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조・일수호조규의 체결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1885년 2월부터 일본인 민간인의 서울 거주가 허용되어 거류지가 형성되는 등, 조선에서의 일본인은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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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orean
護照 ; 지방관 ; 조선 정부 ; 외국인 ; 접객 지침 ; 袁世凱 ; 단속 ; 지방관 ; 조선 정부 ; 외국인 ; 접객 지침 ; 단속 ; Hojo(護照 ; VISA) ; Local Governor ; Korean Government ; Guidelines ; Foreigner ; Yuan Shihk"ai(袁世凱) ; Crack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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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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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의 체결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1885년 2월부터 일본인 민간인의 서울 거주가 허용되어 거류지가 형성되는 등, 조선에서의 일본인은 그 인구수는 물론이고 활동 역시 증가하였다. 이와 더불어 외국인이 국내 입국시 반드시 휴대해야 하는 護照의 경우, 원래 외교관, 공무원, 선교사 등 특수직종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상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884~1885년 무렵부터 발급 대상이 일반인들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관리상 허점이 생기게 되어 1885~1886년 무렵부터 일본인들이 호조를 갖지 않고 활동하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생겨났다. 한편 청국인의 경우, 일찍이 서울에 중국인이 거주・통상할 수 있는 권리(開棧權)를 획득하여 華商이 조선에 급속도로 진출하였다. 1885년 袁世凱가 부임하면서 청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됨에 따라 화상이 호조를 소지하지 않은 채로 袁世凱의 파견을 사칭하는 등 각종 폐단은 더 커졌다. 호조 규정 위반에 대한 처벌은 외국과 체결한 조약문에 명시되어 있었지만, 청국인의 경우 청에 의한 내정간섭이라는 정치적 현실이 엄존하였으며, 조선의 官民은 외국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지방관들은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력하였다. 따라서 호조 휴대 유무에 대한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청국인・일본인들의 호조 휴대규정 위반 사례가 속출하자. 마침내 조선 정부에서 1887년 1월 4일자로 총 5개조에 걸친 ‘외국인 접객 지침’을 제정하여 9도에 관문으로 하달하였다. 서문에서는 호조 휴대규정 문란화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인에 대한 지방관들의 부적절한 태도를 지적하면서 규정 제정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후 각 조항에서 외국인의 통행증 단속을 포함하여 그들에 대한 대응의 표준 지침을 여러 측면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다. 이후 이 지침은 내륙에서 조선인과 외국인이 접촉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될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포괄적 핵심 규정으로 자리 잡았고, 뒤에 호조 단속의 지시를 내릴 때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 지침의 발표 이후 중앙에서는 외국인의 호조 휴대에 대한 검사를 엄격히 하도록 지방관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장 가시적인 조치는 매 달마다 지방관들에게 해당 지역을 지나간 외국인들의 호조 휴대 여부에 대해 정례적으로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보고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기가 뒤로 내려올수록 보고의 빈도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호조 관리 엄정화 방침은 규칙이 제정된 초기에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었지만 지방 관서의 호응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용 역시 실상과는 다르게 부실하고 ‘文具’에 그치고 있었다. 이렇게 중앙 정부가 단속 방침을 내려도 지방에 효과가 지속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도 청에 의한 내정간섭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외국인을 대하는 당시 조선 관민들의 태도와 자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상의 예를 통해 개항기 조선이 분명한 한계 속에서도 나름대로 외국인의 관리와 통제를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Japanese began to go to Korea after 1876 Korea-Japan Treaty. And they were allowed to reside within Seoul after February 1885, making their settlement. This increased Japanese activity, as well as their population in Korea. And Hojo(護照; VISA), ori...
Japanese began to go to Korea after 1876 Korea-Japan Treaty. And they were allowed to reside within Seoul after February 1885, making their settlement. This increased Japanese activity, as well as their population in Korea. And Hojo(護照; VISA), originally only issued to people in special types of occupation like diplomats, public officials and missionaries, became widely issued to ordinary foreigners during 1884~1885 as the commerce by them at the treaty ports in Korea flourished. This made the management of Hojo somewhat difficult, resulting in exposure for Japanese who were active in Korea without Hojo from about 1885~1886.
Meanwhile, Chinese merchants got the right to reside and run business in Seoul before Japanese, and they entered Korea at an alarming rate. Dispatch of Yuan Shihk"ai(袁世凱) to Korea in 1885, meaning intensification of the Chinese interference in domestic affairs of Korea, made more evils such as merchants who impersonated dispatch by Yuan Shihk"ai without Hojo. The punishment for not carrying Hojo was specified in treaties with foreign countries. But the political situation of interference by China seemed to make the crackdown on Chinese merchants difficult. And the officials and people of Korea feared foreigners, as well as the local governors were either hostile to or powerless for them. Thus the examination for carrying Hojo was not successfully performed.
The continuance of these situation, resulting in many cases of not carrying Hojo by Chinese and Japanese, made Korean government draw up guidelines of dealing with foreigners and issue them to local government offices. The meaning of drawing up guidelines was illuminated at the preface, with a comment on improper attitude of the local governors for foreigners. And the standard guidelines were mentioned minutely in many aspects including the crackdown on Hojo of foreigners at each articles. Henceforth, this guidelines planted themselves as the comprehensive and core regulation for coping with problems caused by the contact between Koreans and foreigners in inland areas of Korea, frequently mentioned in the directions by the government about examination on carrying Hojo afterwards.
Korean government began to urge the local governors to examine foreigners’ Hojo more strictly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se guidelines, and it was the most tangible step to order the local offices report to the government regularly on whether foreigners passing their areas carry Hojo or not. But the frequency of reports diminished evidently as time went by, implying the weakening of the local governors’ response to the policy of the government notwithstanding its effect in the early stage. And its contents were poor and had a big gap with the actual circumstances. These phenomena might be caused by the influence resulting from Chinese interference in domestic affairs of Korea, basically by the attitude of the officials and people of Korea for facing foreigners. But the above-mentioned guidelines and follow-up measures taken by the government shows the effort of Korea to manage and control foreigners despite obvious limit in late 19th century.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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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河元鎬, "韓國近代經濟史硏究" 신서원 1997
10 "雲養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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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이력
|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 2027 | 평가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 2021-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 2018-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15-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11-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9-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7-02-06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 ![]() |
| 2007-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 2005-09-29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 ![]() |
| 2004-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
| 2003-01-01 | 등재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 2001-07-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 2016 | 1.28 | 1.28 | 1.11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 0.97 | 0.89 | 2.254 | 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