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해방 후 개신교 건국운동이 어떤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져왔는지 건국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김재준과 한경직 두 개신교 지도자의 건국이념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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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5
학위논문(석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일반대학원 , 신학과 , 2015. 8
2015
한국어
서울
Ⅱ, 100 p. ; 26 cm
지도교수: 안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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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해방 후 개신교 건국운동이 어떤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져왔는지 건국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김재준과 한경직 두 개신교 지도자의 건국이념을 비교하여 개신교내에서 건국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 한국 개신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해방 후 건국운동은 갑작스런 해방정국으로 인해 혼란스러움 속에 시작되었다. 해방이 한반도내에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좌우익간의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부터 미국과 소련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면서,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상회의에 의해 신탁통치 제안을 하게 된다. 이에 우익과 좌익은 반탁으로 일치된 의견을 보이다가 점차 좌익계에서 찬탁을 지지하면서 좌. 우익간 갈등이 심화된다. 결국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결국 남한은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이, 북한은 김일성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또한 본 연구는 해방 후 개신교의 건국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하였다. 정치적 성향분석을 통해서 당시 개신교의 건국운동의 성격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았다. 당시 해방 후 개신교는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재건 운동이 이루어졌다. 출옥성도들은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이들로서 북한지역 교회재건에 앞장을 섰다. 북한지역의 교회는 교회재건 운동에 힘쓰는 반면 남한교회는 내부적 요인의 신학적인 갈등이 주된 문제로 드러났다. 남한교회는 1945년에 열린 기독교남부대회 등을 통해 기독교이념에 의한 국가재건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기독교남부대회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기독교적 건국론을 다양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해방 후 개신교의 주요 정치적 성향은 반탁을 중심으로 한 우익계 노선을 취하였고, 이들은 대다수가 유학파 출신으로서 미군정의 인재로 등용되어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운동을 지지하였다.
본 논문은 김재준의 건국이념이 철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바탕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밝힌다. 김재준의 『기독교의 건국이념』은 1945년 8월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의 내용이다. 특히 김재준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를 참고하였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하나님 주권에 기초한 건국이념을 소개한다. 더 나아가 정부의 권위의 소재, 국토경영, 민정의 실재 등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나라 사상과 연결되어 김재준의 건국론은 영역주권과 같은 화란계통의 칼빈주의 계열에 있다. 정부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생긴 것이며 정부는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상호경의를 강제하도록 교회와 관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상호경의를 강제하는 것이 김재준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이며 정교분리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정교분리원칙은 국가와 교회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러나 교회는 건국에 필요한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할 임무를 지닌다고 보았다. 즉 인물양성론을 제시한다.
김재준은 공산주의를 탈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한다. 건국이념에서는 공산주의도 교회와 제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는 1950년 이후 6.25를 겪으면서 그 태도가 반공적으로 바뀐다. 김재준은 죄악으로 자유를 상실한 인간이 해방되기 위한 제도가 정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그는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유신과 군사정부시절 인권운동과 반(反)독재정권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본 논문은 김재준이 『기독교의 건국이념』에서 친일자에 대한 문제를 아주 소극적으로 다루었음을 발견하였다. 이는 해방 공간을 공동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해방공간에서 친일자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소극적으로 친일 문제를 다룬 것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보다는 해방 후 민족 공동체적 입장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과 기독교』를 다룸으로서 당시 월남 피남민들의 개신교 건국운동의 특성과 그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한경직은 1945년 1월 1일 공산주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과 교회를 창립하였는데, 교회이름을 ‘베다니전도교회’라 하였다. 그 이듬해 11월 당시 ‘영락정’이라는 당시의 지명에 따라 ‘영락교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47년 3월 ‘영락보린원’을 설립하여 운영한다. 그리고 1949년 보린원에서 『건국과 기독교』가 초판발행하게 되었다. 당시 월남 피난민들의 공동체였던 영락교회는 강한 반공의 중심지가 된다.
한편 한경직의 건국이념의 배경은 먼저 애국계몽주의와 인물양성론으로 건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서북학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서북학회의 회원이었던 남강 이승훈에 의해 기독교적 애국이념은 한경직의 건국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의 미국 유학시기 동안에 미국 민주주의 사회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화란계통의 칼빈주의로부터 하나님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정교분리입장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유신정권에 정교분리원칙을 중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 친정부적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관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한경직의 건국이념을 연구하면서 그의 강한 반공사상과 민주주의론을 연구하였는데, 그의 강한 반공주의는 서북지역에서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한경직은 공산주의자들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또한 공산주의를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겨,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평등을 위한 제도라고 하였다. 한경직은 기독교는 민주주의사상의 교육자이며, 인간의 권리와 인간의 자유, 평등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와 복음만이 민주주의 실행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한경직은 반공주의를 대항하여 민족 복음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나라가 되기를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썼다. 이는 결국 사회책임의식을 더욱 약화시켰으며, 복음화 운동에 치중하여 개신교는 보다 더 보수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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