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만주국의 조선인 학교 실태와 조선인의 민족적 위상 = The Education and National Phase of Koreans in Manchukuo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104730049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re is very little Korean schools in Manchukuo. Therefore, Koreans in Manchuria were hard to enter school. Because this school taught in Japanese, Korean students had difficulty in learning process. Japanese students attended public schools that have a good learning environment. But most Korean students attended vocational school or a private school that have a bad learning environment. Social reputable medical students were mostly Japanese. Among the teachers Japanese occupied a large proportion. In addition, the Japanese had monopolized the principal of school. Japanese principal of school was monitoring the teachers and students of other nations. Because education of Koreans were low, they had difficulty in finding employment.
      Manchukuo colonial authorities had always argued the ethnic equality, but they were discriminating against Koreans in Manchuria. As a result, in educational aspect of Manchukuo the national sequence was set. Finally, Manchukuo insisted ethnic equality and ethnic reconciliation, it was an ideological fiction that Manchukuo colonial authorities only had.
      번역하기

      There is very little Korean schools in Manchukuo. Therefore, Koreans in Manchuria were hard to enter school. Because this school taught in Japanese, Korean students had difficulty in learning process. Japanese students attended public schools that hav...

      There is very little Korean schools in Manchukuo. Therefore, Koreans in Manchuria were hard to enter school. Because this school taught in Japanese, Korean students had difficulty in learning process. Japanese students attended public schools that have a good learning environment. But most Korean students attended vocational school or a private school that have a bad learning environment. Social reputable medical students were mostly Japanese. Among the teachers Japanese occupied a large proportion. In addition, the Japanese had monopolized the principal of school. Japanese principal of school was monitoring the teachers and students of other nations. Because education of Koreans were low, they had difficulty in finding employment.
      Manchukuo colonial authorities had always argued the ethnic equality, but they were discriminating against Koreans in Manchuria. As a result, in educational aspect of Manchukuo the national sequence was set. Finally, Manchukuo insisted ethnic equality and ethnic reconciliation, it was an ideological fiction that Manchukuo colonial authorities only had.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만주국 시기 조선인 학교는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인은 취학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은 수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은 대부분 사회적 평판과 학교 시설이 좋은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조선인 학생 다수는 교육 시설이 열악한 직업학교나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한 의과대학 학생의 절대 다수는 일본인이었다. 교원들 중에는 일본인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일본인이 교장직을 독점한 채 다른 민족 출신의 교원들과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 부족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 학력이 낮았던 조선인들은 취직난에도 시달렸다.
      만주국 식민당국에서는 표면적으로는 ‘民族協和’, ‘內鮮一體’, ‘日滿一德一心’을 부르짖으면서 민족 평등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교육 방면에서 조선인의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개선시켜 주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오히려 민족 차별 정책을 고착화하고 있었다. 만주국의 모든 방면에서도 그러했지만, 교육 방면에서도 다양한 離散 민족들이 확연한 민족적 위상과 차별 속에 階序的으로 민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교육 방면에서의 민족 구성이나 민족 차별을 고려해본다면, 만주국의 ‘민족협화’, ‘내선일체’, ‘일만일덕일심’ 논리는 일본 식민주의자들만의 ‘植民地的 想像’ 속에 존재했던 허구적인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윤휘탁, 『滿洲國: 植民地的 想像이 孕胎한 ‘複合民族國家’』(서울: 혜안, 2013), 486쪽.
      고 할 수 있다.
      번역하기

      만주국 시기 조선인 학교는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인은 취학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은 수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

      만주국 시기 조선인 학교는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인은 취학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학생들은 수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은 대부분 사회적 평판과 학교 시설이 좋은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조선인 학생 다수는 교육 시설이 열악한 직업학교나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한 의과대학 학생의 절대 다수는 일본인이었다. 교원들 중에는 일본인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일본인이 교장직을 독점한 채 다른 민족 출신의 교원들과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 부족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 학력이 낮았던 조선인들은 취직난에도 시달렸다.
      만주국 식민당국에서는 표면적으로는 ‘民族協和’, ‘內鮮一體’, ‘日滿一德一心’을 부르짖으면서 민족 평등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교육 방면에서 조선인의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개선시켜 주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오히려 민족 차별 정책을 고착화하고 있었다. 만주국의 모든 방면에서도 그러했지만, 교육 방면에서도 다양한 離散 민족들이 확연한 민족적 위상과 차별 속에 階序的으로 민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교육 방면에서의 민족 구성이나 민족 차별을 고려해본다면, 만주국의 ‘민족협화’, ‘내선일체’, ‘일만일덕일심’ 논리는 일본 식민주의자들만의 ‘植民地的 想像’ 속에 존재했던 허구적인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윤휘탁, 『滿洲國: 植民地的 想像이 孕胎한 ‘複合民族國家’』(서울: 혜안, 2013), 486쪽.
      고 할 수 있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흑룡강 조선족 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3

      2 이경숙, "총력전과 만주국 조선인 중등학교 체험" 한국교육사학회 33 (33): 105-132, 2011

      3 허청선,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2冊" 연변교육출판사 2003

      4 정영홍,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와 조선족교육의 미래: 연변민족자치주를 중심으로" 5 : 1996

      5 중국조선족청년학회, "중국 조선족 이민실록" 延邊人民出版社 1992

      6 조선족략사편찬조, "조선족약사" 백산서당 1989

      7 김광세, "조선족교육사료집 제2집" 연변민족교육연구소 1987

      8 이시용, "일제침략기 간도 한국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23 : 2004

      9 정미량, "일제 강점기 재만 조선인의 교육과 그 체험 :장춘(신경)보통학교(1922-1945)의 사례를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회 29 (29): 187-210, 2007

      10 홍종필, "만주사변 이전 재만조선인의 교육에 대하여" 6 (6): 1994

      1 "흑룡강 조선족 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3

      2 이경숙, "총력전과 만주국 조선인 중등학교 체험" 한국교육사학회 33 (33): 105-132, 2011

      3 허청선,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2冊" 연변교육출판사 2003

      4 정영홍,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와 조선족교육의 미래: 연변민족자치주를 중심으로" 5 : 1996

      5 중국조선족청년학회, "중국 조선족 이민실록" 延邊人民出版社 1992

      6 조선족략사편찬조, "조선족약사" 백산서당 1989

      7 김광세, "조선족교육사료집 제2집" 연변민족교육연구소 1987

      8 이시용, "일제침략기 간도 한국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 23 : 2004

      9 정미량, "일제 강점기 재만 조선인의 교육과 그 체험 :장춘(신경)보통학교(1922-1945)의 사례를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회 29 (29): 187-210, 2007

      10 홍종필, "만주사변 이전 재만조선인의 교육에 대하여" 6 (6): 1994

      11 김해영, "만주사변 이전 북간도 학생들의 교육운동"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2 (22): 77-95, 2008

      12 姜樹卿, "黑龍江敎育史" 黑龍江人民出版社 2002

      13 "鮮系敎育, 農務契等 諸問題 眞摯討議---閉幕된 蛟河縣聯의 第三日"

      14 間島省公署, "間島省文敎要覽(謄寫本)"

      15 牛丸潤亮, "間島省事情" 1936

      16 "躍進大安東에 對處하는 在住鮮系의 體制"

      17 楊家余, "試析僞滿學校敎育制度及其特點" 26 (26): 2008

      18 "要請되는 新體制(下)"

      19 윤휘탁, "萬寶山사건 전후 동북아의 민족관계와 민족모순 - 중국인의 사건 인식을 중심으로 -" 역사학회 (210) : 259-293, 2011

      20 "緊張된 安東市聯---鮮系學生就學問題討議"

      21 滿洲帝國民生部, "第四次民生年鑑(康德七年版)" 1943

      22 國務院統計處, "第二次滿洲帝國年報" 1935

      23 滿洲國文敎部, "第一次滿洲帝國文敎年鑑" 遼寧省檔案館 文敎 210 1934

      24 滿洲國國務院總務廳情報處, "省政彙覽 第6輯(間島省篇)"

      25 "琿春學界의 赤信號 優級校 不足으로"

      26 "牡丹江省朝鮮人動態"

      27 瀋陽市民委民族志編纂辦公室, "瀋陽朝鮮族志" 遼寧民族出版社 1989

      28 滿洲勞工協會, "滿洲勞働年鑑(康德七年版)" 嚴松堂書店 1941

      29 山島田道彌, "滿洲敎育史" 文敎社 1935

      30 "滿洲國의 敎育制度(一)"

      31 倉島至, "滿洲國に於ける朝鮮人敎育に就きて" (317) : 1941

      32 副島昭一, "滿洲國’統治と治外法權撤廢"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93

      33 윤휘탁, "滿洲國 : 植民地的 想像이 孕胎한 ‘複合民族國家’" 혜안 2013

      34 朴州信, "滿州事變以前 日帝의 間島 韓國人에 대한 植民地主義 敎育扶植 政策" 20 : 1998

      35 滿洲帝國民生部, "民生年鑑(康德六年版)" 1939

      36 宋漢鏞, "東北軍閥 支配下의 滿洲­교육상황을 중심으로" 19 : 2003

      37 武强, "東北潤陷十四年敎育史料 第一輯" 吉林敎育出版社 1989

      38 楊昭全, "東北地區朝鮮人革命鬪爭資料滙編" 遼寧民族出版社 1992

      39 "朝鮮靑年에 修學의 登龍門---熱火가튼 向學熱에 對應"

      40 "朝鮮人兒童에 限하야 檢定試驗을 實施---哈市鮮系의 中校入試難色"

      41 "日系中等學校에 鮮系도 就學시켜라"

      42 千敬化, "日帝下 敎育思想 : 石洲 李相龍의 在滿韓國人 民放敎育意識을 중심으로" 7 : 1987

      43 "數字로 본 滿洲國 鮮系國民의 現勢」의 ‘朝鮮人 學齡兒童 就學率表’"

      44 水口春喜, "建國大學的幻影" 昆侖出版社 2004

      45 間島省公署, "延邊文史資料 第6輯" 間島例規集 1988

      46 奉天市公署, "奉天統計月報"

      47 奉天市長官房文書科, "奉天市統計年報"

      48 "奉天市 英美系學校 移管 혹은 廢校 決定"

      49 滿洲國文敎部, "在滿朝鮮人敎育宗敎一覽表(謄寫本)"

      50 滿洲帝國協和會, "國內に於ける鮮系國民實態" 同調査部 1943

      51 "各機關에 鮮系職員配置와 敎育機構 擴充을 討議"

      52 "初等校入學難"

      53 "全滿各地鮮系生活現地報告(三)"

      54 "入試關門에 또 難題"

      55 許公勤, "入學難과 私學의 不振"

      56 劉峰, "僞滿時期體育敎育特點探析" 2013

      57 趙群, "僞滿時期日本帝國主義在東北地區的奴化敎育及危害" (6) : 2002

      58 朴今海, "僞滿時期日帝對朝鮮族的植民主義敎育實質" (6) : 2008

      59 朴今海, "僞滿時期日僞植民主義敎育與朝鮮族人民的反奴化鬪爭" (3) : 2010

      60 李慧娟, "僞滿時期吉林地區高等敎育評析" (2) : 2005

      61 李朝, "僞滿時期“東三省”實施的“奴化”敎育" (3) : 1995

      62 윤휘탁, "侵略과 抵抗의 사이에서:日·中 갈등의 틈바귀에 낀 在滿朝鮮人" 고려사학회 (19) : 299-326, 2005

      63 "人的資源 不足한 此時 朝鮮人을 活用하라"

      64 "二十萬圓基金으로 安東에 高女校設立"

      65 "中等入試志願者 勿驚! 7930名 그 중 수용되지 못하는 자 2700名"

      66 진리, "“九ㆍ一八”事变前东北朝鲜人汉语教育状况分析" 한국중국어교육학회 (14) : 1-13, 2011

      67 尹輝鐸, "‘滿洲國’의 ‘2等國(公)民’, 그 實像과 虛像" 169 : 2001

      68 정안기, "1930년대 在滿朝鮮人의 敎育政治史 연구" 만주학회 (17) : 121-157, 2014

      69 이명화, "1920년대 만주지방에서의 민족교육운동" 2 : 1988

      70 박금해, "1900년대 초∼1920년대 日帝의 在滿朝鮮人교육정책 연구" 한국사학회 (99) : 223-260, 2010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1 0.81 0.7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5 0.66 1.616 0.06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