編案" 한국사상사학 21 (21) : 151 ~ 195, 2003

      2 尹薰杓, "중세사회의 변화와 조선 건국" 혜안, 2005

      3 도현철, "이색의 유교교화론과 일본 인식 - 새로 발견된 대책문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 (49) : 151 ~ 174, 2010

      4 도현철, "안축의 대책문과 이민족 대책" 한국사상사학 (38) : 57 ~ 88, 2011

      5 도현철, "대책문을 통해본 정몽주의 국방 대책과 문무겸용론" 한국중세사연구 (26) : 233 ~ 264, 2009

      6 權寧國, "고려후기 군사제도 연구" 서울大學校 大學院, 1995

      7 김종수, "고려전기의 무반과 군반" 한국사연구 (164) : 157 ~ 191, 2014

      8 권영국, "고려전기 군정 ․ 군령기구의 정비" 역사와 현실 73 (73) : 127 ~ 157, 2009

      9 전경숙, "고려전기 군사기구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7

      10 김당택, "고려말 대외관계의 격동과 무장세력의 정치적 지향" 한국사시민강좌 35, 2004

      11 권영국, "고려 초기 장군직의 기능과 성격" 숭실사학 (27) : 199 ~ 223, 2011

      12 권영국, "고려 초기 兵部의 기능과 지위" 사학연구 (88) : 473 ~ 500, 2007

      13 권영국, "고려 초 徇軍部의 설치와 기능의 변화" 한국사연구 (135) : 115 ~ 140, 2006

      14 이성호, "고려 중기 북송의 ‘武學’ 제도 수용" 지역과 역사 31 (31) : 161 ~ 197, 2012

      15 都賢喆, "高麗末期 官僚制 運營의 禮的 原理" 韓國史硏究 101, 1998

      16 朴龍雲, "高麗時代의 臺諫과 宰樞文武兩班" 誠信女子師範大學硏究 論文集 12, 1979

      17 申千湜, "高麗時代 武科와 武學" 軍史 7, 1983

      18 鄭景鉉, "高麗前期 武職體系의 成立" 韓國史論 19, 1988

      19 朴龍雲, "高麗前期 文班과 武班의 身分問題" 韓國史硏究 21, 1978

      20 鄭景鉉, "高麗前期 二軍六衛制 연구" 서울대학교, 1992

      21 朴宰佑, "高麗 恭讓王代 官制改革과 權力構造" 震檀學報 81, 1996

      22 李亨雨, "高麗 恭愍王代의 政治的 推移와 武將勢力" 軍史 39, 1999

      23 金塘澤, "高麗 兩班社會와 한국사의 時代區分" 歷史學報 166, 2000

      24 末松保和, "靑丘史草 第一" 1965

      25 閔丙河, "文武兼全策과 國家發展" 軍史 27, 1993

      26 朴漢男, "恭愍王代 倭寇侵入과 禹玄寶의 ‘上恭愍王疏’" 軍史 34, 1997

      27 閔賢九,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正音文化社,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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