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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記錄에 나타난 百濟 始祖 및 建國者의 史的 位相과 實態 = Historic identify and reality on th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百濟) in historical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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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88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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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and an object of sacrificial rituals in the ancestral shrine, was named founder solely as an attempt to create a lineage of the Buyeo clans(凡夫餘族) which would be equal to Koguryeo Kingdom(高句麗)'s ones.
    Gu-tae, who is found only in historical books from the Northern Chinese Dynasties(北朝) like 『Zhoushu(周書)』, 『Suishu(隋書)』 which was written in the early 7th century, is Wuigutae(尉仇台) the first king who was appointed by the Chinese Emperor. Gu-tae was named founder by King Seong(聖王), after the king moved the capital to Sabi(泗沘), renamed the kingdom Nambuyeo(南扶餘), and established the Chinese styled ancestral shrine according to 『Sanli(三禮)』 descended from the Chinese Liang Dynasty(梁). China became aware of Gu-tae's status as founder through its clos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Baeckje kingdom, and thus Gu-tae's status was recorded in Chinese historical documents. However, there is no record of Gu-tae in Korean historical documents. One possible explanation for Gu-tae's absence from Korean history posits that Gu-tae didn't win the approval of the ruling class of the Baekje kingdom, had no practical connections with Baekje history, and thereby was excluded from historical record and stripped of founder status.
    On-jo, who is found only in Korean historical records, is believed to have been named founder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近肖古王). The 『Seogi(書記)』, the document which names On-jo as founder, was written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 and in fact, many accomplishments of Guenchogo and his predecessors are attributed to On-jo. Even though On-jo wasn't well known in China, his status as the founder was maintained until the fall of the Baekje Kingdom so that he could be recorded as the founder in 『Samguksagi(三國史記)』.
    Baekje's royal family maintained simultaneous belief in both the ideological founder of the kindgom, Dong-myeong, and the practical founder, On-jo, until the fall of the kingdom. Gu-tae also held the status of founder for a period of time while the kingdom was attempting to introduce the Chinese ancestral shrine model, but he failed to maintain his status throughout the length of Baekje rule. Dong-myeong's mythical status and Gu-tae's failure to maintain founder status necessitate the identification of On-jo as the tru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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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

    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and an object of sacrificial rituals in the ancestral shrine, was named founder solely as an attempt to create a lineage of the Buyeo clans(凡夫餘族) which would be equal to Koguryeo Kingdom(高句麗)'s ones.
    Gu-tae, who is found only in historical books from the Northern Chinese Dynasties(北朝) like 『Zhoushu(周書)』, 『Suishu(隋書)』 which was written in the early 7th century, is Wuigutae(尉仇台) the first king who was appointed by the Chinese Emperor. Gu-tae was named founder by King Seong(聖王), after the king moved the capital to Sabi(泗沘), renamed the kingdom Nambuyeo(南扶餘), and established the Chinese styled ancestral shrine according to 『Sanli(三禮)』 descended from the Chinese Liang Dynasty(梁). China became aware of Gu-tae's status as founder through its clos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Baeckje kingdom, and thus Gu-tae's status was recorded in Chinese historical documents. However, there is no record of Gu-tae in Korean historical documents. One possible explanation for Gu-tae's absence from Korean history posits that Gu-tae didn't win the approval of the ruling class of the Baekje kingdom, had no practical connections with Baekje history, and thereby was excluded from historical record and stripped of founder status.
    On-jo, who is found only in Korean historical records, is believed to have been named founder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近肖古王). The 『Seogi(書記)』, the document which names On-jo as founder, was written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 and in fact, many accomplishments of Guenchogo and his predecessors are attributed to On-jo. Even though On-jo wasn't well known in China, his status as the founder was maintained until the fall of the Baekje Kingdom so that he could be recorded as the founder in 『Samguksagi(三國史記)』.
    Baekje's royal family maintained simultaneous belief in both the ideological founder of the kindgom, Dong-myeong, and the practical founder, On-jo, until the fall of the kingdom. Gu-tae also held the status of founder for a period of time while the kingdom was attempting to introduce the Chinese ancestral shrine model, but he failed to maintain his status throughout the length of Baekje rule. Dong-myeong's mythical status and Gu-tae's failure to maintain founder status necessitate the identification of On-jo as the tru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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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와의 경쟁의식 속에 그들과 필적할 만한 혈통 및 사상적 위상을 갖추는 과정에서 凡夫餘族의 始祖를 백제 시조로 삼았던 결과이다. 비록 동명묘가 한화의 과정에서 설치된 구태묘에 의해 일시 대체되기도 했지만, 동명에 대한 시조 인식은 『隋書』 百濟傳과 『續日本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 멸망기까지 대부분의 지배집단에 의해 공유되었다.
    7세기 초 편찬된 『周書』·『隋書』 등 중국 北朝系 사서에만 보이는 始國者 仇台는 부여사상 최초의 始封之君인 尉仇台이다. 백제 聖王은 泗沘 遷都와 더불어 南扶餘로 개칭하고, 漢化 政策의 일환으로 梁으로부터 『三禮』를 받아들여 중국적 宗廟를 설치하는 가운데 구태를 시국자로 추대하며 구태묘까지 세웠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 관계 속에 이 사실이 강조되어 『주서』 등에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기록에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위구태가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와 직결될 수 없어, 지배층의 전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해 멸망 이전 시국자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결과이다.
    국내사서에만 등장하는 온조는 近肖古王代를 하한으로 하는 역대 왕들의 일부 치적이 온조의 업적으로 가탁된 점과 『書記』가 근초고왕대 편찬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때 온조를 건국자로 삼는 관념이 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외교적으로 강조된 시국자 구태의 존재로 의해 중국에 알려지지 못했지만 온조는 멸망기까지 실재적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멸망 이후 국내 기록에 사적이 남아 『三國史記』 등에 건국자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 왕실은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실질적인 건국자 온조가 공존하는 二元化된 시조 관념을 멸망기까지 소유했다. 중국적 종묘제의 도입 속에 일시적으로 부여사상 시봉지군인 위구태가 시국자로 채택되기도 했지만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서 사적 위상이 확고한 이는 온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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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와의 경쟁의식 속에 그들과 필적할 만한 혈통 및 사상적 위상을 갖추는 과정에서 凡夫餘族의 始祖를 백제 시조로 삼았던 결과이다. 비록 동명묘가 한화의 과정에서 설치된 구태묘에 의해 일시 대체되기도 했지만, 동명에 대한 시조 인식은 『隋書』 百濟傳과 『續日本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 멸망기까지 대부분의 지배집단에 의해 공유되었다.
    7세기 초 편찬된 『周書』·『隋書』 등 중국 北朝系 사서에만 보이는 始國者 仇台는 부여사상 최초의 始封之君인 尉仇台이다. 백제 聖王은 泗沘 遷都와 더불어 南扶餘로 개칭하고, 漢化 政策의 일환으로 梁으로부터 『三禮』를 받아들여 중국적 宗廟를 설치하는 가운데 구태를 시국자로 추대하며 구태묘까지 세웠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 관계 속에 이 사실이 강조되어 『주서』 등에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기록에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위구태가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와 직결될 수 없어, 지배층의 전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해 멸망 이전 시국자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결과이다.
    국내사서에만 등장하는 온조는 近肖古王代를 하한으로 하는 역대 왕들의 일부 치적이 온조의 업적으로 가탁된 점과 『書記』가 근초고왕대 편찬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때 온조를 건국자로 삼는 관념이 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외교적으로 강조된 시국자 구태의 존재로 의해 중국에 알려지지 못했지만 온조는 멸망기까지 실재적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멸망 이후 국내 기록에 사적이 남아 『三國史記』 등에 건국자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 왕실은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실질적인 건국자 온조가 공존하는 二元化된 시조 관념을 멸망기까지 소유했다. 중국적 종묘제의 도입 속에 일시적으로 부여사상 시봉지군인 위구태가 시국자로 채택되기도 했지만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서 사적 위상이 확고한 이는 온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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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梁書 卷 54, 列傳 48, 諸夷 百濟傳"

    2 중국사학사 편집위원회, "중국사학사-선진·한·당 편" 간디서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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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병곤,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261-266, 2003

    5 김병곤, "신라 시조 인식의 변천과 五廟制의 太祖(始祖)大王에 대한 시론, In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27-241, 2005

    6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37-64, 1982

    7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8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9 김기섭, "백제의 국가성장과 비류계의 역할" 16 (16): 502-503, 2002

    10 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38-3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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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8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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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三國史記 卷 23, 百濟本紀 1, 始祖 溫祚王 元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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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강종원, "4세기 백제사 연구" 서경 147-155, 2002

    112 趙仁成, "4, 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4 : 63-64,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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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82 0.82 0.8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85 0.87 1.8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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