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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기상학의 대부 국채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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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첫 기상학자로 불릴 국채표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뜻밖의 인물이다.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수학 전공자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교감으로 승진해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상학과 거리가 먼 학문을 전공했고 경력도 전혀 관련이 없었다. 관련을 구태여 찾는다면 교사로 있으면서 신문에 기상에 관한 교양성격의 글을 일부 게재했다는 점이다.
      그가 기상분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천문학자 이원철 때문이었다. 연희전문 사제관계가 인연이 되어 중앙관상대 대장으로 있던 이원철의 권유로 그는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중앙관상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기상관측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고 다시 이원철의 인력양성계획에 따라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기상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그의 나이 43세에 시카고대학 기상학과에 학부생으로 입학했던 것이다.
      기상학자로서 국채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해준 연구는 허리케인 예보 연구였다. 그는 시카고대학 기상학과 대학원과 미 제6군단에 있으면서 그에 대한 장기예보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당시 허리케인 기상관측은 24시간이라는 단기예보에 그쳐 많은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독창적으로 고안한 일기도의 데이터를 이용한 수리적 방법을 통해 예보기간을 3일로 대폭 늘려 장기예보의 길을 열었다. 이 연구는 미연방 기상국에서 당대 기상연구의 주요 성과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는 1961년 중앙관상대 대장으로 임명받고 기상관측 현대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에서 가뭄이 극심할 때 그 해결책으로 인공강우를 제시하며 주목을 끌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서 관심을 나타냈고 국가적인 재정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그는 기상관측소를 확대하고 자동일기예보, 라디오/텔레타이프 통신, 기상 팩시밀리 등 현대적 기상시스템을 갖추었다. 일일예보만이 아니라 주간예보, 월간예보 등과 같은 장기예보가 이루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세종대왕 이후 최초의 기상학자”로 불린 국채표, 그는 최신의 첨단기법으로 여겨진 인공강우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기상학 및 기상활동의 국가적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이고자 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현대적 기상예보 기술과 기상학의 제도적 발전을 선도한 과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창적인 국의 기법을 창안하여 허리케인과 태풍의 장기예보를 위한 학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만큼 국채표는 국제 기상학 연구에서도 한 획을 그은 보기 드문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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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기상학자로 불릴 국채표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뜻밖의 인물이다.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수학 전공자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첫 기상학자로 불릴 국채표는 다채로운 경력을 가진 뜻밖의 인물이다.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1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수학 전공자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교감으로 승진해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상학과 거리가 먼 학문을 전공했고 경력도 전혀 관련이 없었다. 관련을 구태여 찾는다면 교사로 있으면서 신문에 기상에 관한 교양성격의 글을 일부 게재했다는 점이다.
      그가 기상분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천문학자 이원철 때문이었다. 연희전문 사제관계가 인연이 되어 중앙관상대 대장으로 있던 이원철의 권유로 그는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중앙관상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기상관측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고 다시 이원철의 인력양성계획에 따라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기상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그의 나이 43세에 시카고대학 기상학과에 학부생으로 입학했던 것이다.
      기상학자로서 국채표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해준 연구는 허리케인 예보 연구였다. 그는 시카고대학 기상학과 대학원과 미 제6군단에 있으면서 그에 대한 장기예보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당시 허리케인 기상관측은 24시간이라는 단기예보에 그쳐 많은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독창적으로 고안한 일기도의 데이터를 이용한 수리적 방법을 통해 예보기간을 3일로 대폭 늘려 장기예보의 길을 열었다. 이 연구는 미연방 기상국에서 당대 기상연구의 주요 성과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는 1961년 중앙관상대 대장으로 임명받고 기상관측 현대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에서 가뭄이 극심할 때 그 해결책으로 인공강우를 제시하며 주목을 끌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서 관심을 나타냈고 국가적인 재정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그는 기상관측소를 확대하고 자동일기예보, 라디오/텔레타이프 통신, 기상 팩시밀리 등 현대적 기상시스템을 갖추었다. 일일예보만이 아니라 주간예보, 월간예보 등과 같은 장기예보가 이루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세종대왕 이후 최초의 기상학자”로 불린 국채표, 그는 최신의 첨단기법으로 여겨진 인공강우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기상학 및 기상활동의 국가적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이고자 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현대적 기상예보 기술과 기상학의 제도적 발전을 선도한 과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창적인 국의 기법을 창안하여 허리케인과 태풍의 장기예보를 위한 학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만큼 국채표는 국제 기상학 연구에서도 한 획을 그은 보기 드문 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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