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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와 싯사이(三輪執齋)를 통해본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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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과제는 중국에서 탄생한 주자학과 양명학이 일본에 건너가 어떻게 변용·전개되었는가를 다룬다. 주지하듯이 주자학과 양명학은 중국 유교의 정점을 이루면서도 그 시각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유교사상의 다양한 전개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주제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변용되어 가는 과정 및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양학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볼 수 있고, 이는 양학의 외연을 확대하여 그것이 갖고 있는 특징을 더욱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테마라고 생각된다. 다만 본 ‘시간강사지원사업’의 기간이 1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전모를 고찰하기 위한 일환으로 우선 미와 싯사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양학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초기 열렬한 주자학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후에 양명학에로 전향하여 쇠퇴해가던 양명학을 중흥시키고 그 보급에 진력했던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왜 그는 ‘기몬’이라는 안전한 외피를 벗어버리고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양명학에로 돌아섰는가. 주자학의 어떤 점에 부족을 느꼈고, 양명학의 어떤 점이 그를 매료시켰는가. 이 점을 상세히 연구함으로써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사상적 윤곽이 드러나면, 이제 중국의 주자학·양명학과 비교하면서 양학의 일본적 특징을 도출해낸다. 앞으로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거친 후에 명확히 말할 수 있겠으나, 현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싯사이가 양명학에로 전향한 이유는 일본 주자학은 실천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의 기몬주자학은 극심한 ‘주지주의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역행’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고 싯사이는 이 점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또한 싯사이의 양명학은 중국 양명후학의 여러 형태가 함께 보이면서도 ‘공부’를 매우 중시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공부를 강조하면서 ‘지리’함을 보이던 주자학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간이’를 주장했던 양명학에로 전향한 그는, 물론 양명학내에서이긴 하지만 다시 공부를 강조하는 양명학을 제창한다. 양명학의 간이성을 극단까지 밀고나갔던 왕용계를 통해 입문했으면서도 그 대척점에 있던 학풍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일까. 그것이 단지 그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하는 것일까? 본 과제에서는 미와 싯사이의 사상 자체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 속에서 그 단서를 찾고자 한다.
      미와 싯사이의 사상은 ‘격물설’과 ‘지행관’을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젊었을 때 몸담았던 기몬학파의 학문적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싯사이의 스승 사토 나오카타는 “인의예지는 인간이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리이다. 배우는 자들이 이 리를 깨우칠 수 있는 까닭은 지와 행에 있다.”(『王學辨集序』)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기몬삼걸 중의 한 명인 미야케 쇼사이(三宅尙齋, 1662-1741) 역시 “학문의 도는 지와 행의 양단에 있을 뿐”임을 역설하고 있다. 싯사이 역시 “참으로 중요하도다 격물학이여! 이 문에 의하지 않고서 어디로부터 덕에 들어간단 말인가.”(『格物辨議』和文自序)라고 ‘격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본 과제는 싯사이의 ‘격물설’과 ‘지행관’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분석한다.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특징이 드러나게 되면, 이제 그것을 당시 일본의 풍토(정치, 사회 구조)와 연계하여,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게 된 원인을 고찰한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비교하여 현저히 다른 정치·사회 구조를 갖고 있었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으로, 무관인 쇼군과 그의 휘하에 있는 사무라이가 다스리는 통치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교는 본래 문신 지배하의 중국문화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사상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조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혀 이질적인 풍토의 일본에 건너와서도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막부 통치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변용의 결과였을까? 무신정권하의 일본에서 유교적 이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둘째,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 특히 주희가 활약하던 송대 이후로는 필기시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대다수 관료는 이 시험을 통해 위정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데 과거제가 없던 일본은 사무라이가 세습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기와 치인을 양 축으로 수립됐던 유교는 이제 ‘치인’ 즉 위정이라는 한 축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본래 위정의 학문으로 제창된 유교가, 위정의 길이 차단된 일본 풍토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가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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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과제는 중국에서 탄생한 주자학과 양명학이 일본에 건너가 어떻게 변용·전개되었는가를 다룬다. 주지하듯이 주자학과 양명학은 중국 유교의 정점을 이루면서도 그 시각에 적지 않은 차...

      본 과제는 중국에서 탄생한 주자학과 양명학이 일본에 건너가 어떻게 변용·전개되었는가를 다룬다. 주지하듯이 주자학과 양명학은 중국 유교의 정점을 이루면서도 그 시각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유교사상의 다양한 전개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주제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변용되어 가는 과정 및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양학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볼 수 있고, 이는 양학의 외연을 확대하여 그것이 갖고 있는 특징을 더욱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테마라고 생각된다. 다만 본 ‘시간강사지원사업’의 기간이 1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전모를 고찰하기 위한 일환으로 우선 미와 싯사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양학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초기 열렬한 주자학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후에 양명학에로 전향하여 쇠퇴해가던 양명학을 중흥시키고 그 보급에 진력했던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왜 그는 ‘기몬’이라는 안전한 외피를 벗어버리고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양명학에로 돌아섰는가. 주자학의 어떤 점에 부족을 느꼈고, 양명학의 어떤 점이 그를 매료시켰는가. 이 점을 상세히 연구함으로써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사상적 윤곽이 드러나면, 이제 중국의 주자학·양명학과 비교하면서 양학의 일본적 특징을 도출해낸다. 앞으로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거친 후에 명확히 말할 수 있겠으나, 현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싯사이가 양명학에로 전향한 이유는 일본 주자학은 실천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의 기몬주자학은 극심한 ‘주지주의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역행’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고 싯사이는 이 점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또한 싯사이의 양명학은 중국 양명후학의 여러 형태가 함께 보이면서도 ‘공부’를 매우 중시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공부를 강조하면서 ‘지리’함을 보이던 주자학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간이’를 주장했던 양명학에로 전향한 그는, 물론 양명학내에서이긴 하지만 다시 공부를 강조하는 양명학을 제창한다. 양명학의 간이성을 극단까지 밀고나갔던 왕용계를 통해 입문했으면서도 그 대척점에 있던 학풍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일까. 그것이 단지 그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하는 것일까? 본 과제에서는 미와 싯사이의 사상 자체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 속에서 그 단서를 찾고자 한다.
      미와 싯사이의 사상은 ‘격물설’과 ‘지행관’을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젊었을 때 몸담았던 기몬학파의 학문적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싯사이의 스승 사토 나오카타는 “인의예지는 인간이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리이다. 배우는 자들이 이 리를 깨우칠 수 있는 까닭은 지와 행에 있다.”(『王學辨集序』)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기몬삼걸 중의 한 명인 미야케 쇼사이(三宅尙齋, 1662-1741) 역시 “학문의 도는 지와 행의 양단에 있을 뿐”임을 역설하고 있다. 싯사이 역시 “참으로 중요하도다 격물학이여! 이 문에 의하지 않고서 어디로부터 덕에 들어간단 말인가.”(『格物辨議』和文自序)라고 ‘격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본 과제는 싯사이의 ‘격물설’과 ‘지행관’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분석한다.
      일본 주자학과 양명학의 특징이 드러나게 되면, 이제 그것을 당시 일본의 풍토(정치, 사회 구조)와 연계하여,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게 된 원인을 고찰한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비교하여 현저히 다른 정치·사회 구조를 갖고 있었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으로, 무관인 쇼군과 그의 휘하에 있는 사무라이가 다스리는 통치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교는 본래 문신 지배하의 중국문화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사상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조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혀 이질적인 풍토의 일본에 건너와서도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막부 통치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변용의 결과였을까? 무신정권하의 일본에서 유교적 이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둘째,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 특히 주희가 활약하던 송대 이후로는 필기시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대다수 관료는 이 시험을 통해 위정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데 과거제가 없던 일본은 사무라이가 세습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기와 치인을 양 축으로 수립됐던 유교는 이제 ‘치인’ 즉 위정이라는 한 축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본래 위정의 학문으로 제창된 유교가, 위정의 길이 차단된 일본 풍토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가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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