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은 우리 출판과 문화,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연구된 적이 없는 잡지이다. 현재 문단 원로나 문학 교수들에게 <학원>은 향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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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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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은 우리 출판과 문화,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연구된 적이 없는 잡지이다. 현재 문단 원로나 문학 교수들에게 <학원>은 향수를...
<학원>은 우리 출판과 문화,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연구된 적이 없는 잡지이다. 현재 문단 원로나 문학 교수들에게 <학원>은 향수를 자극하는 잡지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문학관을 형성하게 해준 ‘현재성’이 살아있는 잡지이다. 그 이후 세대들에게는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실제 접해보지 못해 그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전설’과 같은 잡지이다.
매체로서 <학원>이 갖는 의미는 동시대 어떤 잡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사상계>가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력 정도가 <학원>의 그것과 비견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학원 세대’, ‘학원 문단’이라는 말은 일개 잡지가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학원 세대’로 불리던 청소년들이 지금 사회의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당시 <학원>의 영향력은 발행부수나 회고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3월호 <학원>은 5만 5천부가 발간되었다. 다음 달인 4월호는 6만부, 6월호는 6만 5천 부, 7월호 7만부를 찍었다고 한다. 매달 5천부씩 발행 부수를 늘이는 일은 현재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성공이었다. 이어 8월호에는 8만부를 찍었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10만 부에 조금 못 미치는 발간 부수를 꾸준히 유지했다고 한다. 이는 동시대 일간 신문의 발행 부수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발행 기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월간지로 발행되었다는 점도 이 잡지의 평범하지 않은 성공을 짐작하게 해준다.
<학원>은 어떤 이유로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학원>이 동시대 청소년들의 문화를 상징할 수 있게 된 이유로는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잡지가 창간된 시기가 전쟁 중이어서 경쟁할만한 잡지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왕에 발행되던 잡지도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에 새롭게 잡지를 창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 시기만큼 잡지가 귀하게 여겨지던 때가 없었다. 창간 자체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주 소비층을 청소년으로 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잡지는 크게 종합지와 문예지로 나눌 수 있다. <신천지>가 대표적인 종합지였다면 <문예>는 순문예지를 표방한 대표적인 잡지였다. 그 밖에도 단명한 여러 잡지가 있었지만 대상을 청소년으로 분명히 한 잡지는 없었다. 청소년이 지적 욕망이 큰 집단이라고 보면 그들이 잡지의 중요 소비자로 변화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대중적이 편집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학원>은 청소년의 교양을 목적으로 한 잡지였지만 매우 다양하고 자유로운 편집을 보였다. 교훈이 될 만한 글들은 물론 다양한 문학과 예술을 다루었다. 특히 만화는 잡지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설과 시도 번안과 창작 등 다양한 작품이 실렸다. 매호 학생들의 글을 실어 학생들이 관심을 유도한 점도 잡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만화 「코주부 삼국지」나 조흔파의 소설 <얄개전>은 가장 성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기획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원>은 독자 투고와 ‘학원 문학상’으로 유명했다. 독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청소년들과 친근감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학원 문학상’과 함께 ‘학원 미술상’ 제도를 두기도 하였다. ‘학생용 세계백과 사전’이나 ‘학생 애창곡집’을 별책 부록으로 한다든지, 불규칙적이지만 현상 모집을 하는 등 작은 이벤트도 지속적으로 기획하였다.
다섯째, 권위 있는 기성 문인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원>은 잡지의 이벤트에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 많은 문인, 미술가들을 참여시켰다. 또 투고한 글에 대해서 친절한 비평도 달아 주었다. 여기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훈, 박목월, 조병화, 김용호, 이원수, 정비석, 마해송, 여석기, 김용환 등을 꼽을 수 있다. <학원>의 권위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았다. 한 예로 학원이 주최한 <전국중고등학생미술전람회>이 1954년 7월 12일-18일 사이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그 개막 테이프는 이기붕 국회의장이 끊었다. 행사는 문교부, 공보처, 자유아시아협회, 서울신문사에서 공동 후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