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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중세(中世) 조운로(漕運路)와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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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차 년도에는 고려초 자기제작과 조운제(漕運制) 실시에 따른 요장(窯場)의 이동에 대해 살펴본다. 시기적으로는 10세기부터 11세기에 해당한다. 개경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자기요장이 운영되고 있던 10세기 현황과 이후 조운제도가 완비되면서 변화하는 세부 과정에 초점을 둔다. 조운로는 고려에서 많은 양의 물자를 한꺼번에 수송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루트였을 것이고 청자는 다른 품목에 비해 중량이 무겁고 깨지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해상의 조운로를 따라 운송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倉의 위치는 도자를 제작했던 지역들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고, 고려초 개경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청자․백자요장이 차차 서남해안 일대로 확산되어 나가는 현상도 고려시대 조세제도와 국가적 통제,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청자의 제작과 운송이라는 현안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본다. 고려가 지방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조세제도와 조운의 시행과정을 검토해 본다면 보다 선명하게 밝힐 수 있을것이라고 보고, 그동안 도자사 연구에서 가장 쟁점이 되어 온 개경일대 벽돌식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던 요장과 서남해안에서 발달하는 도기식 흙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던 요장의 시대적, 기술적 상관관계를 밝혀, 초기청자의 제작성격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2차 년도에는 12~13세기를 중심으로 해상 조운로 활성화로 인한 조창(漕倉)과 생산지[가마터]의 분포 관계를 살핀다. 도자기, 옹기 같은 수공품과 직물류 등이 었다. 공물은 그 제작과 조달이 수공업품 생산 ‘所’와 일반 군현들에서 맡았다. 所나 군현에서 완제품이 만들어져 貢上되는 경우와 원자재가 납품되어 개경 등지에서 완제품으로 가공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청자를 비롯한 자기류는 前者에 해당한다. 따라서 미곡의 공상을 위한 조운로는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운반과 유통에 중요한 경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조사된 고려시대 자기 운반선의 침몰지역을 보면, 대개 고려의 조운로상에 있다. 일정한 국가 공납 체계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당시 수공업 생산현황으로 보아, 所로 편제되어 있었던 강진이나, 所로 편제되지 않고 일반군현으로서 수공업 생산을 감당했던 부안이나 제작의 환경과 유통의 목적, 소비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3차 년도에는 조운로의 내륙이동에 따른 가마터의 확산과 청자와 분청사기의 제작현황을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14~15세기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기존의 도자사 연구에서는 고려말 왜구의 해안지역 가마터 침탈로 장인들이 흩어지면서 가마들이 소규모화되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이같은 견해에 동의한다. 또 그러나 장인이 흩어지면서도 소규모나마 전국적으로 요업을 유지하게 되는 이유로 所 수공업의 해체를 원인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자기 공납과 이에 따른 조운제도의 변화과정일 것이다. 소위 “분청사기”라고 부르는 일정한 형식과 기형을 가지는 도자기는 내륙의 조운로를 통해 여전히 한양과 각지의 주료 소비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을 현존하는 기록과 가마터 현지 조사 결과를 대조함으로써 지도로 지도로 작성하여 구체적인 현황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청자의 가마터 분포에 비해 전국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 숫자도 청자 가마보다 많다. 이러한 도자기 생산지역의 확산, 생산량의 증대는 도자기 수공업의 발전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운로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 배로 운송하던 것에서 소를 이용하여 내륙으로 운송하므로 유실되거나 훼손도 심했다. 이같은 정황의 변화는 도자기에 제작지 명칭이나 도공이름, 관청이름 등을 써넣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분청사기의 제작 현황은 1424년부터 1432년 사이의 실정을 전하는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陶器所 185곳,․瓷器所의 139곳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말 이래 전국적으로 생산이 확대되고 있던 도자기업의 실정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가마터를 조사해보면, 고려시대 청자로부터 조선의 분청사기로 요업이 점진적으로 연계되는 가마외에 새로운 수급방식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가마들이 내륙이 보다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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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년도에는 고려초 자기제작과 조운제(漕運制) 실시에 따른 요장(窯場)의 이동에 대해 살펴본다. 시기적으로는 10세기부터 11세기에 해당한다. 개경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자기요장이 운영되...

      1차 년도에는 고려초 자기제작과 조운제(漕運制) 실시에 따른 요장(窯場)의 이동에 대해 살펴본다. 시기적으로는 10세기부터 11세기에 해당한다. 개경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자기요장이 운영되고 있던 10세기 현황과 이후 조운제도가 완비되면서 변화하는 세부 과정에 초점을 둔다. 조운로는 고려에서 많은 양의 물자를 한꺼번에 수송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루트였을 것이고 청자는 다른 품목에 비해 중량이 무겁고 깨지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해상의 조운로를 따라 운송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倉의 위치는 도자를 제작했던 지역들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고, 고려초 개경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청자․백자요장이 차차 서남해안 일대로 확산되어 나가는 현상도 고려시대 조세제도와 국가적 통제,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청자의 제작과 운송이라는 현안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본다. 고려가 지방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완성되는 조세제도와 조운의 시행과정을 검토해 본다면 보다 선명하게 밝힐 수 있을것이라고 보고, 그동안 도자사 연구에서 가장 쟁점이 되어 온 개경일대 벽돌식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던 요장과 서남해안에서 발달하는 도기식 흙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던 요장의 시대적, 기술적 상관관계를 밝혀, 초기청자의 제작성격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2차 년도에는 12~13세기를 중심으로 해상 조운로 활성화로 인한 조창(漕倉)과 생산지[가마터]의 분포 관계를 살핀다. 도자기, 옹기 같은 수공품과 직물류 등이 었다. 공물은 그 제작과 조달이 수공업품 생산 ‘所’와 일반 군현들에서 맡았다. 所나 군현에서 완제품이 만들어져 貢上되는 경우와 원자재가 납품되어 개경 등지에서 완제품으로 가공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청자를 비롯한 자기류는 前者에 해당한다. 따라서 미곡의 공상을 위한 조운로는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운반과 유통에 중요한 경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조사된 고려시대 자기 운반선의 침몰지역을 보면, 대개 고려의 조운로상에 있다. 일정한 국가 공납 체계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당시 수공업 생산현황으로 보아, 所로 편제되어 있었던 강진이나, 所로 편제되지 않고 일반군현으로서 수공업 생산을 감당했던 부안이나 제작의 환경과 유통의 목적, 소비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3차 년도에는 조운로의 내륙이동에 따른 가마터의 확산과 청자와 분청사기의 제작현황을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는 14~15세기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기존의 도자사 연구에서는 고려말 왜구의 해안지역 가마터 침탈로 장인들이 흩어지면서 가마들이 소규모화되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이같은 견해에 동의한다. 또 그러나 장인이 흩어지면서도 소규모나마 전국적으로 요업을 유지하게 되는 이유로 所 수공업의 해체를 원인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자기 공납과 이에 따른 조운제도의 변화과정일 것이다. 소위 “분청사기”라고 부르는 일정한 형식과 기형을 가지는 도자기는 내륙의 조운로를 통해 여전히 한양과 각지의 주료 소비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을 현존하는 기록과 가마터 현지 조사 결과를 대조함으로써 지도로 지도로 작성하여 구체적인 현황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청자의 가마터 분포에 비해 전국에 산재되어 있으며, 그 숫자도 청자 가마보다 많다. 이러한 도자기 생산지역의 확산, 생산량의 증대는 도자기 수공업의 발전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운로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 배로 운송하던 것에서 소를 이용하여 내륙으로 운송하므로 유실되거나 훼손도 심했다. 이같은 정황의 변화는 도자기에 제작지 명칭이나 도공이름, 관청이름 등을 써넣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분청사기의 제작 현황은 1424년부터 1432년 사이의 실정을 전하는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알 수 있다. 陶器所 185곳,․瓷器所의 139곳이 기재되어 있다. 고려말 이래 전국적으로 생산이 확대되고 있던 도자기업의 실정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가마터를 조사해보면, 고려시대 청자로부터 조선의 분청사기로 요업이 점진적으로 연계되는 가마외에 새로운 수급방식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가마들이 내륙이 보다 증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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