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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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ksagi and Nihonsoki, saw review. As a result, these records have been found the possibility to see the historical facts of Garaguk rather than Garakguk.
‘Area article Garakguk’ appears in the founding myth of KIng Suro. But the fact of the historical founding of King Suro time to can not see. Perhaps reflecting the greater the likely area of Garaguk after the loss of the Gimun region to the 6th century Baekje. The reason is because that the record ‘Jiri-Mountains’ or ‘east of Jiri-Mountains’ in one of the northwest region.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ison with the first article in this month’s record Garaguk of Nihonsoki Keitai of 23 years in March is very similar in its content or structure surfaces. For example, there was the King Jwaji wife ‘Hired-Woman’ and King Inoe wife Silla princess led her flock to follow everyone. And the crowd has been withdrawn causes of the incident, such as ‘domestic disturbances’, or ‘changing clothes clothed’ receive the checks from the opposition, respectively.
These results of this paper will be able to find its own means of paper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future Garaguk, Garakgukgi will also be available as a single material.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삼국사기』 및 『일...
본고는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삼국사기』 및 『일본서기』 등의 사서와 비교,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이들 기록은 가락국의 史蹟이라기보다는 가라국의 사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가락국의 영역 기사’는 수로왕의 건국신화 중에 보인다. 하지만 수로왕 건국 무렵의 사실로는 볼 수 없다. 아마 6세기 전반 백제에게 기문지역을 상실한 후의 가라국의 영역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까닭은 그 영역의 서북쪽이 ‘지리산’ 혹은 ‘지리산동’을 한계로 한다는 기록 때문이다.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는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3월 첫 번째 시월조의 가라국 기사와 비교해보면 그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좌지왕의 부인이었던 ‘용녀’와 이뇌왕의 부인 신라왕녀는 모두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국내요란’, 혹은 ‘변복’ 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각각 반대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퇴출되고 있다.
본고의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향후 가라국사 연구에 『가락국기』도 하나의 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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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명종대 정몽주 인식 - 박상의 『동국사략』과 유희령의 『표제음주동국사략』을 중심으로 -
1970년대 후반 부산지역 학생운동 연구 - 1978년을 중심으로 -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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