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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1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충청지역 피난정치 =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 1361 into Goryeo and King Gongmin"s Politics of Evacuation in Chungcheong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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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흔히 안동이 잘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은 안동보다 상주와 청주에서 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국정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원과의 외교에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공민왕의 몽진 지역으로 안동만이 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홍건적 격퇴에 있어 안동이 갖고 있던 상징성 때문에 불거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안동행궁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하였던 관계로, 홍건적의 침입하면 공민왕의 몽진과 안동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상주와 청주에 체류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하고 국정을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홍건적이 개경에서 물러난 직후 分司體制를 도입하여 개경과의 연락망을 복구하여 還都에 대비하였다. 또한 행재소에서 정규의 사신을 파견하고 과거까지 設行함으로써 행궁의 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즉, 공민왕은 청주행궁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정규사신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使行에 부수되는 拜表儀禮까지 거행함으로써 고려 조정이 정상궤도에 올라섰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아울러 국자감시 · 예부시 · 승보시를 세 달 동안 연달아 설행하여 국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운영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나아가 환도 이후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크고 작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 관제의 개혁까지 단행했다. 관제의 개혁은 상주행궁에서 실시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개혁은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고 원나라의 불신을 무마하여 군사적 제휴까지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재소에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대외만큼이나 대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도를 쉽게 외적에게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꺼리가 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분명 국내적 요인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공민왕은 아마도 관제개혁을 통해 환도 후에 행할 국정의 방향을 천명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려는 친원파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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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흔히 안동이 잘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은 안동보다 상주와 청주에서 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국정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원과의 외교에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공민왕의 몽진 지역으로 안동만이 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홍건적 격퇴에 있어 안동이 갖고 있던 상징성 때문에 불거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안동행궁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하였던 관계로, 홍건적의 침입하면 공민왕의 몽진과 안동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상주와 청주에 체류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하고 국정을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홍건적이 개경에서 물러난 직후 分司體制를 도입하여 개경과의 연락망을 복구하여 還都에 대비하였다. 또한 행재소에서 정규의 사신을 파견하고 과거까지 設行함으로써 행궁의 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즉, 공민왕은 청주행궁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정규사신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使行에 부수되는 拜表儀禮까지 거행함으로써 고려 조정이 정상궤도에 올라섰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아울러 국자감시 · 예부시 · 승보시를 세 달 동안 연달아 설행하여 국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운영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나아가 환도 이후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크고 작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 관제의 개혁까지 단행했다. 관제의 개혁은 상주행궁에서 실시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개혁은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고 원나라의 불신을 무마하여 군사적 제휴까지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재소에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대외만큼이나 대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도를 쉽게 외적에게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꺼리가 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분명 국내적 요인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공민왕은 아마도 관제개혁을 통해 환도 후에 행할 국정의 방향을 천명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려는 친원파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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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to Goryeo led King Gongmin to evacuate and stay in Chungcheong Region for about one year and three months. During the period, King Gongmin and his company wandered about in Andong, Sangju, and Cheongju. While staying at Sangju and Cheongju, he took considerably important steps. First, right after Red Turban Bandits retreated from Gaegyeong, he prepared for returning to the capital by establishing a network of contacts with Gaegyeong. In addition, he dispatched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and even administered state examinations in his travel palace, showing off the fact that his power remained undiminished. In other words, King Gongmin sent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in his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Besides, he held magnificent ceremonies to teach manners in accompaniment with the sending of envoys, thereby informing in and out of the nation that the Royal Court of Goryeo was running back the right track. Moreover, he held three important state examinations in a row for three months, boasting of the fact that his government was under normal operation as usual.
      Further, for smooth operation of his government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he carried out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as well as small and large improvement upon institutions.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was done in Sangju. According to previous research, such innovation was conducted in order to tighten the discipline that had relaxed, and cover up distrust by Yuan Dynasty and achieve military partnership with the neighboring country. Nevertheless, his series of reforms were made in his travel palace, which meant that they were much influenced by domestic factors. Given that he not only gave his capital to the foreign enemy with ease but also fled from his palace, which made him subject to universal ridicule, domestic factors may have acted as important variables. Probably by proclaiming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through government-led reforms, King Gongmin aimed for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and controlling the pro-Yuan group who attempted to seize power amid chaotic political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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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to Goryeo led King Gongmin to evacuate and stay in Chungcheong Region for about one year and three months. During the period, King Gongmin and his company wandered about in Andong, Sangju, and Cheongju. While staying a...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to Goryeo led King Gongmin to evacuate and stay in Chungcheong Region for about one year and three months. During the period, King Gongmin and his company wandered about in Andong, Sangju, and Cheongju. While staying at Sangju and Cheongju, he took considerably important steps. First, right after Red Turban Bandits retreated from Gaegyeong, he prepared for returning to the capital by establishing a network of contacts with Gaegyeong. In addition, he dispatched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and even administered state examinations in his travel palace, showing off the fact that his power remained undiminished. In other words, King Gongmin sent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in his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Besides, he held magnificent ceremonies to teach manners in accompaniment with the sending of envoys, thereby informing in and out of the nation that the Royal Court of Goryeo was running back the right track. Moreover, he held three important state examinations in a row for three months, boasting of the fact that his government was under normal operation as usual.
      Further, for smooth operation of his government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he carried out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as well as small and large improvement upon institutions.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was done in Sangju. According to previous research, such innovation was conducted in order to tighten the discipline that had relaxed, and cover up distrust by Yuan Dynasty and achieve military partnership with the neighboring country. Nevertheless, his series of reforms were made in his travel palace, which meant that they were much influenced by domestic factors. Given that he not only gave his capital to the foreign enemy with ease but also fled from his palace, which made him subject to universal ridicule, domestic factors may have acted as important variables. Probably by proclaiming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through government-led reforms, King Gongmin aimed for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and controlling the pro-Yuan group who attempted to seize power amid chaotic political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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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초록
      • 1. 머리말
      • 2. 공민왕의 피난경로와 충주 · 안동 행궁
      • 3. 상주와 청주의 행궁
      • 4. 공민왕대 피난의 정치
      • 초록
      • 1. 머리말
      • 2. 공민왕의 피난경로와 충주 · 안동 행궁
      • 3. 상주와 청주의 행궁
      • 4. 공민왕대 피난의 정치
      • 5. 맺음말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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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홍영의, "이방실 장군의 생애와 군사활동"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03) : 279-322, 2017

      2 이강한, "공민왕대 관제개편의 내용 및 의미" 역사학회 (201) : 35-85, 2009

      3 김창현, "고려의 남경, 한양" 신서원 2006

      4 박용운, "고려시대연구 Ⅱ: 2000, 高麗時代 尙書省硏究" 경인문화사 2000

      5 이경희, "고려말 紅巾賊의 침입과 安東臨時首都의 대응" 24 : 1993

      6 한정수, "고려 전기 ‘迎契丹使臣儀’의 내용과 의미" 한국사학회 (118) : 159-201, 2015

      7 박재우,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 신구문화사 2005

      8 홍영의,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2004

      9 배영동,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2004

      10 박용운,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1

      1 홍영의, "이방실 장군의 생애와 군사활동"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03) : 279-322, 2017

      2 이강한, "공민왕대 관제개편의 내용 및 의미" 역사학회 (201) : 35-85, 2009

      3 김창현, "고려의 남경, 한양" 신서원 2006

      4 박용운, "고려시대연구 Ⅱ: 2000, 高麗時代 尙書省硏究" 경인문화사 2000

      5 이경희, "고려말 紅巾賊의 침입과 安東臨時首都의 대응" 24 : 1993

      6 한정수, "고려 전기 ‘迎契丹使臣儀’의 내용과 의미" 한국사학회 (118) : 159-201, 2015

      7 박재우, "고려 국정운영의 체계와 왕권" 신구문화사 2005

      8 홍영의,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2004

      9 배영동,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2004

      10 박용운,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1

      11 민현구, "高麗政治史論-統一國家의 확립과 獨立王國의 시련-"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12 金載名, "高麗後期 王室財政의 二重的 構造-이른바 私藏의 변화 과정을 중심으로-" 89 : 2000

      13 허흥식, "高麗 科擧制度의 成立과 變遷" 10 : 1974

      14 민현구, "高麗 恭愍王代 중엽의 정치적 변동" 진단학회 (107) : 37-67, 2009

      15 민현구,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上)" 38 : 1968

      16 민현구, "白文寶硏究-政治家로서의 活躍을 中心으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7 : 1987

      17 고병익, "東亞交涉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18 김호종, "恭愍王의 安東蒙塵에 관한 一硏究" 3 : 1982

      19 이정훈, "忠宣王代 官制 改革과 관청간의 統屬관계" 한국중세사학회 (32) : 143-181, 2012

      20 박용운, "≪高麗史≫ 百官志譯註" 신서원 2009

      21 신은제, "14세기 전반 원의 정국동향과 고려의 정치도감" 한국중세사학회 (26) : 191-23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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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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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29 0.29 0.3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7 0.42 0.818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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