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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駕洛國記』에 보이는 加羅國 = Garaguk Looks to the Garakguk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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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86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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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ksagi and Nihonsoki, saw review. As a result, these records have been found the possibility to see the historical facts of Garaguk rather than Garakguk.
      ‘Area article Garakguk’ appears in the founding myth of KIng Suro. But the fact of the historical founding of King Suro time to can not see. Perhaps reflecting the greater the likely area of Garaguk after the loss of the Gimun region to the 6th century Baekje. The reason is because that the record ‘Jiri-Mountains’ or ‘east of Jiri-Mountains’ in one of the northwest region.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ison with the first article in this month’s record Garaguk of Nihonsoki Keitai of 23 years in March is very similar in its content or structure surfaces. For example, there was the King Jwaji wife ‘Hired-Woman’ and King Inoe wife Silla princess led her flock to follow everyone. And the crowd has been withdrawn causes of the incident, such as ‘domestic disturbances’, or ‘changing clothes clothed’ receive the checks from the opposition, respectively.
      These results of this paper will be able to find its own means of paper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future Garaguk, Garakgukgi will also be available as a single material.
      번역하기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駕洛國記』).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ksagi and Nihonsoki, saw review. As a result, these records have been found the possibility to see the historical facts of Garaguk rather than Garakguk.
      ‘Area article Garakguk’ appears in the founding myth of KIng Suro. But the fact of the historical founding of King Suro time to can not see. Perhaps reflecting the greater the likely area of Garaguk after the loss of the Gimun region to the 6th century Baekje. The reason is because that the record ‘Jiri-Mountains’ or ‘east of Jiri-Mountains’ in one of the northwest region.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ison with the first article in this month’s record Garaguk of Nihonsoki Keitai of 23 years in March is very similar in its content or structure surfaces. For example, there was the King Jwaji wife ‘Hired-Woman’ and King Inoe wife Silla princess led her flock to follow everyone. And the crowd has been withdrawn causes of the incident, such as ‘domestic disturbances’, or ‘changing clothes clothed’ receive the checks from the opposition, respectively.
      These results of this paper will be able to find its own means of paper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future Garaguk, Garakgukgi will also be available as a single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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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삼국사기』 및 『일본서기』 등의 사서와 비교,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이들 기록은 가락국의 史蹟이라기보다는 가라국의 사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가락국의 영역 기사’는 수로왕의 건국신화 중에 보인다. 하지만 수로왕 건국 무렵의 사실로는 볼 수 없다. 아마 6세기 전반 백제에게 기문지역을 상실한 후의 가라국의 영역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까닭은 그 영역의 서북쪽이 ‘지리산’ 혹은 ‘지리산동’을 한계로 한다는 기록 때문이다.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는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3월 첫 번째 시월조의 가라국 기사와 비교해보면 그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좌지왕의 부인이었던 ‘용녀’와 이뇌왕의 부인 신라왕녀는 모두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국내요란’, 혹은 ‘변복’ 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각각 반대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퇴출되고 있다.
      본고의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향후 가라국사 연구에 『가락국기』도 하나의 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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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삼국사기』 및 『일...

      본고는 『가락국기』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삼국사기』 및 『일본서기』 등의 사서와 비교,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이들 기록은 가락국의 史蹟이라기보다는 가라국의 사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가락국의 영역 기사’는 수로왕의 건국신화 중에 보인다. 하지만 수로왕 건국 무렵의 사실로는 볼 수 없다. 아마 6세기 전반 백제에게 기문지역을 상실한 후의 가라국의 영역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까닭은 그 영역의 서북쪽이 ‘지리산’ 혹은 ‘지리산동’을 한계로 한다는 기록 때문이다.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는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3월 첫 번째 시월조의 가라국 기사와 비교해보면 그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좌지왕의 부인이었던 ‘용녀’와 이뇌왕의 부인 신라왕녀는 모두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국내요란’, 혹은 ‘변복’ 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각각 반대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퇴출되고 있다.
      본고의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향후 가라국사 연구에 『가락국기』도 하나의 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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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李永植, "六世紀 安羅國史硏究" 62 : 1995

      2 金泰植,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3 백승충,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4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5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Ⅱ)" 일지사 2003

      6 李泳鎬,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ㆍ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7 金泰植,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8 남재우,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9 신가영,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加耶叛’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72) : 153-190, 2013

      10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1998

      1 李永植, "六世紀 安羅國史硏究" 62 : 1995

      2 金泰植,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3 백승충,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혜안 2001

      4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5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Ⅱ)" 일지사 2003

      6 李泳鎬,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ㆍ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7 金泰植,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8 남재우,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9 신가영,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加耶叛’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72) : 153-190, 2013

      10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1998

      11 백승충, "고대 창녕지역사의 재조명" 경상남도 창녕군ㆍ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2 유우창, "고구려 남정 이후 가락국과 신라 관계의 변화" 한국고대사학회 (59) : 129-162, 2010

      13 白承忠,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 釜山大學校 大學院 1995

      14 백승충, "가야의 지역연맹론" 부경역사연구소 (17) : 5-43, 2005

      15 金泰植, "駕洛國記 所載 許王后 說話의 性格" 102 : 1998

      1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5

      1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譯註 三國遺事 Ⅱ" 以會文化社 2002

      18 李永植, "百濟의 加耶進出過程" 7 : 1995

      19 今西龍,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1937

      20 윤성호, "新羅의 大加耶 복속 과정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회 (155) : 1-33, 2011

      21 白承玉, "新羅ㆍ百濟 각축기의 比斯伐加耶" 15 : 1992

      22 백승옥, "安羅高堂會議'의 성격과 安羅國의 위상" 부경역사연구소 0 (0): 7-39, 2004

      23 田中俊明,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1992

      24 이형기, "大加耶의 形成과 發展 硏究" 경인문화사 2009

      25 金泰植,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81 : 1996

      26 武田幸男, "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1974

      27 주보돈, "古代 東亞細亞와 百濟" 서경 2003

      28 金泰植, "加耶聯盟史" 一潮閣 1993

      29 白承玉, "加耶 各國史 硏究" 혜안 2003

      30 白承忠, "加羅國과 于勒十二曲" 19 : 1995

      31 丁仲煥, "加羅史硏究" 혜안 2000

      32 白承忠, "加羅ㆍ新羅 ‘결혼동맹’의 결렬과 그 추이" 20 : 1996

      33 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56

      34 白承忠, "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 3 : 1992

      35 田中俊明, "于勒十二曲と大加耶連盟" 48 (48): 1990

      36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証" 塙書房 1979

      37 金泰植, "『譯註 加耶史史料集成』 1 高麗以前篇"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004

      38 백승옥, "『日本書紀』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51) : 133-169, 2014

      39 백승충, "‘임나 4현’의 위치 비정" 부산경남사학회 (85) : 49-93, 2012

      40 유우창, "6세기 전반 가라와 ‘나제동맹’의 대립 -낙동강과 관련하여-" 효원사학회 41 : 41-75, 2012

      41 김현숙, "6세기 대가야의 발전단계에 대한 一考" 23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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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12-02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지역과역사 -> 지역과 역사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신청제한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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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 1 0.75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1 0.74 1.55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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