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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세기 신라의 가야지역 지배와 가야유민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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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209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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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신라의 가야지역 지배 과정에서 가야유민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가야유민은 524~527년 사이에 신라가 금관국을 정복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지배세력은 아직 자치권을 유지했으나, 532년 仇亥王이 신라로 항복해 阿干支에 가까운 경위를 받았다. 금관국 내에서는 그의 친족이 구해의 식읍을 관리하고 지역세력과 신라의 관계를 조정했다. 일반 干層의 일부도 지방관의 업무에 협조했다. 금관국의 유민이 우대받은 배경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항복한 점 외에도 5세기 이후 양국의 우호관계와 신라의 영향력에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과 백제와의 긴장에 대응하기 위해 남변을 안정시키려 했던 정책도 작용했다.
      안라국에서는 친신라 세력과 가야 제국 및 백제, 왜와 연대하려는 세력이 대립했다. 후자는 560년경 신라의 안라국 정복으로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 관산성전투 후에 즉위한 대가야의 道設智王은 신라의 간섭을 거부하다가 562년 신라군의 정복으로 기존 嘉實王 세력과 함께 제거되었다. 반면 522년 異腦王과 신라 왕족 사이에 태어난 月光은 대가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신라가 안라국과 대가야에서 강압정책을 구사한 것은 이들이 신라의 압력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백제가 관산성전투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집중했고 고구려가 대내외 문제의 해결에 골몰했던 것도 그 배경이 되었다. 이 기회에 신라는 옛 가야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려 한 것이다.
      565년 신라는 大耶州를 설치하여 내지의 지역지배체제를 가야유민에게 적극적으로 이식했다. 阿良村(함안)에는 邏頭가, 휘하의 노함촌・칠토에는 道使가 파견되어 外位의 협조를 받아 통치했다. 6세기 후반~말에는 성산산성이 구축되어 군치의 역할을 했다. 이를 위한 물자동원은 대부분 낙동강 중상류에서 이루어졌지만, 인근 가야유민의 노역이 적지 않게 동원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적어도 591년까지 가야지역에서도 군・성(촌)이 편성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경쟁하기 위한 후방의 안전판을 마련했고, 가야지역에서 인적・물적 자원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야유민은 이제 신라의 공민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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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신라의 가야지역 지배 과정에서 가야유민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가야유민은 524~527년 사이에 신라가 금관국을 정복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지배세...

      본고는 신라의 가야지역 지배 과정에서 가야유민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가야유민은 524~527년 사이에 신라가 금관국을 정복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지배세력은 아직 자치권을 유지했으나, 532년 仇亥王이 신라로 항복해 阿干支에 가까운 경위를 받았다. 금관국 내에서는 그의 친족이 구해의 식읍을 관리하고 지역세력과 신라의 관계를 조정했다. 일반 干層의 일부도 지방관의 업무에 협조했다. 금관국의 유민이 우대받은 배경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항복한 점 외에도 5세기 이후 양국의 우호관계와 신라의 영향력에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과 백제와의 긴장에 대응하기 위해 남변을 안정시키려 했던 정책도 작용했다.
      안라국에서는 친신라 세력과 가야 제국 및 백제, 왜와 연대하려는 세력이 대립했다. 후자는 560년경 신라의 안라국 정복으로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 관산성전투 후에 즉위한 대가야의 道設智王은 신라의 간섭을 거부하다가 562년 신라군의 정복으로 기존 嘉實王 세력과 함께 제거되었다. 반면 522년 異腦王과 신라 왕족 사이에 태어난 月光은 대가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신라가 안라국과 대가야에서 강압정책을 구사한 것은 이들이 신라의 압력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백제가 관산성전투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집중했고 고구려가 대내외 문제의 해결에 골몰했던 것도 그 배경이 되었다. 이 기회에 신라는 옛 가야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려 한 것이다.
      565년 신라는 大耶州를 설치하여 내지의 지역지배체제를 가야유민에게 적극적으로 이식했다. 阿良村(함안)에는 邏頭가, 휘하의 노함촌・칠토에는 道使가 파견되어 外位의 협조를 받아 통치했다. 6세기 후반~말에는 성산산성이 구축되어 군치의 역할을 했다. 이를 위한 물자동원은 대부분 낙동강 중상류에서 이루어졌지만, 인근 가야유민의 노역이 적지 않게 동원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적어도 591년까지 가야지역에서도 군・성(촌)이 편성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경쟁하기 위한 후방의 안전판을 마련했고, 가야지역에서 인적・물적 자원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가야유민은 이제 신라의 공민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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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a rticle was written to investigate the role change of Gaya’s people in Silla’s domination of this region.
      When Geumgwan State collapsed between 524 and 527, the ruling forces still maintained their autonomy. King Guhae surrendered to Silla and was awarded Gyeongwi(京位) in 532. His relatives and common Gan(干)-class cooperated in the work of local official in the Geumgwan region. The reason why the ruling power of Geumgwan State were favored was that they voluntarily surrendered despite friendly relations with Silla since the 5th century. Silla’s efforts to cope with the tensions with Goguryeo and Baekje were also responsible.
      In Anra State, pro-Silla forces and pro-Gaya・Baekje・Wai(倭) ones were at odds with each other. The latter was removed in 560 when Silla conquered this state. In Daegaya(大加耶), which collapsed in 562, King Doseolji and the former King Gasil were removed. On the other hand, Wolgwang, who was born between King Inoi and Silla royalty, became a symbolic figure to appease the Daegaya people. Silla’s coercive policies in Anra State and Daegaya were made because these co untries resisted. This was also due to Baekje’s efforts to escape the shock of its defeat in the Battle of Guansan Castle and the fact that Goguryeo was bent on solving internal and external problems. On this occasion Silla a ttempted to dominate t he Gaya region strongly.
      Silla established Daeya Ju(州) to systematically control the people of Gaya in 565. Nadu(邏頭) was dispatched to Aryangchon(村), Dosa(道使) to Nohamchon and Chilto for ruling with the cooperation of Woewui(外位). Seongsan Fortress was constructed to become the center of Kun(郡) from the late 6th century to the end of that. Most of the supplies were requisitioned in the upper-middle reaches of the Nakdong River, but the labour force in the nearby Gaya region. In the end, Kun・Seong(城)(Chon村) were established in Gaya until 591. Silla secured a safety zone in the rear to compete with Baekje and Goguryeo, and gaineds table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in the Gaya region. The Gaya people changed into the citizen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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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a rticle was written to investigate the role change of Gaya’s people in Silla’s domination of this region. When Geumgwan State collapsed between 524 and 527, the ruling forces still maintained their autonomy. King Guhae surrendered to Sill...

      This a rticle was written to investigate the role change of Gaya’s people in Silla’s domination of this region.
      When Geumgwan State collapsed between 524 and 527, the ruling forces still maintained their autonomy. King Guhae surrendered to Silla and was awarded Gyeongwi(京位) in 532. His relatives and common Gan(干)-class cooperated in the work of local official in the Geumgwan region. The reason why the ruling power of Geumgwan State were favored was that they voluntarily surrendered despite friendly relations with Silla since the 5th century. Silla’s efforts to cope with the tensions with Goguryeo and Baekje were also responsible.
      In Anra State, pro-Silla forces and pro-Gaya・Baekje・Wai(倭) ones were at odds with each other. The latter was removed in 560 when Silla conquered this state. In Daegaya(大加耶), which collapsed in 562, King Doseolji and the former King Gasil were removed. On the other hand, Wolgwang, who was born between King Inoi and Silla royalty, became a symbolic figure to appease the Daegaya people. Silla’s coercive policies in Anra State and Daegaya were made because these co untries resisted. This was also due to Baekje’s efforts to escape the shock of its defeat in the Battle of Guansan Castle and the fact that Goguryeo was bent on solving internal and external problems. On this occasion Silla a ttempted to dominate t he Gaya region strongly.
      Silla established Daeya Ju(州) to systematically control the people of Gaya in 565. Nadu(邏頭) was dispatched to Aryangchon(村), Dosa(道使) to Nohamchon and Chilto for ruling with the cooperation of Woewui(外位). Seongsan Fortress was constructed to become the center of Kun(郡) from the late 6th century to the end of that. Most of the supplies were requisitioned in the upper-middle reaches of the Nakdong River, but the labour force in the nearby Gaya region. In the end, Kun・Seong(城)(Chon村) were established in Gaya until 591. Silla secured a safety zone in the rear to compete with Baekje and Goguryeo, and gaineds table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in the Gaya region. The Gaya people changed into the citizen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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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금관국 유민의 부상 배경과 역할
      • Ⅲ. 안라국·대가야 유민의 동향과 신라의 정책
      • Ⅳ. 가야유민에 대한 지배체제 편성의 의미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금관국 유민의 부상 배경과 역할
      • Ⅲ. 안라국·대가야 유민의 동향과 신라의 정책
      • Ⅳ. 가야유민에 대한 지배체제 편성의 의미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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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천관우, "「복원가야사」下" (봄) : 1978

      2 윤선태, "함안 성산산성 출토 신라목간의 용도" 88 : 1999

      3 주보돈,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기초적 검토" 19 : 2000

      4 윤상덕, "함안 성산산성 축조연대에 대하여" 한국목간학회 (14) : 75-96, 2015

      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성산산성 Ⅵ-17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7

      6 함안군, "함안 남문외고분군 11호분" 2017

      7 경남문화재연구원, "함안 군북 소포리유적" 2016

      8 이성시, "한국목간연구의 현황과 함안성산산성출토의 목간" 19 : 2000

      9 이용현, "한국목간기초연구" 신서원 2006

      10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85

      1 천관우, "「복원가야사」下" (봄) : 1978

      2 윤선태, "함안 성산산성 출토 신라목간의 용도" 88 : 1999

      3 주보돈,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기초적 검토" 19 : 2000

      4 윤상덕, "함안 성산산성 축조연대에 대하여" 한국목간학회 (14) : 75-96, 2015

      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성산산성 Ⅵ-17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7

      6 함안군, "함안 남문외고분군 11호분" 2017

      7 경남문화재연구원, "함안 군북 소포리유적" 2016

      8 이성시, "한국목간연구의 현황과 함안성산산성출토의 목간" 19 : 2000

      9 이용현, "한국목간기초연구" 신서원 2006

      10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85

      11 조효식, "한국 고대사속의 창녕"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09

      12 선석열, "한국 고대사 속의가야" 혜안 2001

      13 조효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14 정동락, "필사본 『花郞世紀』를 통해 본 대가야의 멸망과 王室 世系" 한국고대사탐구학회 (9) : 5-42, 2011

      15 대가야박물관, "최초의 대가야 왕릉" 2009

      16 주보돈,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 2006

      17 백승충, "안라의 이나사・마도에 대한 검토" 2 : 1996

      18 남재우, "안라국사" 혜안 2003

      19 이부오, "신라초기 기년문제에 대한 재고찰" 13 : 1999

      20 이희준, "신라의 가야 복속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25 : 1999

      21 박남수, "신라 법흥왕대 ‘及伐尺’과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役法’" 신라사학회 (40) : 29-82, 2017

      22 이경섭, "신라 목간의 세계" 경인문화사 2013

      23 박성현, "신라 郡縣 중심지의 공간 구조와 地方官衙의 위치-尙·良·康州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59) : 203-252, 2010

      24 하승철, "소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경상대학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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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002

      27 경북문화재연구원, "대가야역사관 신축부지내 고령지산동고분군-본문Ⅱ 횡혈(구)식석실묘-" 2000

      28 오재진, "대가야권 석실묘 연구" 경상대학교 2016

      29 이희준, "대가야고고학연구" 사회평론 2017

      30 신가영,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加耶叛’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72) : 153-190, 2013

      31 주보돈, "남산신성의 축조와 남산신성비" 10・11합 : 1994

      32 이주헌, "남문외고분군 역사적 가치와 의미" 창원대 경남학연구센터 2020

      33 경성대학교박물관, "김해칠산동고분군" 1989

      34 경상문화재연구원, "김해 원지리고분군 3호분" 2019

      35 가야문물연구원, "김해 원지리고분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문화재 정밀발굴조사약식보고서" 2019

      36 이희준, "김해 예안리 유적과 신라의 낙동강 서안 진출" 39 : 1998

      37 대성동고분박물관, "김해 대성동고분군-73호분~84호분-" 2013

      38 조범환, "김유신의 가계와 후손들의 활동-‘가야계 출신이어서 가지는 한계’의학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11 : 2007

      39 조성원, "금관가야 후기의 고총고분" 김해시・경남연구원 2020

      40 조성원, "금관가야 고고학의 연구성과와 흐름" 한국고대사학회 (94) : 49-8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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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이문기, "고령문화사대계 1(역사편)" 고령군대가야박물관 경북대퇴계연구소 2008

      43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출판사 1999

      44 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45 주보돈, "가야사 새로 읽기" 주류성 2017

      46 주보돈, "가야멸망문제에 대한 일고찰" 4 : 1982

      47 가야고분세계유산등재추진단, "가야고분군" 2018

      48 이형기, "滅亡 이후 大加耶 遺民의 向方 -東海市 湫岩洞古墳群 出土品을 중심으로-" 한국상고사학회 38 : 97-1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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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田中俊明, "大加耶聯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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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이영호, "大伽倻 멸망과 高靈地域의 변화" 퇴계연구소 (42) : 53-9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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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이경섭, "咸安 城山山城 木簡의 硏究現況과 課題" 신라문화연구소 (23) : 205-2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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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부산대학교박물관, "『김해예안리고분군』 Ⅱ" 1993

      64 김태식, "『가야사사료집성』제1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4

      65 하승철, "『가야고분군』Ⅰ-Vol2-" 가야고분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18

      66 노중국, "6세기 전반 대가야의 왕위 교체와 정책의 변화" 한국고대사학회 (66) : 253-28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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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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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 0.5 0.4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1 0.58 0.981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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