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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熊津都督府의 對倭交涉과 乾封(666) 封禪 = In 665, Peace Treaty between China and Japan opened the way for a civil war, Jin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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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August 663, Japan suffered a catastrophic defeat in the Baekchon River(白村江). Half a year later, in April 664, Tang China sent an envoy to the Yamato Japan. It was to invite the Japanese envoy to participate in the 666 Feng & shan(封禪) Sacrifices in China Santung. The presence of Japan, which is located in the easternmost part of the world, was significant.
      There was a bargaining chip for China. Jiyoue(貞慧) was held hostage in China. He was the son of a powerful man Kamatari(中臣鎌足) in Japan. The Chinese envoy asked for the Japanese envoy to send at Feng & shan(封禪) Sacrifices in China. Then China would release Jiyoue. In October 665, a Japanese envoy arrived in China, and at the same time Jioue was released and arrived in Japan.
      That year, the another Chinese envoy visited Japan, restoring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new peac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has given people relief. But the situation changed rapidly after a war broke out between China and Silla(羅唐戰爭) on the Korean Peninsula. China has consistently asked Japan for military assistance. People worried that Prince Ootomo(大友皇子), who led the peace negotiations with China, could again intervene in the war on the Korean Peninsula. The Japanese aristocrats(豪族), who did not want to return to Baekchon River, was shaken, and when Prince Oama(大海人皇子) revolted, they joined. As a result, in 665 the peace treaty between China and Japan paved the way for 672 years of Revolution(壬申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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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August 663, Japan suffered a catastrophic defeat in the Baekchon River(白村江). Half a year later, in April 664, Tang China sent an envoy to the Yamato Japan. It was to invite the Japanese envoy to participate in the 666 Feng & shan(封禪) Sacr...

      In August 663, Japan suffered a catastrophic defeat in the Baekchon River(白村江). Half a year later, in April 664, Tang China sent an envoy to the Yamato Japan. It was to invite the Japanese envoy to participate in the 666 Feng & shan(封禪) Sacrifices in China Santung. The presence of Japan, which is located in the easternmost part of the world, was significant.
      There was a bargaining chip for China. Jiyoue(貞慧) was held hostage in China. He was the son of a powerful man Kamatari(中臣鎌足) in Japan. The Chinese envoy asked for the Japanese envoy to send at Feng & shan(封禪) Sacrifices in China. Then China would release Jiyoue. In October 665, a Japanese envoy arrived in China, and at the same time Jioue was released and arrived in Japan.
      That year, the another Chinese envoy visited Japan, restoring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new peace relationship between China and Japan has given people relief. But the situation changed rapidly after a war broke out between China and Silla(羅唐戰爭) on the Korean Peninsula. China has consistently asked Japan for military assistance. People worried that Prince Ootomo(大友皇子), who led the peace negotiations with China, could again intervene in the war on the Korean Peninsula. The Japanese aristocrats(豪族), who did not want to return to Baekchon River, was shaken, and when Prince Oama(大海人皇子) revolted, they joined. As a result, in 665 the peace treaty between China and Japan paved the way for 672 years of Revolution(壬申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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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663년 8월 倭國은 百村江에서 羅唐聯合軍과 싸워 재앙적인 패배를 당했다. 1년 후인 664년 4월 熊津都督府의 劉仁軌가 倭國에 郭務悰을 파견하여 乾封(666)封禪에 왜국사절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실무협상을 시도했다. 封禪儀禮에서 세상의 가장 東쪽 倭國 사절의 참석여부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전쟁을 했던 倭國의 참여는 어려운 문제였다.
      劉仁軌에게 협상카드가 있었다. 唐에 체류하고 있던 中臣鎌足의 장남 貞慧가 그것이었다.劉仁軌는 中臣鎌足에게 서신을 통해 貞慧를 귀국 시킬 터이니 泰山封禪에 왜국사절을 참석시켜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中臣鎌足이 답을 했다.
      劉仁軌는 貞慧의 歸國을 唐高宗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냈고, 665년 貞慧는 당고종의 사절 劉德高와 함께 唐을 떠나 경유지인 백제의 熊津都督府에 내렸다. 唐高宗이 원하던 倭國의 封禪使節도 그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절은 倭國과 唐으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9월 貞慧는 奈良에 당도했고, 10월 倭國의 封禪使節이 洛陽에 도착 했다.
      11월 劉德高 방문으로 唐․倭 양국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再修交를 하는 자리가 왜국 왕경에서 있었다. 劉德高는 양국 사이의 밝은 미래를 언급했을 것이다. 唐과의 평화적 수교는 당시 왜국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안도감을 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670년 羅唐戰爭이 일어나고 나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熊津都督府의 사절이 연이어 왜국에 도착하면서 再修交를 주도한 大友皇子가 한반도 전쟁에 재개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우려했다. 다시는 白村江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近畿豪族들이 동요했고, 天智의 동생 大海人皇子가 궐기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壬申亂을 일으킨다. 결과적으로 665년 唐倭 再修交가 672년의 壬申亂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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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3년 8월 倭國은 百村江에서 羅唐聯合軍과 싸워 재앙적인 패배를 당했다. 1년 후인 664년 4월 熊津都督府의 劉仁軌가 倭國에 郭務悰을 파견하여 乾封(666)封禪에 왜국사절의 참여를 이끌어내...

      663년 8월 倭國은 百村江에서 羅唐聯合軍과 싸워 재앙적인 패배를 당했다. 1년 후인 664년 4월 熊津都督府의 劉仁軌가 倭國에 郭務悰을 파견하여 乾封(666)封禪에 왜국사절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실무협상을 시도했다. 封禪儀禮에서 세상의 가장 東쪽 倭國 사절의 참석여부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전쟁을 했던 倭國의 참여는 어려운 문제였다.
      劉仁軌에게 협상카드가 있었다. 唐에 체류하고 있던 中臣鎌足의 장남 貞慧가 그것이었다.劉仁軌는 中臣鎌足에게 서신을 통해 貞慧를 귀국 시킬 터이니 泰山封禪에 왜국사절을 참석시켜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中臣鎌足이 답을 했다.
      劉仁軌는 貞慧의 歸國을 唐高宗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냈고, 665년 貞慧는 당고종의 사절 劉德高와 함께 唐을 떠나 경유지인 백제의 熊津都督府에 내렸다. 唐高宗이 원하던 倭國의 封禪使節도 그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절은 倭國과 唐으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9월 貞慧는 奈良에 당도했고, 10월 倭國의 封禪使節이 洛陽에 도착 했다.
      11월 劉德高 방문으로 唐․倭 양국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再修交를 하는 자리가 왜국 왕경에서 있었다. 劉德高는 양국 사이의 밝은 미래를 언급했을 것이다. 唐과의 평화적 수교는 당시 왜국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안도감을 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670년 羅唐戰爭이 일어나고 나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熊津都督府의 사절이 연이어 왜국에 도착하면서 再修交를 주도한 大友皇子가 한반도 전쟁에 재개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우려했다. 다시는 白村江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近畿豪族들이 동요했고, 天智의 동생 大海人皇子가 궐기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壬申亂을 일으킨다. 결과적으로 665년 唐倭 再修交가 672년의 壬申亂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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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기사연구, Ⅲ" 일지사 2004

      2 연민수, "역주일본서기, 3" 동북아역사재단 2013

      3 김은숙, "백제부흥운동 이후 天智朝의 국제관계" 15 : 1995

      4 "魏鄭公諫錄"

      5 김태식, "韓國 古代文化 硏究" 경기대박물관 2005

      6 "釋氏稽古略"

      7 "資治通鑑"

      8 藏中そのぶ, "貞慧傳はなぜ立傳されたか" 日本文学協会 49 : 2000

      9 "藤氏家傳"

      10 "舊唐書"

      1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기사연구, Ⅲ" 일지사 2004

      2 연민수, "역주일본서기, 3" 동북아역사재단 2013

      3 김은숙, "백제부흥운동 이후 天智朝의 국제관계" 15 : 1995

      4 "魏鄭公諫錄"

      5 김태식, "韓國 古代文化 硏究" 경기대박물관 2005

      6 "釋氏稽古略"

      7 "資治通鑑"

      8 藏中そのぶ, "貞慧傳はなぜ立傳されたか" 日本文学協会 49 : 2000

      9 "藤氏家傳"

      10 "舊唐書"

      11 鈴木靖民, "續日本古代史論集, 上卷" 吉川弘文館 1972

      12 直木孝次郞, "百濟滅亡後の國際關係" 天理大 147 : 1993

      13 池內宏, "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 上世編 吉川弘文館 1960

      14 "日本書紀"

      15 坂本太郎, "日本古代氏族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990

      16 佐伯有清, "日本古代氏族事典" 雄山閣 2015

      17 "懷風藻"

      18 고용한, "懷風藻" 지만지 2010

      19 "善隣国宝記"

      20 임대희, "唐高宗 統治後期의 政治와 人物" 한국중국학회 47 : 523-546, 2003

      21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역사문화연구소 (57) : 328-354, 2014

      22 정병준, "唐代 異民族 管理方式의 다양성 및 그 변용― 羈縻府州 제도를 중심으로 ―" 동양사학회 (143) : 1-48, 2018

      23 김상범, "唐 前期 封禪儀禮의 展開와 그 意義" 17 : 2002

      24 山尾幸久, "古代の日朝關係" 塙書房 1989

      25 鄭孝雲, "古代 韓日政治交涉史 硏究" 학연문화사 1995

      26 "冊府元龜"

      27 "冊府元龜"

      28 서영교, "倭의 百濟 援助와 蘇定方의 平壤城 撤軍" 대구사학회 117 : 1-27, 2014

      29 서영교, "乾封元年(666) 封禪문제와 唐의 對고구려 정책" 대구사학회 120 : 71-100, 2015

      30 川岸宏敎, "中央豪族の佛敎受容とその史的意義" 雄山閣 1 : 1989

      31 "三國史記"

      32 박재용, "『藤氏家傳』의 고대한국 관계 기사 검토" 백제연구소 (68) : 63-91, 2018

      33 Howard j. Wechsler, "Offering of Jade and Silk: Ritual and Symbol in the Legitimation of the T'ang Dynasty" Yale Univ Press 1985

      34 송완범, "7세기 왜국의 外征과 內戰의 ‘戰後처리’와 일본의 탄생" 한국일본사상사학회 (33) : 111-135, 2017

      35 延敏洙, "7世紀 東아시아 정세와 倭國의 對韓政策" 신라문화연구소 (24) : 39-66, 2004

      36 Denis Twitchett, "'Kao-tsung and Empress Wu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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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29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東아시아古代學 -> 동아시아고대학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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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33 0.33 0.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 0.29 0.686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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