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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의 ‘원리일본’과 1930년대의 일본 = Minoda Muneki’s Nihonshugi and Japan in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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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Minoda Muneki is a representative person who appeared negatively in cases involving academic freedom and intellectuals in Japan in the 1930s. At first, Minoda had become notorious in the Takigawa case in 1933. And the “Emperor Organ Theory” (J. Tennōkikansetsu ) in 1935and Tsuda Sōkichi in 1939 made his name even more so. Minoda had checked the thought of liberal intellectuals and academic freedom from the shadows in these cases and sometimes in public.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Minoda’s attacks were concentrated in the 1930s and focused on intellectuals and their scholarship. What resentments and thought structures were behind his attacks and acts?First, it may be surmised that Minoda participated in the right-wing group Genri Nihonsha (Fundamental Japan Association) or believed in “The Art of Classical Japanese Poetry” (J. Shikishimanomichi ), and “The Way of the Gods” (J. Kannagaranomichi ). That is to say, his religion was “Japan.” And his passionate character should also be noted.
      On the other hand, his private history should not be disregarded.
      That is, Minoda had bitterly criticized Morito Tatsuo in the Morito case,and he himself had become a target of criticism. Minoda’s complex toward the imperial universities may also be raised. This paper does not concentrate on “private” elucidation of Minoda’s resentment. But his private emotions toward the imperial universities, in that the persistence of this thought came from private human relations, cannot be avoided.
      Finally, the mood in the 1930s should be mentioned. The 1930s may be treated as an emergency that required the unification of thought by “Japan” as one nation or Japanese “thought” for Japanese. Therefore,democracy, rationalism, individualism, and Marxism had to be eradicated “practically,” and Minoda assumed the main role in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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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oda Muneki is a representative person who appeared negatively in cases involving academic freedom and intellectuals in Japan in the 1930s. At first, Minoda had become notorious in the Takigawa case in 1933. And the “Emperor Organ Theory” (J. Te...

      Minoda Muneki is a representative person who appeared negatively in cases involving academic freedom and intellectuals in Japan in the 1930s. At first, Minoda had become notorious in the Takigawa case in 1933. And the “Emperor Organ Theory” (J. Tennōkikansetsu ) in 1935and Tsuda Sōkichi in 1939 made his name even more so. Minoda had checked the thought of liberal intellectuals and academic freedom from the shadows in these cases and sometimes in public.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Minoda’s attacks were concentrated in the 1930s and focused on intellectuals and their scholarship. What resentments and thought structures were behind his attacks and acts?First, it may be surmised that Minoda participated in the right-wing group Genri Nihonsha (Fundamental Japan Association) or believed in “The Art of Classical Japanese Poetry” (J. Shikishimanomichi ), and “The Way of the Gods” (J. Kannagaranomichi ). That is to say, his religion was “Japan.” And his passionate character should also be noted.
      On the other hand, his private history should not be disregarded.
      That is, Minoda had bitterly criticized Morito Tatsuo in the Morito case,and he himself had become a target of criticism. Minoda’s complex toward the imperial universities may also be raised. This paper does not concentrate on “private” elucidation of Minoda’s resentment. But his private emotions toward the imperial universities, in that the persistence of this thought came from private human relations, cannot be avoided.
      Finally, the mood in the 1930s should be mentioned. The 1930s may be treated as an emergency that required the unification of thought by “Japan” as one nation or Japanese “thought” for Japanese. Therefore,democracy, rationalism, individualism, and Marxism had to be eradicated “practically,” and Minoda assumed the main role in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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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는 1930년대의 일본에서 학문적인 자유와 지식인들에 관련된 사건에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이름이다.
      먼저 미노다는 1933년의 다키가와 사건을 통해서 악명을 떨쳤다. 1935년의 천황기관설사건과 1939년의 쓰다 소키치 사건은 그 악명을 결정적으로 것으로 만들었다. 즉 미노다는 전전 일본의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사상과 학문적인 자유를 행동을 통해서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노다의 공격이 시대적으로는 1930년대에 대상으로는 지식인들에 집중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노다가 이러한 공격을 자행한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먼저 미노다가 주도가 되어 참여한 原理日本社와 미노다가 중시한 시키시미노미치(シキシマノミチ)・간나가라노미치(かんながらのみち)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직과 사상은 日本이라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 즉 미노다는 日本이라는 종교를 신앙했거나 그 자신이 그 종교 자체였던 것이다.
      한편 그의 개인사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노다는 1920년의 모리토 사건에서 모리토 다쓰오(森戸辰男)를 격렬히 비판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모리토를 옹호하는 인물들의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노다의 제국대학에 대한 콤플렉스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노다는 여러 장면에서 제국대학의 교수들과 충돌했던 것이다.
      끝으로 1930년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는 위기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는 사상적인 통일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日本이라는 사상이 강요되었으며 미노다의 역할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 마르크시즘은 실질적으로 근절되어야 했다. 아니 이러한 사상을 근절하기 위한 분위기 자체를 미노다로 대표되는 전전의 일본이 자의적으로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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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는 1930년대의 일본에서 학문적인 자유와 지식인들에 관련된 사건에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이름이다. 먼저 미노다는 1933년의 다키가와 사건을 ...

      미노다 무네키(蓑田胸喜)는 1930년대의 일본에서 학문적인 자유와 지식인들에 관련된 사건에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이름이다.
      먼저 미노다는 1933년의 다키가와 사건을 통해서 악명을 떨쳤다. 1935년의 천황기관설사건과 1939년의 쓰다 소키치 사건은 그 악명을 결정적으로 것으로 만들었다. 즉 미노다는 전전 일본의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사상과 학문적인 자유를 행동을 통해서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노다의 공격이 시대적으로는 1930년대에 대상으로는 지식인들에 집중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노다가 이러한 공격을 자행한 사상적 배경은 무엇인가?먼저 미노다가 주도가 되어 참여한 原理日本社와 미노다가 중시한 시키시미노미치(シキシマノミチ)・간나가라노미치(かんながらのみち)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직과 사상은 日本이라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 즉 미노다는 日本이라는 종교를 신앙했거나 그 자신이 그 종교 자체였던 것이다.
      한편 그의 개인사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노다는 1920년의 모리토 사건에서 모리토 다쓰오(森戸辰男)를 격렬히 비판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모리토를 옹호하는 인물들의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노다의 제국대학에 대한 콤플렉스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노다는 여러 장면에서 제국대학의 교수들과 충돌했던 것이다.
      끝으로 1930년대라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는 위기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는 사상적인 통일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日本이라는 사상이 강요되었으며 미노다의 역할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 마르크시즘은 실질적으로 근절되어야 했다. 아니 이러한 사상을 근절하기 위한 분위기 자체를 미노다로 대표되는 전전의 일본이 자의적으로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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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龍北敎育委員會, "龍北村史" 1973

      2 佐藤優, "革命を回避するために(上) 再び蓑田胸喜について" 11 (11): 2007

      3 佐藤優, "連戰連勝「狂氣の論客」蓑田胸喜の生涯" 24 (24): 2005

      4 富岡幸一郞, "西田幾多郞から蓑田胸喜まで「昭和思 想」の最高峰を辿る, (特集 平成二十年 偉大なる昭和の面影)" 40 (40): 2008

      5 內田剛弘, "表現の自由は, いま言論封殺に狂奔した蓑田胸喜-治安維持法 時代の民間思想檢察官" (399) : 2002

      6 竹內洋, "蓑田胸喜全集 1-7권" 柏書房 2004

      7 植村和秀, "蓑田胸喜の西田幾多郞批判-論理的解析(2·完)" 41 (41): 2007

      8 植村和秀, "蓑田胸喜の西田幾多郞批判-論理的解析(1)" 39 (39): 2006

      9 宮本盛太郞, "蓑田胸喜と瀧川事件" (370) : 1997

      10 鹽出環, "蓑田胸喜と原理日本社" (9) : 2003

      1 龍北敎育委員會, "龍北村史" 1973

      2 佐藤優, "革命を回避するために(上) 再び蓑田胸喜について" 11 (11): 2007

      3 佐藤優, "連戰連勝「狂氣の論客」蓑田胸喜の生涯" 24 (24): 2005

      4 富岡幸一郞, "西田幾多郞から蓑田胸喜まで「昭和思 想」の最高峰を辿る, (特集 平成二十年 偉大なる昭和の面影)" 40 (40): 2008

      5 內田剛弘, "表現の自由は, いま言論封殺に狂奔した蓑田胸喜-治安維持法 時代の民間思想檢察官" (399) : 2002

      6 竹內洋, "蓑田胸喜全集 1-7권" 柏書房 2004

      7 植村和秀, "蓑田胸喜の西田幾多郞批判-論理的解析(2·完)" 41 (41): 2007

      8 植村和秀, "蓑田胸喜の西田幾多郞批判-論理的解析(1)" 39 (39): 2006

      9 宮本盛太郞, "蓑田胸喜と瀧川事件" (370) : 1997

      10 鹽出環, "蓑田胸喜と原理日本社" (9) : 2003

      11 立花隆, "私の東大論(43) 筧克彦と「神ながらの道」-蓑田胸喜が影響を受けた二人の東大敎授" 81 (81): 2003

      12 立花隆, "私の東大論(42) 狂信右翼·蓑田胸喜と瀧川事件" 81 (81): 2003

      13 薗田稔, "神道史大辭典" 吉川弘文館 2004

      14 "熊本日日新聞"

      15 津田左右吉, "津田左右吉全集 9" 岩波書店 1964

      16 大島崇, "河合事件再考-蓑田胸喜の河合榮治郞「學術的自治無能力」論(敎育實踐記錄 「大學自治」の歷史硏究)" (9) : 2005

      17 植村和秀, "昭和の思想" 講談社 2010

      18 宮瀨睦夫, "明治天皇御製" 至文堂 1943

      19 松澤俊二, "明治天皇「御製」のポリティクス" 79 : 2008

      20 竹內洋, "日本主義的敎養の時代 大學批判の古層" 柏書房 2006

      21 森正藏, "旋風二十年" 鱒書房 1947

      22 竹內洋, "敎養主義の沒落-變わりゆくエリート學生文化" 中公新書 2003

      23 竹內洋, "大學という病 東大紛擾と敎授群像" 中央公論新社 2001

      24 鹽出環, "原理日本社論の限界と錯誤-蓑田胸喜と原理日本社をめぐる諸問題" 11 : 2008

      25 小川忠, "原理主義とは何か" 講談社 2003

      26 臼杵陽, "原理主義" 岩波書店 1999

      27 丸山眞男, "丸山眞男集 전17권" 岩波書店 1995

      28 竹內洋, "丸山眞男の時代" 中公新書 2005

      29 植村和秀, "丸山眞男の日本ナショナリズム批判" (9) : 2006

      30 竹內洋, "丸山眞男と蓑田胸喜" 36 (36): 2004

      31 昆野伸幸, "三井甲之「蓑田胸喜君の靈にさゝぐるのりと」飜刻と解題" 38 : 2006

      32 佐藤優, "いまなぜ蓑田胸喜なのか-封印された昭和思想" 39 (39): 2007

      33 細川隆元, "「日本マッカーシー」始末記〔蓑田胸喜〕" 32 (32): 1954

      34 植村和秀, "「日本」への問いをめぐる鬪爭 京都學派と原理日本社" 柏書房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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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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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8 1.18 1.1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6 0.98 2.15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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