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한국 맹인 점복자의 전개양상 = A Study on the Development Aspect of Blind Fortune Tellers in Korea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06091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Korea, the blind have retained a very important position in folk beliefs as fortune tellers and sutra chanters for a long time. It was in late Goryeo that blind fortune tellers first appeared in documents. Considering that fortune telling perfectly...

      In Korea, the blind have retained a very important position in folk beliefs as fortune tellers and sutra chanters for a long time. It was in late Goryeo that blind fortune tellers first appeared in documents. Considering that fortune telling perfectly fitted the blind for its characteristics and that there were blind fortune tellers already in Tang Dynasty, however, it’s highly likely that Korea had its own custom of fortune telling by the blind starting in South-North States Period.
      In Chosun, fortune telling was most favored as a common occupation among the blind. In addition to sutra chanting, fortune telling allowed the blind to lead a relatively independent life compared to other handicapped people. Since fortune telling was very important in the national level, there is a good chance that blind fortune tellers entered government service as early as in Goryeo. In Chosun, the blind were able to hold an official position through Myeonggwahak even if they were from the lower class as long as they were able. The blind are generally referred to as “chambong” or “bongsa,” which names came from Chambong(Jong 9 Grade) and Bongsa(Jong 8 Grade) that were the titles of official positions in Chosun.
      The number of blind fortune tellers gradually dropped due to the enlightenment and missionary works in late Chosun, the reform of general administrative affairs after the Japanese rule, and the settlement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and massage as the occupations of the blind since 1913. The number, however, temporarily surged after the Korean War as life grew harsh in the urbanization process. It was around those days that blind fortune tellers gathered together and formed a fortune telling street at the foot of Mountain Nam and the Miari Pass in Seoul, under Bridge Yeongdo in Busan, and in front of Dalseong Park in Daegu.
      Fortune telling by the blind enjoyed its heyday in the 1960s. In the following 1970s, however, there were fewer and fewer families that held ceremonies to pray for well-being and good luck due to the Saemaeul Project and modernization, which caused an abrupt disappearance of sutra chanting by the blind and reduced the demand for fortune telling by the blind gradually. Despite all those ups and downs, fortune telling along with acupuncture has established its status as one of major occupations of the blind.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우리나라에서 맹인은 오랫동안 占卜者ㆍ讀經者로서 민간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맹인 점복자에 관한 기록이 비록 고려 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점복은 그 특성상 맹인의 직종...

      우리나라에서 맹인은 오랫동안 占卜者ㆍ讀經者로서 민간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맹인 점복자에 관한 기록이 비록 고려 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지만 점복은 그 특성상 맹인의 직종으로 적합하며, 唐代 중국에도 이미 맹인 점복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남북국시대부터 이미 맹인이 점치는 풍속이 자생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점복은 맹인의 보편적인 직업으로 가장 선호되었는데, 독경과 함께 점복을 통해 맹인은 다른 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적 차원에서 점복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맹인 점복자가 관직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에는 맹인이면서 賤人인 경우에도 유능하면 命課學을 통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맹인을 일반적으로 ‘참봉’ㆍ‘봉사’라고도 하는 것도 조선시대 관직인 참봉(종9품)ㆍ봉사(종8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한말 계몽활동과 선교활동, 일제강점 후 庶政개혁, 그리고 1913년 이후 鍼灸ㆍ안마업이 우리나라 맹인의 직업으로 정착하면서 맹인 점복자는 점차 감소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삶이 척박해짐에 따라 생계수단으로 점복에 종사하는 맹인의 수가 일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때를 즈음하여 도심인 서울의 남산기슭ㆍ미아리고개, 부산 영도다리 밑, 대구 달성공원 앞 등지에 맹인 점복자들이 모이면서 점복거리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맹인 점복업은 전성기를 누렸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근대화과정에서 가정의 안택고사가 사라지면서 맹인 독경이 급속히 사라졌고 이와 함께 맹인 점복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점복업은 침술업과 더불어 맹인의 주요 직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2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3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4

      4 백남중, "한국맹인근대사"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2004

      5 신재효, "한국 판소리 전집" 서문당 1996

      6 김만태, "한국 점복의 정의와 유형 고찰" 한국민속학회 (47) : 2008

      7 임안수, "한국 맹인 직업사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1986

      8 박전열, "풍각쟁이의 기원과 성격" 한국민속학회 11 : 1979

      9 김영진, "판수 고, 최정여박사頌壽기념 민속어문논총" 계명대학교출판부 1983

      10 윤석우, "조선시대 맹인의 활동 연구" 1998

      1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2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3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4

      4 백남중, "한국맹인근대사"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2004

      5 신재효, "한국 판소리 전집" 서문당 1996

      6 김만태, "한국 점복의 정의와 유형 고찰" 한국민속학회 (47) : 2008

      7 임안수, "한국 맹인 직업사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1986

      8 박전열, "풍각쟁이의 기원과 성격" 한국민속학회 11 : 1979

      9 김영진, "판수 고, 최정여박사頌壽기념 민속어문논총" 계명대학교출판부 1983

      10 윤석우, "조선시대 맹인의 활동 연구" 1998

      11 손진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12 이능화,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1986

      13 정창권, "조선 후기 시각 장애인의 삶과 사회적 인식 in :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보다" 돌베개 2005

      14 이찬영, "점복 맹인의 직업과 그 단체의 유래" 1991

      15 백남중, "일제시대 장애인 복지 교육에 관한 고찰-제생원 맹아부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2000

      16 이완우, "시각장애인의 진로교육과 재활" 유연기획 2003

      17 서거정, "사가명저선" 2000

      18 김만태, "명리학의 한국적 수용 및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2005

      19 임안수, "맹인 점복업자의 은어의 어원과 구성 원리" 대구대학교장애인종합연구소 13 (13): 1997

      20 박노자, "국민이라는 이름의 감옥, 탈영자들의 기념비" 생각의 나무 2003

      21 "鄭載崙, 『公私見聞錄』"

      2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經濟六典輯錄" 다은 1993

      23 "李裕元, 『林下筆記』"

      24 "李?光, 『芝峰類說』"

      25 村山智順, "朝鮮의 占卜과 豫言" 동문선 1991

      26 "成俔, 『?齋叢話』"

      27 "徐居正, 『筆苑雜記』"

      28 "『동아일보』, 1927년 7월 19일"

      29 "『高麗史』"

      30 "『經國大典』"

      31 "『活泉』 18, 기독교대한성결교회활천사, 1924"

      32 "『正祖實錄』"

      33 "『東國輿地備攷』"

      34 "『朝鮮盲啞者統計要覽』, 朝鮮總督府濟生院, 1922?1928"

      35 "『新唐書』"

      36 "『成宗實錄』"

      37 "『太祖實錄』"

      38 "『太宗實錄』"

      39 "『世祖實錄』"

      40 "『世宗實錄』"

      41 H. B. Hulbert, "The Korean Mudang and P’ansu" 3 (3): 1903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12-31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rklife ->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lklife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3 0.63 0.6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8 0.66 1.486 0.0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