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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숙종 초 ‘紅袖의 變’과 明聖王后 金氏의 정치적 역할 = Disturbance by Hong-Su[a court lady]' and Political Role of the Kim, Queen Myung-Sung[明聖王后] of the early King SukJong[肅宗]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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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675년(숙종 원년)에 일어난 ‘紅袖[內人]의 變’은 당시에 大妃였던 明聖王后가 궁녀와의 추문으로 왕실의 권위를 손상시킨 종친 福昌君 형제를 치죄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궁중 및 각 정치 세력들 간의 갈등을 표출시킴으로써 숙종 초기 정국 변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肅宗이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母后인 명성왕후는 유약한 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정아버지인 淸風府院君 金佑明을 앞세워 ‘홍수의 변’을 일으켰으며, 직접 政廳에까지 나와 복창군 형제를 단죄하였다. 당시 麟坪大君의 아들들인 福昌君 · 福善君 · 福平君을 ‘3福’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환관과 남인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고 있는데다, 숙종의 유사시에 일차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서열이었기 때문에 명성왕후에게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명성왕후는 垂簾聽政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개입하였으며, 그 결과 강성한 종친 세력인 3복을 축출하는 동시에, 숙종에 대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정치 행동에 대하여 즉각 3복을 추종하던 남인들의 거센 반발이 뒤따랐고, 넉 달 만에 복창군 형제가 석방됨으로 인해 향후 명성왕후의 정치적 입장은 3복과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더욱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명성왕후는 숙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촌인 金錫? 등 외척을 중용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리고 왕의 지지 세력으로서 자신의 정치 행동에 호의적이었던 宋時烈系 서인과 외척 간의 정치적 연합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연대의 필요성은 서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인들 역시 남인들로부터 정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중앙에 있는 외척들과의 연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淸風 金門의 외척과 송시열과의 연대 조짐이 1677년(숙종 3) 3월에 김석주가 남인의 告廟論과 親耕論을 저지하는 것에서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80년(숙종 6)에 김석주는 대표적 송시열계 서인이자 훈척인 金益勳 · 金萬基 등과 손잡고 庚申換局을 일으켜 3복과 남인들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결국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송시열 · 金壽恒 등은 김석주에게 宗社를 보존한 공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경신환국이 있던 그 해 12월에 특별히 언문으로 하교하여 郊外에 나가있던 송시열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명성왕후의 언찰은 송시열을 조정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경신환국 이후 서인의 宗主인 송시열을 왕의 확실한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송시열로서도 이 언찰은 수년에 걸쳐 남인의 정치적 공세에 의해 곤두박질한 자신의 정치적 · 학문적 위상을 다시 높여 주고, 자신에 대한 왕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機制가 되었다. 명성왕후의 부름에 송시열이 즉각 응함으로써 청풍 김문과 송시열 세력은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음을 公表할 수 있었다. 명성왕후와 숙종은 적극적으로 송시열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등,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명성왕후는 勳戚이 서인 세력의 중추로 편입하고, 송시열 등의 서인 내 前輩가 老論化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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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5년(숙종 원년)에 일어난 ‘紅袖[內人]의 變’은 당시에 大妃였던 明聖王后가 궁녀와의 추문으로 왕실의 권위를 손상시킨 종친 福昌君 형제를 치죄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궁중 및 ...

    1675년(숙종 원년)에 일어난 ‘紅袖[內人]의 變’은 당시에 大妃였던 明聖王后가 궁녀와의 추문으로 왕실의 권위를 손상시킨 종친 福昌君 형제를 치죄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궁중 및 각 정치 세력들 간의 갈등을 표출시킴으로써 숙종 초기 정국 변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肅宗이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母后인 명성왕후는 유약한 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정아버지인 淸風府院君 金佑明을 앞세워 ‘홍수의 변’을 일으켰으며, 직접 政廳에까지 나와 복창군 형제를 단죄하였다. 당시 麟坪大君의 아들들인 福昌君 · 福善君 · 福平君을 ‘3福’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환관과 남인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고 있는데다, 숙종의 유사시에 일차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서열이었기 때문에 명성왕후에게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명성왕후는 垂簾聽政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개입하였으며, 그 결과 강성한 종친 세력인 3복을 축출하는 동시에, 숙종에 대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정치 행동에 대하여 즉각 3복을 추종하던 남인들의 거센 반발이 뒤따랐고, 넉 달 만에 복창군 형제가 석방됨으로 인해 향후 명성왕후의 정치적 입장은 3복과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더욱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명성왕후는 숙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촌인 金錫? 등 외척을 중용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리고 왕의 지지 세력으로서 자신의 정치 행동에 호의적이었던 宋時烈系 서인과 외척 간의 정치적 연합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연대의 필요성은 서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인들 역시 남인들로부터 정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중앙에 있는 외척들과의 연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淸風 金門의 외척과 송시열과의 연대 조짐이 1677년(숙종 3) 3월에 김석주가 남인의 告廟論과 親耕論을 저지하는 것에서부터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80년(숙종 6)에 김석주는 대표적 송시열계 서인이자 훈척인 金益勳 · 金萬基 등과 손잡고 庚申換局을 일으켜 3복과 남인들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결국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송시열 · 金壽恒 등은 김석주에게 宗社를 보존한 공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경신환국이 있던 그 해 12월에 특별히 언문으로 하교하여 郊外에 나가있던 송시열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명성왕후의 언찰은 송시열을 조정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경신환국 이후 서인의 宗主인 송시열을 왕의 확실한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송시열로서도 이 언찰은 수년에 걸쳐 남인의 정치적 공세에 의해 곤두박질한 자신의 정치적 · 학문적 위상을 다시 높여 주고, 자신에 대한 왕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機制가 되었다. 명성왕후의 부름에 송시열이 즉각 응함으로써 청풍 김문과 송시열 세력은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음을 公表할 수 있었다. 명성왕후와 숙종은 적극적으로 송시열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등,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명성왕후는 勳戚이 서인 세력의 중추로 편입하고, 송시열 등의 서인 내 前輩가 老論化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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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紅袖의 變’과 명성왕후의 政廳 등장
    • 3. 정청 등장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논쟁
    • 4. ‘紅袖의 變’의 영향과 정국 변화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紅袖의 變’과 명성왕후의 政廳 등장
    • 3. 정청 등장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논쟁
    • 4. ‘紅袖의 變’의 영향과 정국 변화
    • 5. 맺음말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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