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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末淸初 동남 연해에서 鄭成功의 상업활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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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명말청초 동남 연해에서 활동하던 鄭芝龍, 成功 부자는 당대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중 하나이다. 芝龍은 만력 32년(1604) 복건 천주 안평에서 태어나 천계 원년(1621) 廣東 香山澳에서 활동하는 이모부 黃程에게 가서 해상 무역을 배우며 李旦, 顔思齊등의 세력을 흡수하며 수 천명을 거느리는 독자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복건 연해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하던 중 일본인 田川氏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다음해 8월, 肥前國平戶島千內浦千里에서 아들 森(즉 훗날의 成功)을 낳았다.
      당시 명 조정은 느슨한 해방경계로 동남 연해 해상 세력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자, 芝龍의 역량을 빌어 연해를 안정시키려 하였고, 芝龍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천계 7년(1627) 9월, 초무에 응하여 정규군인 해상유격에 봉해졌다. 점차 그는 정치적인 인물이 되어갔다.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여느 해적들과 달리 연해 빈민들을 도와주며 민심을 얻어가자 工科給事中 顔繼祖는 이러한 행보를 경계한 바 있었다. 이후 芝龍은 숭정 8년(1635)까지 李魁奇, 楊祿, 楊策, 褚綵老, 鐘斌, 劉香 등을 소멸시키며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조정은 이에 대한 공로로 副總兵, 總兵, 南安伯, 平虜侯에 이어 平國公에 봉했고 鄭氏 집안은 ‘一門聲勢, 赫奕東南’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쓰러져가는 隆武정권은 森에게 朱成功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하사하자 이후 그는 國姓爺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청군이 복건에 들어오고 형세는 급변하였다. 이미 정치를 경험한 芝龍은 새로운 작위를 얻기위해 成功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하 5백여명과 함께 복주에 가서 貝勒을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북경으로 갔으나 연금된 채 순치 8년(1661) 죽음을 당했다. 成功은 하문을 근거로 쓰러져가는 명 황실을 지지하며 鄭彩, 鄭聯 등을 규합하고 일본, 여송, 交趾의 絲貨 무역을 장악하면서 군사력까지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어서 대만을 공략하여 네델란드 동인도 공사를 몰아내고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다음해인 강희 원년(1662)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장강 삼각주 지역에서 생산된 生絲와 絲綢를 하문을 통해 일본에 있는 閩南 상인들에게 수출하여 중.일간의 새로운 무역시스템을 만들었고, 유럽상인들은 물론 조선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대만에 중국 문화를 이식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成功은 출생에서부터 신비감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부친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3대 기인중 한명으로 추앙받기까지 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무너져가는 명 황실을 옹호했으며 대만에서 네델란드라는 힘있는 외세를 몰아내고 중국 문화를 이식시킨 인물로서 민족적 정서까지 더하여, 중국 대륙, 대만, 일본 학계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흔치않은 인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일생은 갈수록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상업사 관점에서 명말청초 동남 연해의 세력상황을 살펴보고 민남상인 鄭成功의 모습을 재현해보고 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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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말청초 동남 연해에서 활동하던 鄭芝龍, 成功 부자는 당대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중 하나이다. 芝龍은 만력 32년(1604) 복건 천주 안평에서 태어나 천계 원...

      명말청초 동남 연해에서 활동하던 鄭芝龍, 成功 부자는 당대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중 하나이다. 芝龍은 만력 32년(1604) 복건 천주 안평에서 태어나 천계 원년(1621) 廣東 香山澳에서 활동하는 이모부 黃程에게 가서 해상 무역을 배우며 李旦, 顔思齊등의 세력을 흡수하며 수 천명을 거느리는 독자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복건 연해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하던 중 일본인 田川氏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다음해 8월, 肥前國平戶島千內浦千里에서 아들 森(즉 훗날의 成功)을 낳았다.
      당시 명 조정은 느슨한 해방경계로 동남 연해 해상 세력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자, 芝龍의 역량을 빌어 연해를 안정시키려 하였고, 芝龍 역시 세력 확장을 위해 천계 7년(1627) 9월, 초무에 응하여 정규군인 해상유격에 봉해졌다. 점차 그는 정치적인 인물이 되어갔다.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여느 해적들과 달리 연해 빈민들을 도와주며 민심을 얻어가자 工科給事中 顔繼祖는 이러한 행보를 경계한 바 있었다. 이후 芝龍은 숭정 8년(1635)까지 李魁奇, 楊祿, 楊策, 褚綵老, 鐘斌, 劉香 등을 소멸시키며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조정은 이에 대한 공로로 副總兵, 總兵, 南安伯, 平虜侯에 이어 平國公에 봉했고 鄭氏 집안은 ‘一門聲勢, 赫奕東南’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쓰러져가는 隆武정권은 森에게 朱成功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하사하자 이후 그는 國姓爺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청군이 복건에 들어오고 형세는 급변하였다. 이미 정치를 경험한 芝龍은 새로운 작위를 얻기위해 成功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하 5백여명과 함께 복주에 가서 貝勒을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북경으로 갔으나 연금된 채 순치 8년(1661) 죽음을 당했다. 成功은 하문을 근거로 쓰러져가는 명 황실을 지지하며 鄭彩, 鄭聯 등을 규합하고 일본, 여송, 交趾의 絲貨 무역을 장악하면서 군사력까지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어서 대만을 공략하여 네델란드 동인도 공사를 몰아내고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다음해인 강희 원년(1662)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장강 삼각주 지역에서 생산된 生絲와 絲綢를 하문을 통해 일본에 있는 閩南 상인들에게 수출하여 중.일간의 새로운 무역시스템을 만들었고, 유럽상인들은 물론 조선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대만에 중국 문화를 이식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특히 成功은 출생에서부터 신비감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부친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3대 기인중 한명으로 추앙받기까지 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무너져가는 명 황실을 옹호했으며 대만에서 네델란드라는 힘있는 외세를 몰아내고 중국 문화를 이식시킨 인물로서 민족적 정서까지 더하여, 중국 대륙, 대만, 일본 학계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흔치않은 인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일생은 갈수록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상업사 관점에서 명말청초 동남 연해의 세력상황을 살펴보고 민남상인 鄭成功의 모습을 재현해보고 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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