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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百濟의 對중국 교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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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後百濟와 吳越의 관계는 늦어도 8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崔藝熙가 파견된 896년부터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백제가 일찍부터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과 함께 문화의 교류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신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견훤의 입장에서는 당이 외교상대로 후백제를 선택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하고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오월을 외교상대로 삼아 문화교류 및 국제적 위상의 확보라는 실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後高句麗(泰封)와 그 뒤를 이은 高麗의 성립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견제라는 현실적인 목적도 존재했다.
    900년 이후의 양국 교류는 905년 6월에 逈微가 武州會津으로 귀국한 사례, 906년에 玄暉가 후백제 내의 포구를 이용해 渡唐한 사례, 908년 7월에 무주 회진으로 돌아온 慶猷의 사례, 909년에 무주 昇平으로 귀국한 麗嚴의 사례, 911년에 羅州의 회진으로 귀국한 利嚴의 사례 등을 통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오월은 후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927년에 있었던 후백제와 고려의 質子 사망에 대한 오월의 후백제 지지를 통해서 확인이 된다.
    925년에 가면 후백제는 당시 새롭게 건국된 後唐과의 통교를 통해 외교관계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후백제는 고려 견제를 위해 927년에는 거란과의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오월과의 단선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후당과 거란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다각 외교를 통해 국제관계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란과의 교류는 후당과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후백제와 거란의 연합은 후당의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당은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고려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백제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후백제의 대외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933년에 있었던 神劍의 왕위 찬탈이었다. 그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견훤의 실각으로 인해 오월과는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권 안정이 중요한 신검은 후당의 淸泰 연호를 사용하며 외교 노선의 변화를 꾀하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후당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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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百濟와 吳越의 관계는 늦어도 8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崔藝熙가 파견된 896년부터는 ...

    後百濟와 吳越의 관계는 늦어도 8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崔藝熙가 파견된 896년부터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백제가 일찍부터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과 함께 문화의 교류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신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견훤의 입장에서는 당이 외교상대로 후백제를 선택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하고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오월을 외교상대로 삼아 문화교류 및 국제적 위상의 확보라는 실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後高句麗(泰封)와 그 뒤를 이은 高麗의 성립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견제라는 현실적인 목적도 존재했다.
    900년 이후의 양국 교류는 905년 6월에 逈微가 武州會津으로 귀국한 사례, 906년에 玄暉가 후백제 내의 포구를 이용해 渡唐한 사례, 908년 7월에 무주 회진으로 돌아온 慶猷의 사례, 909년에 무주 昇平으로 귀국한 麗嚴의 사례, 911년에 羅州의 회진으로 귀국한 利嚴의 사례 등을 통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오월은 후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927년에 있었던 후백제와 고려의 質子 사망에 대한 오월의 후백제 지지를 통해서 확인이 된다.
    925년에 가면 후백제는 당시 새롭게 건국된 後唐과의 통교를 통해 외교관계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후백제는 고려 견제를 위해 927년에는 거란과의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오월과의 단선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후당과 거란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다각 외교를 통해 국제관계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란과의 교류는 후당과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후백제와 거란의 연합은 후당의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당은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고려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백제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후백제의 대외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933년에 있었던 神劍의 왕위 찬탈이었다. 그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견훤의 실각으로 인해 오월과는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권 안정이 중요한 신검은 후당의 淸泰 연호를 사용하며 외교 노선의 변화를 꾀하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후당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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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Later Baekje Kingdom’s exchanges with China were investigated centered on its relations with the Wuyue Kingdom in the Zhejiang region and the Later Tang Dynasty of the Five Dynasties. The diplomatic ties between the Later Baekje Kingdom and the Wuyue Kingdom began as late as in the mid 890s and lasted until the fall of the Kingdom. Their ties had the practical purpose of keeping Goryeo in check. Such purpose was confirmed by the Wuyue Kingdom’s support for the Later Baekje Kingdom’s killing of a Goryeo hostage.
    The Later Baekje Kingdom tried to expand its global reach by establishing diplomatic ties with the Later Tang Dynasty in 925, which had been newly founded, and with the Khitans in 927 with an eye on keeping Gorye in check. However, its relationship with the Khitans had negative impact on its relationship with the Later Tang Dynasty. Because for the Later Tang Dynasty, the alliance between the Later Baekje Kingdom and the Khitans could pose a threat to them so they understandably expressed opposition to the Later Baekje Kingdom’s relationship with the Khitans and started keeping a distance from the Kingdom by supporting Goryeo.
    Since then, what changed the Later Baekje Kingdom’s foreign relations was the usurpation of the throne by Gyeon Singeom in 933. Because a crack in the Later Baekje Kingdom’s relationship with the Wuyue Kingdom appeared when Gyeon Hwon who had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the Wuyue Kingdom fell from the power. Singeom tried to bring about a change to the Later Baekje Kingdom’s diplomatic platform by using the Qingtai era of the Later Tang Dynasty. However, the change did not have big effect on improving the relations with the Later Tang Dynasty as the Later Baekje Kingdom was ultimately destr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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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Later Baekje Kingdom’s exchanges with China were investigated centered on its relations with the Wuyue Kingdom in the Zhejiang region and the Later Tang Dynasty of the Five Dynasties. The diplomatic ties between the Later Baekje Kingdom and the ...

    The Later Baekje Kingdom’s exchanges with China were investigated centered on its relations with the Wuyue Kingdom in the Zhejiang region and the Later Tang Dynasty of the Five Dynasties. The diplomatic ties between the Later Baekje Kingdom and the Wuyue Kingdom began as late as in the mid 890s and lasted until the fall of the Kingdom. Their ties had the practical purpose of keeping Goryeo in check. Such purpose was confirmed by the Wuyue Kingdom’s support for the Later Baekje Kingdom’s killing of a Goryeo hostage.
    The Later Baekje Kingdom tried to expand its global reach by establishing diplomatic ties with the Later Tang Dynasty in 925, which had been newly founded, and with the Khitans in 927 with an eye on keeping Gorye in check. However, its relationship with the Khitans had negative impact on its relationship with the Later Tang Dynasty. Because for the Later Tang Dynasty, the alliance between the Later Baekje Kingdom and the Khitans could pose a threat to them so they understandably expressed opposition to the Later Baekje Kingdom’s relationship with the Khitans and started keeping a distance from the Kingdom by supporting Goryeo.
    Since then, what changed the Later Baekje Kingdom’s foreign relations was the usurpation of the throne by Gyeon Singeom in 933. Because a crack in the Later Baekje Kingdom’s relationship with the Wuyue Kingdom appeared when Gyeon Hwon who had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the Wuyue Kingdom fell from the power. Singeom tried to bring about a change to the Later Baekje Kingdom’s diplomatic platform by using the Qingtai era of the Later Tang Dynasty. However, the change did not have big effect on improving the relations with the Later Tang Dynasty as the Later Baekje Kingdom was ultimately destr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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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요약
    • 머리말
    • Ⅰ. 吳越과의 교류
    • Ⅱ. 북중국 국가와의 교류
    • 맺음말
    • 요약
    • 머리말
    • Ⅰ. 吳越과의 교류
    • Ⅱ. 북중국 국가와의 교류
    •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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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遼史"

    2 全基雄, "羅末麗初의 地方社會와 知州諸軍事" 4 : 1987

    3 日野開三郞, "羅末三國の鼎立と對大陸海上交通貿易4" 20 : 1961

    4 高明完, "羅州考" 10 : 1989

    5 이도학, "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주류성 2015

    6 김수태, "후백제의 대신라 고려 관계" 한국중세사학회 (41) : 125-157, 2015

    7 백제연구소,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8 문안식, "후백제 전쟁사 연구" 혜안 2008

    9 진정환, "후백제 불교조각의 대외교섭" 백제연구소 (61) : 147-175, 2015

    10 전북전통문화연구소,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1 "遼史"

    2 全基雄, "羅末麗初의 地方社會와 知州諸軍事" 4 : 1987

    3 日野開三郞, "羅末三國の鼎立と對大陸海上交通貿易4" 20 : 1961

    4 高明完, "羅州考" 10 : 1989

    5 이도학, "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주류성 2015

    6 김수태, "후백제의 대신라 고려 관계" 한국중세사학회 (41) : 125-157, 2015

    7 백제연구소,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8 문안식, "후백제 전쟁사 연구" 혜안 2008

    9 진정환, "후백제 불교조각의 대외교섭" 백제연구소 (61) : 147-175, 2015

    10 전북전통문화연구소,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11 조인성,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2007

    12 곽장근, "진안고원 초기청자의 등장배경 연구" 전북사학회 (42) : 107-136, 2013

    13 배재훈, "입당 유학생 최승우와 후백제 견훤 정권" 신라사학회 (26) : 237-300, 2012

    14 국립전주박물관, "대외관계로 본 후백제" 공감 2015

    15 김용선, "궁예의 나라 태봉 그 역사와 문화" 일조각 2008

    16 金杜珍, "고려전기 교종과 선종의 교섭사상사 연구" 一潮閣 2006

    17 허인욱, "고려 초 남중국 국가와의 교류" 한국국학진흥원 (24) : 219-260, 2014

    18 "高麗史"

    19 허인욱, "高麗․後周 관계와 光宗의 영토 확장" 전북사학회 (43) : 85-112, 2013

    20 許興植, "韓國金石全文 古代編" 亞細亞文化社 1984

    21 한국역사연구회, "譯註羅末麗初金石文" 혜안 1996

    22 야마사키 마사토시, "甄萱政權과 日本의 交涉" 한국고대사학회 35 : 69-94, 2004

    23 金庠基, "東方史論叢"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24 "東文選"

    25 金鍾萬, "晉州城矗石樓外廓試掘調査報告書" 國立晉州博物館․晉州市 2002

    26 권덕영, "新羅下代 西·南海域의 海賊과 豪族" 한국고대사학회 (41) : 299-333, 2006

    27 小宮秀陵, "新羅․渤海의 對唐藩鎭交涉硏究" 서울大學校 2013

    28 한태일, "慶甫와 그의 曹洞禪思想" 한국고대사학회 (42) : 313-346, 2006

    29 변동명, "後百濟의 海上活動과 對外關係" 한국고대사탐구학회 (19) : 277-317, 2015

    30 이도학, "後百濟와 吳越國 交流에서의 新知見" 백제문화연구소 1 (1): 101-116, 2015

    31 申虎澈, "後百濟甄萱政權硏究" 一潮閣 1993

    32 韓圭哲, "後三國時代高麗와 契丹關係" 1 : 1985

    33 李在範, "後三國時代弓裔政權硏究" 혜안 2007

    34 최연식, "康津無爲寺先覺大師碑를 통해 본 弓裔행적의 재검토" 7 : 2011

    35 "寶慶四明志"

    36 張東翼, "宋代麗史資料集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37 "契丹國志"

    38 盧向前, "吳越國與百濟關係略論" 2005

    39 "吳越備史"

    40 權悳永, "古代韓中外交史-遣唐使硏究-" 一潮閣 1997

    41 "南漢書考異"

    42 "十國春秋"

    43 "冊府元龜"

    44 "佛祖統紀"

    45 허인욱, "井邑 山內 龍藏寺 관련 기록의 검토 - 後百濟代 창건을 중심으로 -" 전북사학회 (48) : 31-58, 2016

    46 김종섭, "五代의 高麗에 대한 인식" 이화사학연구소 (33) : 27-43, 2006

    47 김재만, "五代와 後三國․高麗初期의 關係史" 17 : 1983

    48 金東晸, "五代十國의 韓半島諸國과의 관계와 그 인식" 12․13 : 1999

    49 "三國遺事"

    50 "三國史記"

    51 전기웅, "『삼국유사』 소재 ‘眞聖女大王居陁知’ 조 설화의 검토" 한국민족문화연구소 (38) : 217-251, 2010

    52 최연식, "《大東金石書》所載‘包川某寺碑’와 海龍王寺圓悟大師" 5 : 2010

    53 이윤미, "9世紀 後半 武州地域의 政治的 動向과 甄萱의 自立" 역사교육학회 (44) : 173-2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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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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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11 1.11 1.0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3 1.05 2.153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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