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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農巖 金昌協과 抱川 = Nongam Kim Chang Hyeop and Po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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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농암 김창협의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포천에 대한 관심 을 제고하는데 주목하였다. 농암은 40세부터 50세 초반까지 출처를 수없이 거 듭하였다. 물론 그의 출처는 정국의 변화에 따른 농암 일가의 부침에 의한 것 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바도 많다. 29세 때 영평(포천의 옛이름)의 응암에 은 거하면서 지은 <은구암기>는 자신의 출처에 대한 변론이라 할 수 있다. 농암은 군자의 일에서 출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 타당함이 있 다고 하였다. 그리고 출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를 얻어 그것에 따라 출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군자가 때를 얻지 못하여 물러나 은거 해 있으면 뜻을 몸에서 얻어 스스로 지킬 줄[處守] 알아야 하고, 때를 얻어 나 아가 벼슬하면 도를 이루어 만물에 미치게 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는 일 [出爲]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요직에 제수되었음에도 사직소를 올려 영평에 은거하였음은 그 실증적 사례이다. 농암 일가는 포천과 연고가 많다. 농암의 백부 김수증, 부친 김수항, 농암의 6형제가 모두 영 평에 은거하거나 빈번히 내왕하였다. 농암은 25세 때부터 58 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영평에서 은거하거나 내왕하였다. 농암 일가에서 처 음으로 영평에 인연을 맺은 인물은 농암의 백부 김수증이다. 부친 김수항은 영 평에 송로암을 짓고 은거하였다. 농암은 29세(1679)에 영평 응암에 은구암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응암과 경제에 거처하면서 출처를 거듭하였다. 농암이 응암을 다시 찾은 것은 10년 뒤인 39세 때이다.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진도에서 사사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에 정착하였다. 42세(1692) 2월 응암의 옛집 동 쪽에 농암서실을 지었다. 속칭 ‘롱암(籠巖)’이라 전하던 것을 “평생 농사일에 몸 을 던지겠다”는 뜻을 담아 ‘농암(農巖)’으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2년 뒤에는 청령뢰 위에 정자를 지었다. 농암은 여러 글에서 피력하였 듯이 농암려사에서 목숨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7세(1697) 때 경제에 사 는 모친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서 삼주에 거처를 정하고 농암을 떠났다. 이후에 도 7,8년간 매년 봄가을에 자제와 문생들을 이끌고 농암려사를 찾았다. 농암이 포천에 연고를 정하여 살았던 기간은 거의 20년이 된다. 그가 한성 과 삼주에 살면서도 포천의 농암을 자주 찾았음은 그의 말대로 영원한 안식처 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농암과 포천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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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농암 김창협의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포천에 대한 관심 을 제고하는데 주목하였다. 농암은 40세부터 50세 초반까지 출처를 수없이 거 듭하였다. 물론 그의 출처는 정국의...

      본고는 농암 김창협의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포천에 대한 관심 을 제고하는데 주목하였다. 농암은 40세부터 50세 초반까지 출처를 수없이 거 듭하였다. 물론 그의 출처는 정국의 변화에 따른 농암 일가의 부침에 의한 것 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바도 많다. 29세 때 영평(포천의 옛이름)의 응암에 은 거하면서 지은 <은구암기>는 자신의 출처에 대한 변론이라 할 수 있다. 농암은 군자의 일에서 출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 타당함이 있 다고 하였다. 그리고 출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를 얻어 그것에 따라 출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군자가 때를 얻지 못하여 물러나 은거 해 있으면 뜻을 몸에서 얻어 스스로 지킬 줄[處守] 알아야 하고, 때를 얻어 나 아가 벼슬하면 도를 이루어 만물에 미치게 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는 일 [出爲]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여러 요직에 제수되었음에도 사직소를 올려 영평에 은거하였음은 그 실증적 사례이다. 농암 일가는 포천과 연고가 많다. 농암의 백부 김수증, 부친 김수항, 농암의 6형제가 모두 영 평에 은거하거나 빈번히 내왕하였다. 농암은 25세 때부터 58 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영평에서 은거하거나 내왕하였다. 농암 일가에서 처 음으로 영평에 인연을 맺은 인물은 농암의 백부 김수증이다. 부친 김수항은 영 평에 송로암을 짓고 은거하였다. 농암은 29세(1679)에 영평 응암에 은구암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후 응암과 경제에 거처하면서 출처를 거듭하였다. 농암이 응암을 다시 찾은 것은 10년 뒤인 39세 때이다.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진도에서 사사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에 정착하였다. 42세(1692) 2월 응암의 옛집 동 쪽에 농암서실을 지었다. 속칭 ‘롱암(籠巖)’이라 전하던 것을 “평생 농사일에 몸 을 던지겠다”는 뜻을 담아 ‘농암(農巖)’으로 고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2년 뒤에는 청령뢰 위에 정자를 지었다. 농암은 여러 글에서 피력하였 듯이 농암려사에서 목숨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7세(1697) 때 경제에 사 는 모친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서 삼주에 거처를 정하고 농암을 떠났다. 이후에 도 7,8년간 매년 봄가을에 자제와 문생들을 이끌고 농암려사를 찾았다. 농암이 포천에 연고를 정하여 살았던 기간은 거의 20년이 된다. 그가 한성 과 삼주에 살면서도 포천의 농암을 자주 찾았음은 그의 말대로 영원한 안식처 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농암과 포천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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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Ⅰ. 서언
      • Ⅱ. 농암 김창협의 처세관과 산수벽(山水癖)
      • Ⅲ. 농암 김창협과 포천
      • Ⅳ. 결언
      • 국문요약
      • Ⅰ. 서언
      • Ⅱ. 농암 김창협의 처세관과 산수벽(山水癖)
      • Ⅲ. 농암 김창협과 포천
      • Ⅳ. 결언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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