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12 쿠데타 시기까지 상해의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 및 학생계층과 함께 도시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5년까지 대부분의 노동자투쟁은 외국계 공장들에서 발생하였으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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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73-10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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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12 쿠데타 시기까지 상해의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 및 학생계층과 함께 도시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5년까지 대부분의 노동자투쟁은 외국계 공장들에서 발생하였으며 이...
1927년 4.12 쿠데타 시기까지 상해의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지 및 학생계층과 함께 도시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5년까지 대부분의 노동자투쟁은 외국계 공장들에서 발생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성된 노동자들의 애국주의는 상해의 중국인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1925년의 반자본주의 투쟁의 흐름 속에서 노동자들은 “구국전위대”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워지고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합작이라는 정치적 환경을 이용하여 성장한 좌익세력은 급진적인 정치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와 부르주아, 학생간의 연대를 파괴하는 결과를 산출하였다.
이러한 상황 동안 분명해진 사실은 상해 부르주아지와 비밀결사단체, 국민당-국가간의 동맹세력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밀결사 단체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해관계와 관련된 근본적인 충돌이 발생하였고 그 사이에 국민당은 이 충돌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위한 자금 부족을 겪고 있었다.
1932년 일본의 상해 침입은 이러한 권력관계들을 변화시켰다고 여겨진다. 애국심이 팽창하는 가운데 1925년 상해 중국사회에서 등장했던 막강한 통일전선이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의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와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반일 선봉부대에 서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고 이들은 도시권력자들에 대해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양보와 타협을 행한 중국 자본가와 같은 상해 부르주아들의 친일행적은 욕망으로 가득찬 소비문화로 치장된 경제논리로 은폐되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방어하기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저항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灰暗時代’ 속에서도 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도시권력 체계 내에서 상해 노동자들의 지위는 더욱 종속적으로 변해갔고 노동자 조직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새로운 거시적인 변화가 상해사회의 기존권력 체계를 변화시킬 때까지,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조계권력/국민당-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상해사회의 ‘내적식민지’로 남게 되었다.
목차 (Table of Contents)
Competing Desires for Mobi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