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oriding to Kinmei-ki (欽明紀) of Ilbonseogi(日本書紀), October in 553, there is an article that Buyeo Chang, the prince of Baekje, attacked Goguryeo and won at the battle of Baekhabya(百合野). Most of researchers admit the material as a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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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용철 (경북대학교)
2019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371-397(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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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iding to Kinmei-ki (欽明紀) of Ilbonseogi(日本書紀), October in 553, there is an article that Buyeo Chang, the prince of Baekje, attacked Goguryeo and won at the battle of Baekhabya(百合野). Most of researchers admit the material as a h...
Accoriding to Kinmei-ki (欽明紀) of Ilbonseogi(日本書紀), October in 553, there is an article that Buyeo Chang, the prince of Baekje, attacked Goguryeo and won at the battle of Baekhabya(百合野). Most of researchers admit the material as a historical fact that between Baekje and Goguryeo, there was the pitched battle and then the king of Goguryeo retreated above Dongsung Mountain. But some of researchers deny the article about the battle of Baekhabya or argue that the time of the battle, October in 553, should be modified. They think that because Silla set up Shinju(新州) in downstream of the Han River in July, 553, it is highly likely that Goguryeo and Baekje did not border at the time. In addition, they assume that since King Seong was preparing for the battle of Gwansanseong in the following year, he did not raise up the large-scale troops. But only by circumstantial evidence, the denial about the contents of Ilbonseogi and the modification of the time of battle can not be agreeing.
King Seong who had trouble due to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Silla intended to demonstrate the military force of Baekje through the battle against Goguryeo. Furthermore, on the pretext of victory at the battle, Baekje promoted the plan to conquer Silla by organizing allied forces with Wa(倭) and Gaya(伽倻) and to recover the Han River basin. The battle of Baekhabya was not only a battle between Baekje and Goguryeo, but it also was significant as a prelude to the battle of Gwansanseong the following year. Therefore, it is assumed that the military movement of Silla was also an important variable in Baekje's attack on Goguryeo. To improve temporary relations, King Seong created an advantageous environment by sending a princess to King Jinheung of Silla to marry and by establishing a military base after defeating Goguryeo troops in Baekhabya, which is believed to be a border area between the three kingdoms.
『日本書紀』 欽明紀에는 553년 10월, 백제의 왕자 餘昌이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하였다는 ‘百合野 전투’ 기사가 보인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대규모 會戰이 벌어졌...
『日本書紀』 欽明紀에는 553년 10월, 백제의 왕자 餘昌이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하였다는 ‘百合野 전투’ 기사가 보인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대규모 會戰이 벌어졌고, 고구려왕이 東聖山 위까지 퇴각하였던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백합야 전투 기사를 부정하거나 553년 10월의 시점을 고쳐보아야 한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계속되고 있다. 553년 7월에 신라의 新州가 한강 하류 유역에 설치되었으니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은 닿아있지 않았을 공산이 크고, 성왕은 이듬해 신라와의 管山城 전투를 준비 중이었으므로 553년에 큰 병력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황상 근거만으로 『일본서기』의 기사를 부정하거나 시점을 수정해 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구려와 신라의 通好에 직면하여 불리한 처지에 빠졌던 성왕은 고구려와의 정면 대결을 통해 백제의 군사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勝戰을 명분으로 왜 및 가야 세력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신라를 정벌하고, 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백합야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만의 싸움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있을 관산성 전투의 前哨戰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이에 백제군의 고구려 공격에는 신라군의 동향 또한 핵심적인 변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에게 王女를 시집보내 일시적인 관계 봉합에 나서는 한편 삼국간의 접경지로 추정되는 백합야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는 등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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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盧重國, "5~6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11 : 2006
한·중 양분적 맞섬말의 다의 구조 대조 연구 -암수 관계 맞섬말을 중심으로-
18세기 대구지역 한 양반가의 일상의례, 喪禮와 祭禮 -百弗庵 崔興遠의 『曆中日記』(1735~1786)를 중심으로-
학술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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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선정 (재인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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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1 | 등재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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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01 | 등재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 2007-01-01 | 등재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 |
| 2005-01-01 | 등재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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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 0.55 | 0.55 | 0.49 |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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