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와 같은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유적과 토기ㆍ석기 등의 유물이 제주시의 용담ㆍ오라 ㆍ삼양ㆍ외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 인구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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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Abstract)
지석묘와 같은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유적과 토기ㆍ석기 등의 유물이 제주시의 용담ㆍ오라 ㆍ삼양ㆍ외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 인구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득...
지석묘와 같은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유적과 토기ㆍ석기 등의 유물이 제주시의 용담ㆍ오라 ㆍ삼양ㆍ외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도에 인구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옛날 선사시대부터 임을 알수 있다.
선사시대 부터 고려말까지는 외적의 침입이 없이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된 고도로서 주민의 대부분이 패류 ㆍ해조를 채취하기 쉬운 해안지방에 거주하였으나 고려말에 원이 침입하고 또 려말에서 이조초초에 거쳐 왜구의 약탈이 심하여 사회가 불안해지기 시작하자 주민의 대부분이 거주지를 해안에서 중산간지대로 옮기어 인구가 내륙의 중산간지대에 집중하였다.
또 이중환의 택성지의 『譫曰, 溪居不如江居, 比以通貨財取漁硼而論耳, 其實則, 海上多風, 人面易黑, 又多脚氣水腫瘇虐之疾, 水泉乏土地, 且灣濁水潮至淸絶韻絶』에서와 같은 해안지방이 거주지로써 결코 좋은곳이 못된다는 그 당시의 사회관이 작용한 것도 같다.
이리하여 내륙의 중산간지대는 경작과 목축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이상적인 거주지가 되어 산계의 봉천수와 용천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 하였다. 그러던 것이 1910년 한일합병후 제주 ㆍ목포간 정기선로가 개설되어 육지와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해안 환상도로가 해안을 따라 개통되고 제주 ㆍ서귀포 간의 남북 횡단도로가 개통되면서 해안지대가 급격히 발전되어 새로운 인구를 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