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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전쟁기 명사(明使)에 대한 외교의례 전개 양상 = The Diplomatic Rituals for the Envoys of Ming Dynasty during the Imji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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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oseon Dynasty in the diplomatic ritual system by analyzing the rituals of the welcoming envoys and diplomatic documents of Ming Dynasty during the Imjin War.
      First, that is noteworthy during this period is the change ritual places of diplomatic rituals for the envoys of the Ming Dynasty. King Seonjo left the capital on April 30, 1592 and moved to temporary palaces in the northwestern region for a year and a half before returning to Seoul in October 1593. Because the palaces were destroyed, a mansion of a royal family in Jeongneung-dong was used as a formal palace after returning to Hanyang. In addition, in Seogyo, King Seonjo with Joseon officials held a ceremony to greet diplomatic documents brought by envoys of Haengin position, officers of Liaodong dousi of the Ming Dynasty and envoys of Joseon who returned from China. Taepyeong-gwan inside Sungnyemun is the place where envoys of the Ming Dynasty stayed.
      Since King Seonjo held diplomatic rituals for Ming envoy Seol Beon and his group in Uiju, and he held a ceremony to greet diplomatic documents in the Mohwagwan of Seogyo area, after returning to Hanyang. King Seonjo proceeded the king's dancing procedure from the ritual of banquet as it was, even though his officials insisted on getting rid of it. But he ordered not to give flower himself in the ritual and to reduce gifts for the envoys in the ceremony of giving banquets to envoys.
      In 1593, Sa Yong-jae and Seo Il-gwan dispatched from Ming Dynasty for negotiations with Japan, repatriated prince Imhae-gun and Sunhwa-gun, who were detained in Japanese campsite. In April 1595, the Ming envoys came to Joseon to proclaim Toyotomi Hideyoshi, as a Japanese King. At this time, King Seonjo had to held a ceremony for Yongjeol, an emblem of the Ming emperor at Nambyulgung Palace and gave a banquet to the Ming envoys. Meanwhile, the envoy of the Ming Dynasty escaped from the Japanese campsite, leaving the vice envoy behind, and unexpected diplomatic issues occurred in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Joseon Dynasty conducted diplomatic rituals in the same procedure for the diplomatic documents brought by an official of Liaodong dousi and Joseon envoys who visited Ming. King Seonjo welcomed the Myeonbok sent again by the Ming emperor, at seogyo in February 1602.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circumstances of King Seonjo wearing Gonryongpo and Ikseongwan instead of Myeonbok for national rituals during the Imjin War. The crown prince Gwanghae-gun could not participate in diplomatic ceremonies because Ming Dynasty did not approve him at this time, a situation that was quite different from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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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oseon Dynasty in the diplomatic ritual system by analyzing the rituals of the welcoming envoys and diplomatic documents of Ming Dynasty during the Imjin War. First, that is ...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Ming and Joseon Dynasty in the diplomatic ritual system by analyzing the rituals of the welcoming envoys and diplomatic documents of Ming Dynasty during the Imjin War.
      First, that is noteworthy during this period is the change ritual places of diplomatic rituals for the envoys of the Ming Dynasty. King Seonjo left the capital on April 30, 1592 and moved to temporary palaces in the northwestern region for a year and a half before returning to Seoul in October 1593. Because the palaces were destroyed, a mansion of a royal family in Jeongneung-dong was used as a formal palace after returning to Hanyang. In addition, in Seogyo, King Seonjo with Joseon officials held a ceremony to greet diplomatic documents brought by envoys of Haengin position, officers of Liaodong dousi of the Ming Dynasty and envoys of Joseon who returned from China. Taepyeong-gwan inside Sungnyemun is the place where envoys of the Ming Dynasty stayed.
      Since King Seonjo held diplomatic rituals for Ming envoy Seol Beon and his group in Uiju, and he held a ceremony to greet diplomatic documents in the Mohwagwan of Seogyo area, after returning to Hanyang. King Seonjo proceeded the king's dancing procedure from the ritual of banquet as it was, even though his officials insisted on getting rid of it. But he ordered not to give flower himself in the ritual and to reduce gifts for the envoys in the ceremony of giving banquets to envoys.
      In 1593, Sa Yong-jae and Seo Il-gwan dispatched from Ming Dynasty for negotiations with Japan, repatriated prince Imhae-gun and Sunhwa-gun, who were detained in Japanese campsite. In April 1595, the Ming envoys came to Joseon to proclaim Toyotomi Hideyoshi, as a Japanese King. At this time, King Seonjo had to held a ceremony for Yongjeol, an emblem of the Ming emperor at Nambyulgung Palace and gave a banquet to the Ming envoys. Meanwhile, the envoy of the Ming Dynasty escaped from the Japanese campsite, leaving the vice envoy behind, and unexpected diplomatic issues occurred in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Joseon Dynasty conducted diplomatic rituals in the same procedure for the diplomatic documents brought by an official of Liaodong dousi and Joseon envoys who visited Ming. King Seonjo welcomed the Myeonbok sent again by the Ming emperor, at seogyo in February 1602.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circumstances of King Seonjo wearing Gonryongpo and Ikseongwan instead of Myeonbok for national rituals during the Imjin War. The crown prince Gwanghae-gun could not participate in diplomatic ceremonies because Ming Dynasty did not approve him at this time, a situation that was quite different from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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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문에서는 임진전쟁기 명 황제의 조서와 칙서를 영접하는 의례와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을 조선에서 접대하는 의례 양상을 분석하여 외교 의례 시스템 속에서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임진전쟁기는 선조의 몽진과 궁궐의 화재로 인해 외교 의례 공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 의례의 장소는 왕이 이어(移御)한 행재소나 시어소에서 진행되었고, 태평관도 그 규모가 축소되어 연례도 온전하게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조가 1592년 4월 30일 도성을 떠나 1593년 10월 환도하기 전까지 거의 1년 6개월을 개성, 평양, 숙천, 안주, 영변, 의주 등 서북로 행재소에서 이어하였다. 그중 의주에서 6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18일 회환까지 약 7개월을 체류하며 의주부 용만관 취승당을 왕의 행재소로 삼았고, 의순관을 명사의 임시관소로 마련하여 영접하였다. 환도 후에는 궁실이 소실되어 황화방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시어소로 삼았기에 기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펼쳐지던 때와 달리 영·조칙례도 변통을 둘 수밖에 없었다.
      임진전쟁기 명나라에서는 한림원 출신보다는 전쟁 시를 감안하여 주로 행인사 행인 출신의 관원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1592년 6월 명군을 조선에 보내 구원한다는 조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설번과 1593년 10월 선조가 환도한 것에 대해 위로하는 칙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사헌의 사례이다. 또한 병부주사, 요동도사 및 차관을 파견하거나 명에 사행 갔던 조선 사신이 외교문서를 재래해 오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당시는 물력이 고갈되어 평양 이서에 원접사가 없어 사신 접대가 대부분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진전쟁기에는 모화관 영조의식에서 공용경이 1537년 사신으로 왔을 때 새로 추가하게 한 국왕이 용정 앞에서 행하는 오배삼고두례와 1582년 정전에서 행하는 영조의식에서 추가된 조서 선포 시에 국왕이 친히 향을 세 번 올리는 의주가 더욱 고착화된다.
      명이 일본과 강화를 추진하면서 1593년 명에서 파견한 강화사 사용재와 서일관이 왜성에 억류된 임해군과 순화군을 송환하게 하였고, 1594년 4월 만력제가 일본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기 위한 봉왜책사로 이종성과 양방형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선조는 봉왜책사가 가져온 황제 의장인 용절을 영조문에 나가 맞이하였다. 강화가 장기화되고 책봉사절의 조선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거느린 8백여 명의 병사와 마필을 먹이는 문제도 조선에 적지 않은 재정 부담을 주었다. 더구나 책봉 정사가 왜영에서 탈출해 오거나 조선의 근수배신을 동행시키는 등 매우 이례적 상황 속에 외교의례 논의와 조정의 대처가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강화협상이 무산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선조는 요동도사의 차관이 가져온 칙서에 대해서도 명사와 동일하게 외교의례를 진행하였다. 이후 1599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퇴각한 후 사은사 한응인을 통해 만력제가 칙서와 함께 망의와 채단 등 예물을 내리자 이에 대한 사은 망궐례와 영칙례를 시어소에서 행하였다. 1599년 7월 왕세자 광해군의 경우 명에서 책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표례와 등황조서를 맞을 때 의례에 참여시키지 않았는데, 이전 전란 중에는 왕세자를 외교 의례에 참여시켰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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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는 임진전쟁기 명 황제의 조서와 칙서를 영접하는 의례와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을 조선에서 접대하는 의례 양상을 분석하여 외교 의례 시스템 속에서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목...

      본문에서는 임진전쟁기 명 황제의 조서와 칙서를 영접하는 의례와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을 조선에서 접대하는 의례 양상을 분석하여 외교 의례 시스템 속에서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임진전쟁기는 선조의 몽진과 궁궐의 화재로 인해 외교 의례 공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 의례의 장소는 왕이 이어(移御)한 행재소나 시어소에서 진행되었고, 태평관도 그 규모가 축소되어 연례도 온전하게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조가 1592년 4월 30일 도성을 떠나 1593년 10월 환도하기 전까지 거의 1년 6개월을 개성, 평양, 숙천, 안주, 영변, 의주 등 서북로 행재소에서 이어하였다. 그중 의주에서 6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18일 회환까지 약 7개월을 체류하며 의주부 용만관 취승당을 왕의 행재소로 삼았고, 의순관을 명사의 임시관소로 마련하여 영접하였다. 환도 후에는 궁실이 소실되어 황화방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시어소로 삼았기에 기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펼쳐지던 때와 달리 영·조칙례도 변통을 둘 수밖에 없었다.
      임진전쟁기 명나라에서는 한림원 출신보다는 전쟁 시를 감안하여 주로 행인사 행인 출신의 관원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1592년 6월 명군을 조선에 보내 구원한다는 조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설번과 1593년 10월 선조가 환도한 것에 대해 위로하는 칙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사헌의 사례이다. 또한 병부주사, 요동도사 및 차관을 파견하거나 명에 사행 갔던 조선 사신이 외교문서를 재래해 오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당시는 물력이 고갈되어 평양 이서에 원접사가 없어 사신 접대가 대부분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진전쟁기에는 모화관 영조의식에서 공용경이 1537년 사신으로 왔을 때 새로 추가하게 한 국왕이 용정 앞에서 행하는 오배삼고두례와 1582년 정전에서 행하는 영조의식에서 추가된 조서 선포 시에 국왕이 친히 향을 세 번 올리는 의주가 더욱 고착화된다.
      명이 일본과 강화를 추진하면서 1593년 명에서 파견한 강화사 사용재와 서일관이 왜성에 억류된 임해군과 순화군을 송환하게 하였고, 1594년 4월 만력제가 일본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기 위한 봉왜책사로 이종성과 양방형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선조는 봉왜책사가 가져온 황제 의장인 용절을 영조문에 나가 맞이하였다. 강화가 장기화되고 책봉사절의 조선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거느린 8백여 명의 병사와 마필을 먹이는 문제도 조선에 적지 않은 재정 부담을 주었다. 더구나 책봉 정사가 왜영에서 탈출해 오거나 조선의 근수배신을 동행시키는 등 매우 이례적 상황 속에 외교의례 논의와 조정의 대처가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강화협상이 무산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선조는 요동도사의 차관이 가져온 칙서에 대해서도 명사와 동일하게 외교의례를 진행하였다. 이후 1599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퇴각한 후 사은사 한응인을 통해 만력제가 칙서와 함께 망의와 채단 등 예물을 내리자 이에 대한 사은 망궐례와 영칙례를 시어소에서 행하였다. 1599년 7월 왕세자 광해군의 경우 명에서 책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표례와 등황조서를 맞을 때 의례에 참여시키지 않았는데, 이전 전란 중에는 왕세자를 외교 의례에 참여시켰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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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규철, "특집 : 조선 성종대 외교의례 변경에 대한 논의와 대명의식" 한국역사연구회 (98) : 169-197, 2015

      2 김선희, "조선의 행궁: 국왕의 행차를 중심으로" 9 : 132-136, 2016

      3 "조선왕조실록"

      4 서동천, "조선시대 태평관과 동평관의 특징: 문헌사료의 분석을 중심으로" 51 : 593-596, 2007

      5 김경록, "조선시대 서울의 외교활동 공간" 서울학연구소 (31) : 1-46, 2008

      6 안주혁, "조선 전기 明使의 사행과 迎詔勅 의례의 明禮 수용" 성균관대학교 2015

      7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의 결렬 원인에 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원 (87) : 323-358, 2014

      8 정은주, "임진전쟁기 明 將官에 대한 接待都監 운영 양상" 명청사학회 (57) : 203-270, 2022

      9 "연려실기술 권15"

      1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1 이규철, "특집 : 조선 성종대 외교의례 변경에 대한 논의와 대명의식" 한국역사연구회 (98) : 169-197, 2015

      2 김선희, "조선의 행궁: 국왕의 행차를 중심으로" 9 : 132-136, 2016

      3 "조선왕조실록"

      4 서동천, "조선시대 태평관과 동평관의 특징: 문헌사료의 분석을 중심으로" 51 : 593-596, 2007

      5 김경록, "조선시대 서울의 외교활동 공간" 서울학연구소 (31) : 1-46, 2008

      6 안주혁, "조선 전기 明使의 사행과 迎詔勅 의례의 明禮 수용" 성균관대학교 2015

      7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의 결렬 원인에 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원 (87) : 323-358, 2014

      8 정은주, "임진전쟁기 明 將官에 대한 接待都監 운영 양상" 명청사학회 (57) : 203-270, 2022

      9 "연려실기술 권15"

      1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11 김한규, "사조선록 역주 3" 소명출판사 2012

      12 "通文館志 권4"

      13 大庭脩, "豊臣秀吉を日本国王に封ずる誥命について: わが国に現存する明代の誥勅" 4 : 29-77, 1971

      14 "經國大典 권3"

      15 유바다, "朝鮮 初期 迎詔勅 관련 儀註의 성립과 朝明關係" 한국역사민속학회 (40) : 123-160, 2012

      16 "明神宗實錄"

      17 김문식, "明使 龔用卿이 경험한 외교의례" 조선시대사학회 (73) : 195-228, 2015

      18 高艳林, "明代中朝使臣往来硏究" (5) : 69-76, 2005

      19 成俔, "慵齋叢話 권1"

      20 한형주, "對明儀禮를 통해 본 15세기 朝-明관계" 한국역사민속학회 (28) : 39-75, 2008

      21 윤정, "宣祖후반~광해군 초반 궁궐 경영과 ‘慶運宮’의 수립" 서울학연구소 (42) : 259-299, 2011

      22 김성준, "宗學에 대하여" 26 : 3-20, 1966

      23 "大東野乘 권55"

      24 "大東地志"

      25 "大明會典 권60"

      26 정정남, "壬辰倭亂 이후 南別宮의 公廨的 역할과 그 공간 활용 - 장서각 소장 『소공동홍고양가도형』․『사대부가배치도형』의 분석을 통하여 -" 한국건축역사학회 18 (18): 43-62, 2009

      27 "國朝喪禮補編"

      28 "國朝五禮儀序例"

      29 "國朝五禮儀"

      30 "典錄通考"

      31 "儐禮總覽 권1"

      32 "儐禮總攬 권2"

      33 龔用卿, "使朝鮮錄"

      34 "中國正史朝鮮傳 역주4" 국사편찬위원회 1990

      35 장지연, "15세기 漢城의 使臣 客館 형성과 그 의미" 서울역사편찬원 (104) : 7-3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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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3-01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정신문화연구 -> 한국학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7-03-07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Academy of Korean ->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7-07 학술지등록 한글명 : 정신문화연구
      외국어명 : Korean Studies Quarterl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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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1 0.71 0.7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9 0.82 1.267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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