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4887257
김병곤 (東國大學校 史學科)
2008
Korean
Dong-myeong(東明) ; On-jo(溫祚) ; Gu-tae(仇台) ; Seogi(『書記) ; 東明 ; 溫祚 ; 仇台 ; 『書記』
KCI등재
학술저널
99-126(28쪽)
12
0
상세조회0
다운로드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
According to existing historical records, Dong-myeong(東明), On-jo(溫祚), and Gu-tae(仇台) have each been identified as the founders of the Baekje Kingdom. However, each of these figures holds a different status. Dong-myeong, who is th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and an object of sacrificial rituals in the ancestral shrine, was named founder solely as an attempt to create a lineage of the Buyeo clans(凡夫餘族) which would be equal to Koguryeo Kingdom(高句麗)'s ones.
Gu-tae, who is found only in historical books from the Northern Chinese Dynasties(北朝) like 『Zhoushu(周書)』, 『Suishu(隋書)』 which was written in the early 7th century, is Wuigutae(尉仇台) the first king who was appointed by the Chinese Emperor. Gu-tae was named founder by King Seong(聖王), after the king moved the capital to Sabi(泗沘), renamed the kingdom Nambuyeo(南扶餘), and established the Chinese styled ancestral shrine according to 『Sanli(三禮)』 descended from the Chinese Liang Dynasty(梁). China became aware of Gu-tae's status as founder through its close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the Baeckje kingdom, and thus Gu-tae's status was recorded in Chinese historical documents. However, there is no record of Gu-tae in Korean historical documents. One possible explanation for Gu-tae's absence from Korean history posits that Gu-tae didn't win the approval of the ruling class of the Baekje kingdom, had no practical connections with Baekje history, and thereby was excluded from historical record and stripped of founder status.
On-jo, who is found only in Korean historical records, is believed to have been named founder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近肖古王). The 『Seogi(書記)』, the document which names On-jo as founder, was written during the reign of King Guenchogo, and in fact, many accomplishments of Guenchogo and his predecessors are attributed to On-jo. Even though On-jo wasn't well known in China, his status as the founder was maintained until the fall of the Baekje Kingdom so that he could be recorded as the founder in 『Samguksagi(三國史記)』.
Baekje's royal family maintained simultaneous belief in both the ideological founder of the kindgom, Dong-myeong, and the practical founder, On-jo, until the fall of the kingdom. Gu-tae also held the status of founder for a period of time while the kingdom was attempting to introduce the Chinese ancestral shrine model, but he failed to maintain his status throughout the length of Baekje rule. Dong-myeong's mythical status and Gu-tae's failure to maintain founder status necessitate the identification of On-jo as the true founder of the Baekje kingdom.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
현전 기록에 백제 시조로서 소개된 이는 東明·溫祚와 仇台 등이었지만 이들이 百濟史에서 차지하는 位相은 구별된다. 우선 始祖廟의 제례 대상인 동명은 夫餘族 일파인 건국 집단이 高句麗와의 경쟁의식 속에 그들과 필적할 만한 혈통 및 사상적 위상을 갖추는 과정에서 凡夫餘族의 始祖를 백제 시조로 삼았던 결과이다. 비록 동명묘가 한화의 과정에서 설치된 구태묘에 의해 일시 대체되기도 했지만, 동명에 대한 시조 인식은 『隋書』 百濟傳과 『續日本紀』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 멸망기까지 대부분의 지배집단에 의해 공유되었다.
7세기 초 편찬된 『周書』·『隋書』 등 중국 北朝系 사서에만 보이는 始國者 仇台는 부여사상 최초의 始封之君인 尉仇台이다. 백제 聖王은 泗沘 遷都와 더불어 南扶餘로 개칭하고, 漢化 政策의 일환으로 梁으로부터 『三禮』를 받아들여 중국적 宗廟를 설치하는 가운데 구태를 시국자로 추대하며 구태묘까지 세웠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외교 관계 속에 이 사실이 강조되어 『주서』 등에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태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 기록에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위구태가 백제사상 실질적인 건국자와 직결될 수 없어, 지배층의 전반적인 동의를 얻지 못해 멸망 이전 시국자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결과이다.
국내사서에만 등장하는 온조는 近肖古王代를 하한으로 하는 역대 왕들의 일부 치적이 온조의 업적으로 가탁된 점과 『書記』가 근초고왕대 편찬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때 온조를 건국자로 삼는 관념이 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외교적으로 강조된 시국자 구태의 존재로 의해 중국에 알려지지 못했지만 온조는 멸망기까지 실재적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멸망 이후 국내 기록에 사적이 남아 『三國史記』 등에 건국자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 왕실은 관념상의 시조 동명과 실질적인 건국자 온조가 공존하는 二元化된 시조 관념을 멸망기까지 소유했다. 중국적 종묘제의 도입 속에 일시적으로 부여사상 시봉지군인 위구태가 시국자로 채택되기도 했지만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로서 사적 위상이 확고한 이는 온조였다.
참고문헌 (Reference)
1 "梁書 卷 54, 列傳 48, 諸夷 百濟傳"
2 중국사학사 편집위원회, "중국사학사-선진·한·당 편" 간디서원 1998
3 高國抗, "중국사학사" 풀빛 1998
4 김병곤,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261-266, 2003
5 김병곤, "신라 시조 인식의 변천과 五廟制의 太祖(始祖)大王에 대한 시론, In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27-241, 2005
6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37-64, 1982
7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8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9 김기섭, "백제의 국가성장과 비류계의 역할" 16 (16): 502-503, 2002
10 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38-39, 2000
1 "梁書 卷 54, 列傳 48, 諸夷 百濟傳"
2 중국사학사 편집위원회, "중국사학사-선진·한·당 편" 간디서원 1998
3 高國抗, "중국사학사" 풀빛 1998
4 김병곤, "신라 왕권 성장사 연구" 학연문화사 261-266, 2003
5 김병곤, "신라 시조 인식의 변천과 五廟制의 太祖(始祖)大王에 대한 시론, In 삼국유사 기이편의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27-241, 2005
6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37-64, 1982
7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8 김기흥, "백제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일 연구" 한국역사연구회 (54) : 197-222, 2004
9 김기섭, "백제의 국가성장과 비류계의 역할" 16 (16): 502-503, 2002
10 김기섭,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38-39, 2000
11 李道學, "백제고대국가연구" 一潮閣 70-72, 1995
12 박현숙,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학회 (39) : 31-55, 2005
13 리준영, "고구려의 국가 기원에 대하여 -주몽 설화를 중심으로" 4 : 19-20, 1964
14 盧泰敦,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9-52, 1999
15 "魏書 卷 100, 列傳 88, 百濟國傳"
16 耿鐵華, "高句麗起源和建國問題探索" 22-24, 1986
17 金龍, "高句麗 琉璃王 考" 80 : 61-62, 1980
18 金和經, "高句麗 建國神話의 硏究" 86 : 41-42, 1998
19 李基白, "韓國史論文選集Ⅱ" 一潮閣 1976
20 李基白, "韓國史講座, In 古代篇" 一潮閣 131-, 1982
21 李弘稙, "韓國 古代史의 硏究" 329-332, 1987
22 丁謙, "隋書四夷傳地理考證, In 蓬萊軒地理學叢書 2" 正中書局 376-, 1962
23 "隋書 卷 81, 列傳 46, 東夷 百濟傳"
24 "隋書 禮儀志 1·2"
25 "隋書 卷 81, 列傳 46, 東夷 百濟傳"
26 "舊唐書 卷 199, 列傳 149 上, 東夷 百濟傳"
27 이기동, "百濟의 歷史와 文化" 39-40, 1996
28 徐大錫, "百濟의 神話" 60 : 239-243, 1985
29 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10 : 40-41, 1981
30 李丙燾, "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中心勢力의 變動, In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71-, 1976
31 李丙燾, "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中心勢力의 變動" 472-476, 1976
32 朴燦圭, "百濟의 始祖 傳承과 出自" 19 : 43-45, 2003
33 徐永大, "百濟의 五帝信仰과 그 意味" 20 : 125-, 2000
34 梁起錫, "百濟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專制王權의 成立問題와 관련하여-" 4 : 83-89, 1990
35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 In 武寧王陵 發掘調査報告書" 93-, 1973
36 李基東, "百濟王室交代論" 12 : 124-144, 1996
37 李鍾旭, "百濟王國의 成長" 12 (12): 17-21, 1977
38 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 11 : 1959
39 金哲埈, "百濟建國考, In 韓國古代社會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76-, 1990
40 王民信, "百濟始祖仇台考" 17 : 161-170, 1986
41 金杜珍, "百濟始祖 溫祚神話의 形成과 그 傳承" 13 : 203-206, 1990
42 李基東, "百濟國의 政治理念에 대한 一考察" 69 : 1990
43 "百濟史硏究" 一潮閣 161-181, 1996
44 坂元義種, "百濟史の硏究" 塙書房 183-, 1978
45 金在鵬, "百濟仇台考" 78 : 2-7, 1975
46 趙景徹, "百濟 聖王代 儒佛政治理念-陸詡와 謙益을 중심으로-" 15 : 12-13, 2000
47 梁起錫, "百濟 泗沘時代의 佐平制硏究" 9 : 22-, 1997
48 金周成, "百濟 泗沘時代 政治史 硏究" 전남대학교 1990
49 盧重國, "百濟 支配勢力의 變遷" 124-192, 1988
50 李弘稙, "百濟 建國說話에 대한 再檢討, In 國史上의 提問題" 1960
51 金杜珍, "百濟 建國神話의 復元試論-‘祭天祀地’의 儀禮와 관련하여-, In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一潮閣 172-174, 1999
52 盧明鎬, "百濟 建國神話의 原型과 成立背景" 20 : 58-, 1989
53 李基東, "百濟 建國史의 二, 三의 문제" 88-89, 1996
54 林起煥, "百濟 始祖傳承의 형성과 변천에 관한 고찰" 28 : 13-15, 1998
55 李鍾旭, "百濟 初期國家로서 十濟의 形成" 69 : 47-48, 1996
56 李道學, "百濟 初期史에 관한 文獻資料의 檢討" 한양대 23 : 34-38, 1993
57 李鍾泰, "百濟 仇台廟의 成立과 繼承" 13 : 101-144, 1998
58 朴燦圭, "百濟 仇台廟 成立背景에 대한 一考察-그 外的 要因을 중심으로" 17 : 15-, 1994
59 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45 : 25-, 1984
60 金起燮, "漢城時代 百濟의 王系에 대하여" 83 : 1-35, 1993
61 朴承範, "漢城時代 百濟의 國家祭祀" 19 : 109-114, 2003
62 "東史綱目 附錄 卷 上, 考異, 優台仇台之別. 海東繹史 卷 18, 禮志 1, 祭禮 廟祭"
63 金毓黻, "東北通史" 洪氏出版社 29-, 1976
64 盧泰敦, "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 5 : 55-58, 1993
65 那珂通世, "朝鮮古史考, In 史學雜誌" 1984
66 "晋書 卷 97, 列傳 67, 四夷 馬韓條"
67 朱甫暾, "新羅國家 形成期 金氏族團의 成長背景" 26 : 120-121, 2002
68 今西龍, "新羅史通說, In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8-10, 1933
69 金哲埈,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 17 (17): 1990
70 末松保和, "新羅上古世系考, In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15-, 1954
71 李文基, "新羅 五廟制의 成立과 그 背景, In 金廷學博士米壽紀念 韓國古代史와 考古學" 39-44, 2000
72 佐伯有淸, "新撰姓氏錄の硏究 本文篇" 吉川弘文館 286-, 1962
73 太田亮, "新撰姓氏錄と上代氏族史" 內閣印刷局 3-24, 1940
74 "新撰姓氏錄 卷 24, 右京諸番下 百濟條"
75 "新唐書 卷 219, 列傳 北狄 百濟傳"
76 기수연, "後漢書 東夷列傳 <夫餘國傳> 분석" 한국문화사학회 (21) : 1101-1126, 2004
77 "後漢書 卷 85, 東夷列傳 75, 夫餘國傳"
78 "宋書 卷 97, 列傳 57, 夷蠻 東夷 百濟國傳"
79 "宋書 卷 97, 列傳 57, 夷蠻 東夷 百濟國傳"
80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202-, 1984
81 "周書 卷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傳"
82 "周書 卷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傳"
83 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一潮閣 334-335, 1989
84 "南齊書 卷 58, 列傳 39, 東夷 百濟國條"
85 "南齊書 卷 58, 列傳 39, 東夷 百濟國條"
86 "南史 卷 79, 列傳 69, 夷貊 下 百濟傳"
87 兪元載, "中國正史 百濟傳 硏究" 學硏文化社 66-68, 1993
88 金靜庵, "中國史學史 修訂重排本" 鼎文書局印行 1976
89 金毓黻, "中國史學史" 河北敎育出版社 2000
90 增井經夫, "中國の歷史書-中國史學史" 刀水書房 1984
91 김병곤, "中國 史書에 나타난 百濟 始祖觀과 始國者 仇台" 한국고대사학회 (46) : 151-194, 2007
92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下)" 3 : 1976
93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393-395, 1975
94 "三國遺事 卷 2, 紀異 2, 武王條"
95 "三國遺事 卷 1, 王曆 第 1, 百濟 惠王·法王條"
96 李鍾泰, "三國時代 始祖 認識과 그 變遷" 國民大學校 大學院 1996
97 "三國史記 卷 28, 百濟本紀 6, 義慈王 卽位年條"
98 "三國史記 卷 27, 百濟本紀 5, 威德王 卽位年條"
99 "三國史記 卷 26, 百濟本紀 6, 聖王 16年條"
100 "三國史記 卷 26, 百濟本紀 4, 聖王 16年條"
101 "三國史記 卷 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30年條 附記"
102 "三國史記 卷 23, 百濟本紀 1, 始祖 溫祚王 17年 夏四月條"
103 "三國史記 卷 1, 新羅本紀 1, 始祖 赫居世 卽位年條"
104 "三國史記 卷 1, 新羅本紀 1, 南解次次雄 3年 正月條;卷 32, 雜志 1, 祭祀條"
105 申東河,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引用資料에 관한 一考」, 三國史記 의 原典 檢討" 46-, 1995
106 "三國史記 卷 32, 樂志 1, 祭祀 高句麗 百濟條"
107 "三國史記 卷 26, 百濟本紀 4, 武寧王 21年 12月條"
108 "三國史記 卷 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27年 正月條"
109 "三國史記 卷 23, 百濟本紀 1, 始祖 溫祚王 元年條"
110 박현숙,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條의 檢討, In 先史와 古代" 10 : 82-, 1998
111 강종원, "4세기 백제사 연구" 서경 147-155, 2002
112 趙仁成, "4, 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4 : 63-64, 1991
百濟와 唐 관계에 관련한 두 문제 -웅진 도독 왕문도의 사망과 예식진묘지명에 관하여-
학술지 이력
|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 2026 | 평가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 2020-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 2017-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
| 2013-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10-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7-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
| 2006-01-01 | 등재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 2005-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 |
| 2004-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 |
| 2002-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 2016 | 0.82 | 0.82 | 0.89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 0.85 | 0.87 | 1.843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