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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대방 지역 진출과 영역화 과정 = The process of Koguryo's advance into the Daebang region and its territori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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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14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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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early 4th century, Koguryo had completely driven out the Chinese commanderies that had been on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fall of Gojoseon. Koguryo had already attacked the Nakrang area since the 1st century, and attempted to reach the Daebang area beyond the Daedong River at the end of the 3rd century. And finally, when King Micheon reigned, they absorbed the old land of Nakrang and Daebang commanderies into their territory. Previous studies have understood that Koguryo dominated the old land of Nakrang and Daebang commanderies in a similar way. However, there were many differences between Nakrang and Daebang areas, including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the process of being subjugated by Koguryo, and the way Koguryo ruled the two regions.
      With the advance of Koguryo, the Nakrang commandery was weakened relatively early, and the governing organization was disbanded. On the other hand, since its establishment by the Gongsun regime, the Daebang commandery restored the governing order, and until relatively late, the commandery system has remained smooth. This difference has also led to differences in the way Koguryo ruled after taking over the two commanderies. After Goguryeo advanced into the two regions, the Nakrang region was actively reorganized, while the Daebang region dominated by utilizing the existing base and governing order. The differences in cultural aspects appearing in the Nakrang area and the Daebang area can also be understood in relation to this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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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early 4th century, Koguryo had completely driven out the Chinese commanderies that had been on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fall of Gojoseon. Koguryo had already attacked the Nakrang area since the 1st century, and attempted to reach the Daeb...

      In the early 4th century, Koguryo had completely driven out the Chinese commanderies that had been on the Korean Peninsula since the fall of Gojoseon. Koguryo had already attacked the Nakrang area since the 1st century, and attempted to reach the Daebang area beyond the Daedong River at the end of the 3rd century. And finally, when King Micheon reigned, they absorbed the old land of Nakrang and Daebang commanderies into their territory. Previous studies have understood that Koguryo dominated the old land of Nakrang and Daebang commanderies in a similar way. However, there were many differences between Nakrang and Daebang areas, including the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the process of being subjugated by Koguryo, and the way Koguryo ruled the two regions.
      With the advance of Koguryo, the Nakrang commandery was weakened relatively early, and the governing organization was disbanded. On the other hand, since its establishment by the Gongsun regime, the Daebang commandery restored the governing order, and until relatively late, the commandery system has remained smooth. This difference has also led to differences in the way Koguryo ruled after taking over the two commanderies. After Goguryeo advanced into the two regions, the Nakrang region was actively reorganized, while the Daebang region dominated by utilizing the existing base and governing order. The differences in cultural aspects appearing in the Nakrang area and the Daebang area can also be understood in relation to this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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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4세기 초, 고조선 故地에 漢 군현이 처음 설치된 이래로 400여 년 동안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있었던 중국군현 세력은 고구려에 의해 요동의 바깥으로 완전히 축출되었다. 고구려는 이미 1세기 무렵부터 낙랑군 지역을 공략했으며, 3세기 말에는 대동강 너머의 대방군 지역까지 진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천왕대에 이르러 낙랑ㆍ대방군의 옛 땅을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해당지역을 지배한 방식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낙랑군과 대방군은 설치 배경에서부터 고구려에 의해 복속되는 과정, 이후의 지배방식에 이르w기까지 여러 차이가 있었다. 낙랑군은 비교적 일찍부터 고구려의 진출로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현의 통치조직도 와해되었다. 반면 대방군은 공손씨에의해 분치된 이후 군현의 질서를 상당히 회복하였고, 비교적 늦게까지 군현체제가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가 2군 고지를 지배하는 방식에도 차이를 가져왔다. 낙랑군 고지는 적극적인 재편이 시도되었다면, 대방군 고지에서는 새로운 통치 거점을 개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지배 질서를 용인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확인된다. 군현 축출 전후로 확인되는 낙랑군 지역과 대방군 지역 문화 양상의 차이도 이러한배경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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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세기 초, 고조선 故地에 漢 군현이 처음 설치된 이래로 400여 년 동안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있었던 중국군현 세력은 고구려에 의해 요동의 바깥으로 완전히 축출되었다. 고구려는 이미 1세기...

      4세기 초, 고조선 故地에 漢 군현이 처음 설치된 이래로 400여 년 동안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있었던 중국군현 세력은 고구려에 의해 요동의 바깥으로 완전히 축출되었다. 고구려는 이미 1세기 무렵부터 낙랑군 지역을 공략했으며, 3세기 말에는 대동강 너머의 대방군 지역까지 진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천왕대에 이르러 낙랑ㆍ대방군의 옛 땅을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해당지역을 지배한 방식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낙랑군과 대방군은 설치 배경에서부터 고구려에 의해 복속되는 과정, 이후의 지배방식에 이르w기까지 여러 차이가 있었다. 낙랑군은 비교적 일찍부터 고구려의 진출로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현의 통치조직도 와해되었다. 반면 대방군은 공손씨에의해 분치된 이후 군현의 질서를 상당히 회복하였고, 비교적 늦게까지 군현체제가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가 2군 고지를 지배하는 방식에도 차이를 가져왔다. 낙랑군 고지는 적극적인 재편이 시도되었다면, 대방군 고지에서는 새로운 통치 거점을 개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지배 질서를 용인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확인된다. 군현 축출 전후로 확인되는 낙랑군 지역과 대방군 지역 문화 양상의 차이도 이러한배경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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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三上次男, "樂浪郡社會の支配構造" 30 : 1964

      2 權五重, "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3 신광철,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관방체계와 남부전선의 변화" 한국고대학회 (35) : 189-224, 2011

      4 윤용구,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자료와 해석" 사계절 2014

      5 최창빈, "학계소식; 신원에서 고구려 시기의 큰 도시유적의 발견" 1985 (1985): 1985

      6 권오중, "요동왕국과 동아시아" 영남대학교출판부 2012

      7 권오중, "요동 공손씨정권의 대방군 설치와 그 의미" 대구사학회 105 : 109-136, 2011

      8 박노석, "서기 3세기 초의 고구려와 魏의 외교 관계" 24 : 2001

      9 리순진, "락랑구역일대의 고구려돌칸흙무덤에 대하여"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0 (1990): 1990

      10 박대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아연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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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윤용구,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자료와 해석" 사계절 2014

      5 최창빈, "학계소식; 신원에서 고구려 시기의 큰 도시유적의 발견" 1985 (1985): 1985

      6 권오중, "요동왕국과 동아시아" 영남대학교출판부 2012

      7 권오중, "요동 공손씨정권의 대방군 설치와 그 의미" 대구사학회 105 : 109-136, 2011

      8 박노석, "서기 3세기 초의 고구려와 魏의 외교 관계" 24 : 2001

      9 리순진, "락랑구역일대의 고구려돌칸흙무덤에 대하여"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0 (1990): 1990

      10 박대재,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아연출판부 2010

      11 장효정, "대동강 하류일대 고구려 적석총의 분포현황과 그 성격" 101 : 2003

      12 윤선태,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13 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14 안정준, "근초고왕과 석촌동고분군" 한성백제박물관 2016

      15 윤용구, "고대중국의 동이관(東夷觀)과 고구려 -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중심으로 -" 한국역사연구회 (55) : 61-100, 2005

      16 김현숙,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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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임기환,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한국고대사학회 34 : 145-158, 2004

      19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20 손영종,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21 김미경, "고구려 전기의 대외관계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22 權純弘,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학교 2019

      23 여호규, "고구려 國內城 지역의 건물유적과 都城의 공간구조" 한국고대사학회 (66) : 43-93, 2012

      24 안정준, "高句麗의 樂浪・帶方 故地 영역화 과정과 지배방식" 한국고대사학회 (69) : 125-169, 2013

      25 안정준, "高句麗의 樂浪ㆍ帶方郡 故地 지배 연구" 연세대학교 2016

      26 김미경, "高句麗의 樂浪ㆍ帶方地域 進出과 그 支配形態" 17 : 1996

      27 關野貞,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39 (39): 1928

      28 孔錫龜, "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書景文化社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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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5

      34 임기환, "韓國古代中世 地方制度의 諸問題" 집문당 2004

      35 "釋名"

      36 "資治通鑑"

      37 "說文解字"

      38 "續日本紀"

      39 윤용구,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 (9) -백제의 대외교섭-"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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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李賢惠,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1994

      42 "晉書"

      43 武田幸男, "德興里壁畵古墳被葬者の出自と經歷" 13 : 1989

      44 孔錫龜, "德興里 壁畵古墳의 主人公과 그 性格" 21 : 1990

      45 "後漢書"

      46 谷豊信, "平壤土城里発見の古式の高句麗瓦当について" 112 : 1990

      47 孔錫龜, "安岳 3號墳의 墨書銘에 대한 考察" 121 : 1988

      48 千寬宇, "古朝鮮史ㆍ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49 鳥居龍藏,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に就きて" 25 (25): 1914

      50 "三國志"

      51 "三國史記"

      52 이승호, "「毌丘儉紀功碑」의 해석과 高句麗·魏 전쟁의 재구성" 한국목간학회 (15) : 15-44, 2015

      53 林起煥, "4세기 고구려의 樂浪ㆍ帶方地域 경영" 147 : 1995

      54 여호규, "4세기 高句麗의 樂浪․帶方 경영과 中國系 亡命人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학회 (53) : 159-200, 2009

      55 김기섭, "4~5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백제의 외교정책" 백제문화연구소 (56) : 271-29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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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여호규, "3세기 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정책" 역사학회 (194) : 1-40, 2007

      59 吳舜濟, "2C 末~3C 中葉 高句麗의 遼東 進出에 對한 硏究 -公孫氏 政權을 중심으로-" 11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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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8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21-07-02 학회명변경 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Balhae -> Association of Koguryo Balhae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2-14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고구려연구 -> 고구려발해연구
      외국어명 : The Koguryo Yonku -> The KoguryoBalhae Yonku
      KCI등재후보
      2008-02-13 학회명변경 한글명 : 고구려연구회 -> 고구려발해학회
      영문명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 Institute of KoguryoBalhae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5-30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Institute of Koguryo Studies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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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8 0.78 0.93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 0.93 2.013 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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