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은 프랑스 외교관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일관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프랑스가 조·일간의 교섭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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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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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은 프랑스 외교관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일관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프랑스가 조·일간의 교섭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였�...
1장은 프랑스 외교관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일관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프랑스가 조·일간의 교섭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였다. 프랑스는 일본이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더 많은 이익을 보았다고 인식했지만, 전반적으로 조일수호조규를 조·일에 모두 평등한 조약으로 평가했다. 프랑스는 개항 이후 일본 정부가 취한 조선에 대한 기본 입장은 교역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프랑스는 일본은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제물포조약을 요구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교역 확대 조치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는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의 독점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유럽 국가들의 대조선 무역을 견제한다고 인식했다. 프랑스는 수교 무렵 일본만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유일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프랑스는 그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은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확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한편 프랑스는 조선 정부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에도 일본과의 통상 확대를 원하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외교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프랑스는 조선 정부는 일본의 주권 침해 가능성을 우려하였으므로 일본의 전신선 부설 제의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신선 부설을 추진했다고 평가했다.
2장은 프랑스 외교관은 주일공사 파견 이후 조일관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고종은 1887년 일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민영준을 주일 판리대신, 김가진을 주일 참찬관으로 임명했다. 얼마 뒤 김가진은 주일판리대신으로 승진했다. 플랑시는 김가진은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의 대일정책이 소극적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프랑스는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확고히 하고자 조선 공사를 곤도에서 가지야마로 교체했다고 지적했다. 또 프랑스는 일본 정부는 일본의 이익을 대변해줄 친일적인 외국인을 고종의 측근에 두고자 획책했다고 인식했다. 그에 따라 일본은 일본 주재 미국 총영사 르장드르를 고종의 고문으로 임명시키고자 진력했고, 고종은 르장드르를 정치고문에 임명했다고 보았다. 프랑스는 고종은 르장드르에게 일본과 차관 도입을 교섭하게 했지만 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인식했다. 조선 정부는 1891년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전환국을 창설했다. 프랑댕은 전환국 창설은 일본의 대조선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프랑댕은 원세개는 일본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전환국에서 발행한 화폐에 대해 유통을 중단시켰다고 인식했다. 한편 프랑스는 일본의 대조선정책이 변화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로셰는 일본은 청에 조선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조선을 장악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1891년의 조일어채장정 개정 거부, 방곡령 배상 요구, 평양 개시 요구 등은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변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으로 인식했다.
3장은 프랑스 외교관은 일본의 군비증강 완성 이후 조일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분석했다. 프랑스는 1893년에 접어들자 일본 정부는 조선 압박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프랑스는 일본의 대조선정책 변화의 증거로 첫째, 부산 절영도 조차 시도, 둘째, 김옥균 등 망명자와 친분있는 인물의 조선 공사 임명, 셋째, 대원군 저격사건과 동학 사건 등을 통한 조선 내정 개입, 넷째, 방곡령 분쟁의 단호한 해결 시도 등을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일본이 점차 청과의 타협을 추구한 것으로 평가했다. 프랑스는 5월의 방곡령 분쟁 타결은 일본 정부가 조선 문제에 대해 청과 협력하려 한 증거라고 보았다. 프랑댕은 방곡령 타결의 주인공을 이등박문과 이홍장으로 지목했다. 프랑스는 일본 정부가 오이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를 본국으로 소환한 것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 조치로 평가했다. 프랑댕은 오이시의 소환에 대해 이홍장이 조,일간의 갈등을 완전 해소하고자 이토에게 제의한 결과로 파악했다. 프랑스는 그같은 청, 일의 합의 배경에는 러, 프를 견제하려는 영국의 중재가 있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1894년 김옥균이 상해에서 피살되자 청‧일 간의 협조가 와해되기 시작했다고 인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