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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인조대 초반 御營使・摠戎使의 설치와 親明排金 정책의 기류 변화 = The Establishment of Ŏyŏngsa and Ch'ongyungsa and the Shift of the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during Injo’s Early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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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article mainly focuses on the shift of the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right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The Chosŏn government under King Injo maintained its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親明排金 ; pro-Ming and anti-Jin). However, it was not a consistent policy, as there was a remaining influence of the conciliatory negotiation with the Later Jin from his predecessor, Kwanghaegun. Hence, even though the pro-Ming and anti-Jin policy after the Coup of 1623 was accepted as a platform for Injo’s government, the actual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was fluid, considering the tacit, realistic function of the negotiation with the Later Jin.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reality shaded under the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especiall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Ŏyŏngsa and Ch’ongyungsa in the early reign of King Injo. While Ŏyŏngsa shows the early stage of the new Chosŏn government’s platform right after the coup, in which the king himself would not hesitate to lead a campaign against the Later Jin, Ch’ongyungsa symbolizes the shift of the strategy, where the government would concentrate on the defense of the capital after the uprising of Yi Kwal in 1624. It is appeared in this delicate change of the atmosphere in the foreign policy that the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was constantly recognized as a political slogan, but its form was not maintained consistently because of the realistic and political consi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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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rticle mainly focuses on the shift of the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right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The Chosŏn government under King Injo maintained its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親明排金 ; pro-Ming and anti-Jin). How...

    This article mainly focuses on the shift of the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right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The Chosŏn government under King Injo maintained its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親明排金 ; pro-Ming and anti-Jin). However, it was not a consistent policy, as there was a remaining influence of the conciliatory negotiation with the Later Jin from his predecessor, Kwanghaegun. Hence, even though the pro-Ming and anti-Jin policy after the Coup of 1623 was accepted as a platform for Injo’s government, the actual strategy toward the Later Jin was fluid, considering the tacit, realistic function of the negotiation with the Later Jin.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reality shaded under the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especially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Ŏyŏngsa and Ch’ongyungsa in the early reign of King Injo. While Ŏyŏngsa shows the early stage of the new Chosŏn government’s platform right after the coup, in which the king himself would not hesitate to lead a campaign against the Later Jin, Ch’ongyungsa symbolizes the shift of the strategy, where the government would concentrate on the defense of the capital after the uprising of Yi Kwal in 1624. It is appeared in this delicate change of the atmosphere in the foreign policy that the doctrine of ch'inmyŏng paegŭm was constantly recognized as a political slogan, but its form was not maintained consistently because of the realistic and political consi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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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조선의 대후금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인조정권은 줄곧 ‘親明排金’을 기조로 유지했다. 그러나 친명배금이 고정적인 정책기조였던 것은 아니었고, 광해군대에 시행된 타협적 對後金 교섭의 관성도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의 친명배금정책은 정론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으며 암묵적으로는 후금과의 교섭이 가진 현실적 순기능도 인정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조대 초반에 설치된 御營使와 摠戎使를 중심으로 친명배금의 정치적 기치 이면에 존재했던 현실적 면모를 검토하고자 했다. 어영사는 親征을 통해서 후금과의 일전을 불사하고자 했던 반정 초기의 정책 기조를 보여준다면, 총융사는 이괄의 난 이후 도성 방어에 주력하게 된 정책상의 변화를 상징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미묘한 기류 변화는 친명배금이 정치적 슬로건으로서는 인정되면서도 현실적 고려와 정치적 계산으로 인해 일관된 형태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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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조선의 대후금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인조정권은 줄곧 ‘親明排金’을 기조로 유지했다. 그러나 친명배금이 고정적인 정책기조였던 것은 아니었...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조선의 대후금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인조정권은 줄곧 ‘親明排金’을 기조로 유지했다. 그러나 친명배금이 고정적인 정책기조였던 것은 아니었고, 광해군대에 시행된 타협적 對後金 교섭의 관성도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의 친명배금정책은 정론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면서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으며 암묵적으로는 후금과의 교섭이 가진 현실적 순기능도 인정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조대 초반에 설치된 御營使와 摠戎使를 중심으로 친명배금의 정치적 기치 이면에 존재했던 현실적 면모를 검토하고자 했다. 어영사는 親征을 통해서 후금과의 일전을 불사하고자 했던 반정 초기의 정책 기조를 보여준다면, 총융사는 이괄의 난 이후 도성 방어에 주력하게 된 정책상의 변화를 상징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미묘한 기류 변화는 친명배금이 정치적 슬로건으로서는 인정되면서도 현실적 고려와 정치적 계산으로 인해 일관된 형태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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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狀啓謄錄"

    2 한명기, "李适의 亂이 仁祖代 초반 대내외 정책에 미친 여파" 전북사학회 (48) : 93-136, 2016

    3 고동환, "한양의 삼군영: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서울] 2012

    5 이근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8

    6 노영구, "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

    7 노영구, "조선후기 전술변화와 중앙 군영의 편제 추이" 육군군사연구소 (144) : 27-55, 2017

    8 노영구, "조선후기 도성방어체계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2018

    9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10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1 "狀啓謄錄"

    2 한명기, "李适의 亂이 仁祖代 초반 대내외 정책에 미친 여파" 전북사학회 (48) : 93-136, 2016

    3 고동환, "한양의 삼군영: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서울] 2012

    5 이근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1998

    6 노영구, "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

    7 노영구, "조선후기 전술변화와 중앙 군영의 편제 추이" 육군군사연구소 (144) : 27-55, 2017

    8 노영구, "조선후기 도성방어체계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2018

    9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10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11 박기훈, "인조대 초반 ‘振武功臣’ 녹훈 과정과 군사 활동" 조선시대사학회 (98) : 175-215, 2021

    12 이상훈, "인조대 이괄의 난과 안현 전투" 화랑대연구소 69 (69): 59-82, 2013

    13 허태구,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소명출판 2019

    14 장정수,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對後金(淸) 방어전략의 수립 과정과 그 실상" 조선시대사학회 (81) : 49-108, 2017

    15 王珂, "명청교체기 대명 해로사행로의 노선과 지명 재구 및 인문지리학적 고찰. 1. 산동 등주부" 역락 2020

    16 김용완, "남송 고종대의 군사조직에 관한 연구" 5 : 1990

    17 신병주, "고성이씨 가문의인물과 활동" 일지사 2010

    18 계승범,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 경남문화연구원 (26) : 439-478, 2008

    19 "默齋日記"

    20 "謄錄類抄"

    21 "訒齋集"

    22 "西厓集"

    23 "滿文老檔"

    24 "東川集"

    25 車文燮, "朝鮮時代 軍事關係硏究"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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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최효식, "朝鮮後期 軍制史 硏究" 신서원 2007

    28 한명기, "朝中關係의 관점에서 본 仁祖反正의 역사적 의미" 16 : 2011

    29 "明喜宗實錄"

    30 "敬亭集先生續集"

    31 "承政院日記"

    32 "愚伏集"

    33 "御營廳都謄錄"

    34 "宋史"

    35 小岩井弘光, "宋代兵制史の硏究" 汲古書院 1998

    36 "啓錄"

    37 黃一農, "吳橋兵變: 明淸鼎革的一條重要導火線" 42 (42): 2012

    38 "光海君日記"

    39 "備邊司謄錄"

    40 "仁祖實錄"

    41 崔孝軾, "仁祖代의 國防 施策" 19・20 : 1986

    42 김한신, "仁祖代 前半期 왕권과 정치질서 재편 (1623~1636)" 고려사학회 (78) : 109-151, 2020

    43 백기인, "中國軍事制度史" 국방군사연구소 1998

    44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論』 9" 國史編纂委員會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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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장정수, "16세기 말~17세기 초 朝鮮과 建州女眞의 배후 교섭과 申忠一의 역할"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5) : 133-18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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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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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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