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海라는 곳이 자그마한 어촌에서 근대 동아시아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開港場이라는 곳이 생기고 또 그 속에 租界地가 생겨나면서부터이 ...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0085315
2013
Korean
820
학술저널
28-28(1쪽)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上海라는 곳이 자그마한 어촌에서 근대 동아시아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開港場이라는 곳이 생기고 또 그 속에 租界地가 생겨나면서부터이 ...
上海라는 곳이 자그마한 어촌에서 근대 동아시아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되고 開港場이라는 곳이 생기고 또 그 속에 租界地가 생겨나면서부터이 다. 상해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근대, 서구라는 담론과 연관해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근대나 歐美라는 곳에만 초점을 맞출 때, 상해연구의 의미는 19세기 중반부 터 영국 식민지 당국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던 홍콩이나 동아시아 도시화의 최전방에서 달리 고 있던 도쿄에 대한 연구보다 중요성이 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상해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상해라는 도시가 홍콩이나 도쿄와 달리 歐美적인 것들과 아시아적인 것들이 너무나도 뒤엉켜 있었고 또 이러한 점이 동아시 아의 근대의 굴곡적인 역사과정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상해연구도 국민국가의 성립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식민지 시대 유교개혁 지식인이었던 眞庵 李炳憲(1870-1940)의 상해 遊歷을 중심 으로 그가 상해에서 어떤 인물들과 교류를 했고, 또 어떤 내용을 둘러싸고 교류를 했으며, 또한 어떤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지(혹은 없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근대 동아시아 사상 사에서의 상해의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고찰대상인 이병헌은 일본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에서 유학 개혁운동으로 한민족 의 진로를 찾으려고 중국과 일본에 드나들며 공교운동에 진력했던 인물이다. 그의 개혁운동은 일 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대동사문회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으며, 또한 이승희나 김정규와 같이 망명하여 중국 동북지역의 한인사회에서 공교활동을 전개했던 것과도 다르다. 한편 이병헌처럼 한국과 상해를 드나들며 여러 가지 이념을 지닌 인물들과 접촉한 이는 드물다. 이병헌의 상해 유 력과 그 과정에서 접촉했던 인물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병헌연구 뿐만 아니라, 국경이나 민족, 심지어 부동한 이념을 넘어선 근대 동아시아의 지적 세계를 고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 다. 동아사아 지적 공간이라는 새로운 설정도 상해 연구에 새로운 연구시각을 부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