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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émoires de Madame La Marquise De La Rochejaquel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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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이 후대에 기억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남긴 『회고록』 때문이다. 『회고록』에는 후작부인의 유년시절부터 1814년 3월 12일 앙굴렘 공작(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샤를 10세의 장남)의 보르도 입성까지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부분은 1793년 3월부터 1793년 12월말까지 진행된 방데전쟁에 대한 기술이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종식되면서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을 위시한 방데의 도망자들에 대한 박해가 누그러졌고, 그해 말 사면이 단행되었다. 후작부인은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냈다.
      혁명력 5년 수확월 18일(1797년 9월4일)의 위기가 발생하면서 후작부인의 삶에 파란이 일어났다. 후작부인은 혁명기에 망명을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망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안에 있다가 발각되면 망명자로서 취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후작부인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8개월 후, 그녀는 망명을 떠나지 않았음이 인정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롱드도(道)에서는 그녀를 망명자 명부에서 삭제했으나 파리에서는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10개월 체류한 후 1799년 5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녀가 『회고록』 집필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후작부인은 1802년 재혼한 후 그동안 중단했던 회고록 집필을 계속했고, 방데전쟁 중에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어머니와 전쟁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초고를 완성했다. 후작부인이 초고의 내용을 수정하고 표현을 다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역사가이고 작가이며 정치가인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1782-1866)였다. 후작부인의 초고에 담겨 있던 솔직하고 거친 표현들은 바랑트의 문재(文才)를 통해 정제되어 1814년에 출판되었다.
      『회고록』은 방데전쟁을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논쟁에서 수정주의 해석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퓌레 역시 방데전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이 『회고록』을 꼽고 있다.
      본 신청자가 번역하고자 하는 것은 후작부인의 생존시에 출판된 마지막 판인 1848년의 제6판이다. 제5판까지는 초판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1848년의 제6판은 구성이 달라졌다. 원래 필사본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세 장(章)으로 구성했었으나 1814년의 초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장으로 줄였던 것을 1848년판에서는 원래대로 세 장(책의 제1장, 제2장, 제3장)으로 구성하였다. 또 1848년판에서는 초판에 있던 보유(supplément)를 3장으로 늘였고(제26장, 제27장, 제28장), 브르타뉴 지방에 숨어 지낼 때 도움을 준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기술을 덧붙였다.
      『회고록』이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솔직하고 사실적인 기술 때문이다. 후작부인이 간결한 문체를 고집한 이유도 간결한 문체만이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792년 8월 10일, 왕궁을 공격하는 파리의 상퀼로트(민중)를 피해 남편과 함께 도망 다니던 후작부인은 극심한 공포에 이성을 잃고서 급기야는 “상퀼로트 만세! 불을 비추어라! 유리창을 부셔라!”라고 마치 상퀼로트처럼 외쳤다. 20살의 젊은 귀족부인은 너무도 무서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서 후작부인의 기술을 신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앙제를 공격할 때 후작부인은 전투에서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일종의 착란상태에 빠졌다. 말을 타고 무작정 전진하는 그녀를 아버지가 구해주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나는 내가 찾아 나선 위험에서 벗어날 때 은근한 만족감을 느꼈다”고 기술한다. 부르타뉴 지방에 은거할 때 공화파의 야간 수색에 쫓겨 농가에서 나온 후작부인과 어머니는 들판에서 잠을 잔다. 그때 후작부인은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루아르 강을 넘어서 유랑하던 시기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하던 시기였다.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도 “나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울먹였다. 후작부인은 브르타뉴의 농가에 숨어 지내다 낳은 쌍둥이 딸의 죽음을 보며, 담담하게 “네가 나보다 더 행복하구나”라고 말한다. 아버지, 남편, 세 딸의 죽음을 그토록 담담하게 맞이하고 표현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가 1848년판에 소개한 화려한 궁정생활과 대조되어 더욱 처절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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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이 후대에 기억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남긴 『회고록』 때문이다. 『회고록』에는 후작부인의 유년시절부터 1814년 3월 12일 앙굴렘 공작(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이 후대에 기억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남긴 『회고록』 때문이다. 『회고록』에는 후작부인의 유년시절부터 1814년 3월 12일 앙굴렘 공작(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샤를 10세의 장남)의 보르도 입성까지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부분은 1793년 3월부터 1793년 12월말까지 진행된 방데전쟁에 대한 기술이다.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종식되면서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을 위시한 방데의 도망자들에 대한 박해가 누그러졌고, 그해 말 사면이 단행되었다. 후작부인은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냈다.
      혁명력 5년 수확월 18일(1797년 9월4일)의 위기가 발생하면서 후작부인의 삶에 파란이 일어났다. 후작부인은 혁명기에 망명을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망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안에 있다가 발각되면 망명자로서 취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후작부인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8개월 후, 그녀는 망명을 떠나지 않았음이 인정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롱드도(道)에서는 그녀를 망명자 명부에서 삭제했으나 파리에서는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10개월 체류한 후 1799년 5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녀가 『회고록』 집필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후작부인은 1802년 재혼한 후 그동안 중단했던 회고록 집필을 계속했고, 방데전쟁 중에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던 어머니와 전쟁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초고를 완성했다. 후작부인이 초고의 내용을 수정하고 표현을 다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역사가이고 작가이며 정치가인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1782-1866)였다. 후작부인의 초고에 담겨 있던 솔직하고 거친 표현들은 바랑트의 문재(文才)를 통해 정제되어 1814년에 출판되었다.
      『회고록』은 방데전쟁을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논쟁에서 수정주의 해석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퓌레 역시 방데전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이 『회고록』을 꼽고 있다.
      본 신청자가 번역하고자 하는 것은 후작부인의 생존시에 출판된 마지막 판인 1848년의 제6판이다. 제5판까지는 초판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1848년의 제6판은 구성이 달라졌다. 원래 필사본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세 장(章)으로 구성했었으나 1814년의 초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장으로 줄였던 것을 1848년판에서는 원래대로 세 장(책의 제1장, 제2장, 제3장)으로 구성하였다. 또 1848년판에서는 초판에 있던 보유(supplément)를 3장으로 늘였고(제26장, 제27장, 제28장), 브르타뉴 지방에 숨어 지낼 때 도움을 준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기술을 덧붙였다.
      『회고록』이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솔직하고 사실적인 기술 때문이다. 후작부인이 간결한 문체를 고집한 이유도 간결한 문체만이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792년 8월 10일, 왕궁을 공격하는 파리의 상퀼로트(민중)를 피해 남편과 함께 도망 다니던 후작부인은 극심한 공포에 이성을 잃고서 급기야는 “상퀼로트 만세! 불을 비추어라! 유리창을 부셔라!”라고 마치 상퀼로트처럼 외쳤다. 20살의 젊은 귀족부인은 너무도 무서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서 후작부인의 기술을 신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앙제를 공격할 때 후작부인은 전투에서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일종의 착란상태에 빠졌다. 말을 타고 무작정 전진하는 그녀를 아버지가 구해주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나는 내가 찾아 나선 위험에서 벗어날 때 은근한 만족감을 느꼈다”고 기술한다. 부르타뉴 지방에 은거할 때 공화파의 야간 수색에 쫓겨 농가에서 나온 후작부인과 어머니는 들판에서 잠을 잔다. 그때 후작부인은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루아르 강을 넘어서 유랑하던 시기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하던 시기였다.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도 “나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울먹였다. 후작부인은 브르타뉴의 농가에 숨어 지내다 낳은 쌍둥이 딸의 죽음을 보며, 담담하게 “네가 나보다 더 행복하구나”라고 말한다. 아버지, 남편, 세 딸의 죽음을 그토록 담담하게 맞이하고 표현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가 1848년판에 소개한 화려한 궁정생활과 대조되어 더욱 처절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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