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승관의 구성과 역할은 그 변화 양상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시기는 무신집권기로부터 충선왕 즉위 이전까지이다. 무신정변과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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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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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승관의 구성과 역할은 그 변화 양상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시기는 무신집권기로부터 충선왕 즉위 이전까지이다. 무신정변과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
고려후기 승관의 구성과 역할은 그 변화 양상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시기는 무신집권기로부터 충선왕 즉위 이전까지이다. 무신정변과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변화가 불교계 내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불교계를 운영하는 방식은 고려전기의 유제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승관의 구성과 역할을 고려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시기는 충선왕 즉위부터 공민왕 이전까지로, 이 시기 불교는 임제종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 수용되거나 원 불교인 라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寫經 및 원 황실을 축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佛事가 성행하였고, 왕위계승의 불안정으로 인해 각 왕대마다 정치적으로 불교세력을 그 기반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불교 및 승려들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반면 몽골과의 전쟁으로 사원 숫자의 감소로 인해 주지직을 둘러싼 갈등이 많아지면서 승정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그 중에서도 僧階가 綾羅에 좌우된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주지직 마저도 뇌물로써 얻는다는 비판이 대두하면서 公議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다. 그 결과 승정은 특정 종파와 승려가 전담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양가도승통 또는 양가도총섭과 같은 승관이 대두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공민왕 즉위부터 고려왕조 멸망까지이다. 이시기에는 신진사대부들이 불교의 폐단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억불운동이 전개되는 등 불교가 국교로서의 위치가 위협받았다. 한편 불교계 일각에서도 자각운동이 펼쳐지면서, 일부 승려들은 정치세력과 제휴하여 불교 개혁을 주도하였다. 승록사제조가 되어 불교계를 개혁하려고 했던 신돈의 사례에서 보듯이, 승려를 승관에 임명한다는 원칙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양가도승통 또는 양가도총섭과 더불어 오교도총섭, 선교도총섭, 판천태종사, 판조계종사 등과 같은 다양한 승관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후기 승관의 구성과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국가 못지않게 불교의 관점에서 접근․분석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가 국가 주도하에 놓여 있었고, 고려 불교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국가내지 국왕과 불교의 사이를 통제하고 통제받는 일방통행의 관계로만 인식하는 것을 곤란하다. 고려 국왕은 형식적이나마 왕사와 국사의 도움을 받아 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국가를 다스렸고, 공의를 통해 승직을 임명하는 등 고려 국가는 불교계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불교계를 통괄하였다. 비록 승관에 임명되어 국가의 방침에 입각하여 승정을 처리한다고 해도, 승려였던만큼 승정을 처리함에 불교계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 고려후기가 유불교체기였지만 불교계의 주도적인 움직임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진사대부이 불교를 비판하고 척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일부 승려들은 중국 불교의 선진 사상을 수용하여 고려 불교 사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일부 승려들은 직접 불교계 개혁에 동참하는 등 비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고려후기 불교계의 문제점을 개혁하고 나아가 흥법의 기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움직임은 승관 임명에도 반영되어,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거나 개혁을 주장한 승려들이 승관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