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불교계를 주도한 淸虛系의 주류 문파는 鞭羊派였다. 편양파의 주요 활동무대는 17세기까지 한반도의 북부 지역에 치우쳐 있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남방(三南)에도 기반을 마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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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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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불교계를 주도한 淸虛系의 주류 문파는 鞭羊派였다. 편양파의 주요 활동무대는 17세기까지 한반도의 북부 지역에 치우쳐 있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남방(三南)에도 기반을 마련하...
조선후기 불교계를 주도한 淸虛系의 주류 문파는 鞭羊派였다. 편양파의 주요 활동무대는 17세기까지 한반도의 북부 지역에 치우쳐 있었지만 18세기 이후에는 남방(三南)에도 기반을 마련하여 전국적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여 海南의 大芚寺(大興寺)는 편양파의 새로운 근거지로 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19세기 전반 『大芚寺志』에서 강조되는 ‘宗院’의 성립과정과 그 의미를 검토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편양파는 대둔사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와 함께 淸虛 休靜(1520-1604), 즉 西山大師의 衣鉢이 대둔사에 전래되는 것을 매개로 하여 ‘西山遺意’가 생성되었다. 18세기 후반 海南 表忠祠의 건립은 휴정과 대둔사의 ‘緣故’가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서산유의의 ‘역사화’ 과정은 1820년대에 편찬된 『대둔사지』의 宗院 표명으로 완성된다. 이와 함께 정립된 대둔사 12代 宗師 인식은 종원의 실제와 그 위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12종사와 12代 講師는 편양파와 逍遙派로 구성되어 있어 종원은 청허계의 본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12강사 중에 浮休系를 1명 포함시켜 불교계 전체를 대표하는 종찰로서의 자부심도 표출되고 있다. 대둔사 12종사와 12강사는 모두 華嚴 講會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조선후기 불교는 법맥상 臨濟宗의 傳法 계승을 중시하는 禪宗이었음에도 이처럼 敎學 전승에 초점을 맞추어 종사 체계를 구성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후반 이후 교학, 특히 華嚴學이 성행하였는데 강회를 매개로 한 종사 체계와 종원의 성립은 시대적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청허계 주류 문파가 주도한 대둔사의 종원 표명은 臨濟宗脈의 정통성과 華嚴宗風의 시대성, 양자를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큰 불교사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