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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代 몽골의 親朝 요구와 고려의 대응 = Mongol’s demand of King’s attendance to the Mongol court and the interaction of Goryo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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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Mongolia, which invaded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wanted to apply its traditional world view to its relations with Goryeo. Throughout the reign of King Gojong after the first contact between the two countries during the Battle of Gangdongseong, they continued to demand Goryeo's royal friendship, as Mongolia accepted it as a practical submissive position. It was inevitable that there would be a conflict with the consideration of maintaining the existing format of serving a large country.
      Mongolia invaded the Goryeo Dynasty and attacked the southern part of the Goryeo Dynasty. However, it recognized that it was not easy to subjugate the Goryeo Dynasty as the war continued for a long time. In order to concentrate all efforts on the Southern Song dynasty, King Gojong changed his attitude from the 40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to the demand for the royal prince's landing and surrender to the royal court or to the king's surrender. In line with this change, the Goryeo Dynasty, which suffered serious damage due to the war with Mongolia, cannot only maintain the format of serving a large country. Goryeo refused to support the king, and revised its course in a way that allowed the Crown Prince. This means that during Gojong's reign bilateral relationship was a process of finding a compromise knowing that it was difficult to unilaterally force or demand. The relatively weak Goryeo was able to produce such a compromise because it had that much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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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golia, which invaded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wanted to apply its traditional world view to its relations with Goryeo. Throughout the reign of King Gojong after the first contact between the two countries during the Battle of Gangdongseong,...

      Mongolia, which invaded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wanted to apply its traditional world view to its relations with Goryeo. Throughout the reign of King Gojong after the first contact between the two countries during the Battle of Gangdongseong, they continued to demand Goryeo's royal friendship, as Mongolia accepted it as a practical submissive position. It was inevitable that there would be a conflict with the consideration of maintaining the existing format of serving a large country.
      Mongolia invaded the Goryeo Dynasty and attacked the southern part of the Goryeo Dynasty. However, it recognized that it was not easy to subjugate the Goryeo Dynasty as the war continued for a long time. In order to concentrate all efforts on the Southern Song dynasty, King Gojong changed his attitude from the 40th year of King Gojong's reign to the demand for the royal prince's landing and surrender to the royal court or to the king's surrender. In line with this change, the Goryeo Dynasty, which suffered serious damage due to the war with Mongolia, cannot only maintain the format of serving a large country. Goryeo refused to support the king, and revised its course in a way that allowed the Crown Prince. This means that during Gojong's reign bilateral relationship was a process of finding a compromise knowing that it was difficult to unilaterally force or demand. The relatively weak Goryeo was able to produce such a compromise because it had that much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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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종대 고려를 침입한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을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했다. 강동성전투 시기 양국의 첫 접촉 후 고종 재위 기간 내내 그들은 줄곧 고려에게 군주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이는 몽골이 친조를 실질적인 복속의 자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대관계라는 형식을 유지하려는 고려와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몽골은 고려를 침입하여 고려의 남부지역까지 공격을 하며 고려의 복속에 온힘을 기울였으나, 장기간 전쟁이 지속되면서 고려를 복속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아울러 남송 정벌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고종 40년부터는 친조 강요에서 벗어나, 태자 친조나, 국왕과 태자의 출륙 항복 요구 또는 태자의 군전 항복으로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해가 심각해진 고려도 사대관계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는 국왕 친조는 거부하면서, 태자 친조는 허용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였다. 이는 고종대 양국관계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거나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고려가 이러한 절충안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의 저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대 대몽항쟁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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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대 고려를 침입한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을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했다. 강동성전투 시기 양국의 첫 접촉 후 고종 재위 기간 내내 그들은 줄곧 고려에게 군주...

      고종대 고려를 침입한 몽골은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을 그대로 적용시키고자 했다. 강동성전투 시기 양국의 첫 접촉 후 고종 재위 기간 내내 그들은 줄곧 고려에게 군주의 친조를 요구했는데, 이는 몽골이 친조를 실질적인 복속의 자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대관계라는 형식을 유지하려는 고려와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몽골은 고려를 침입하여 고려의 남부지역까지 공격을 하며 고려의 복속에 온힘을 기울였으나, 장기간 전쟁이 지속되면서 고려를 복속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아울러 남송 정벌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고종 40년부터는 친조 강요에서 벗어나, 태자 친조나, 국왕과 태자의 출륙 항복 요구 또는 태자의 군전 항복으로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해가 심각해진 고려도 사대관계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고려는 국왕 친조는 거부하면서, 태자 친조는 허용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였다. 이는 고종대 양국관계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강요하거나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고려가 이러한 절충안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의 저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대 대몽항쟁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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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라시드 앗 딘, "칸의 후예들" 사계절 2005

      2 라시드 앗 딘, "칭기스칸기" 사계절 2003

      3 송정남, "베트남의 역사"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0

      4 플라노 카르피니, "몽골제국기행" 까치 2015

      5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6 고명수,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검토" 역사학회 (225) : 195-229, 2015

      7 김보광, "고려의 對蒙 대응 논리와 ‘大國이미지’ ― 1231, 1232년 외교문서를 중심으로 ―" 고려사학회 (61) : 273-309, 2015

      8 이명미, "고려국왕의 몽골 入朝 양상과 국왕권의 존재양태" 한국중세사학회 (46) : 187-220, 2016

      9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10 尹龍爀, "高麗對蒙抗爭史硏究" 一志社 1991

      1 라시드 앗 딘, "칸의 후예들" 사계절 2005

      2 라시드 앗 딘, "칭기스칸기" 사계절 2003

      3 송정남, "베트남의 역사"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0

      4 플라노 카르피니, "몽골제국기행" 까치 2015

      5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6 고명수,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검토" 역사학회 (225) : 195-229, 2015

      7 김보광, "고려의 對蒙 대응 논리와 ‘大國이미지’ ― 1231, 1232년 외교문서를 중심으로 ―" 고려사학회 (61) : 273-309, 2015

      8 이명미, "고려국왕의 몽골 入朝 양상과 국왕권의 존재양태" 한국중세사학회 (46) : 187-220, 2016

      9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10 尹龍爀, "高麗對蒙抗爭史硏究" 一志社 1991

      11 "高麗史節要"

      12 "高麗史"

      13 허인욱, "高麗 高宗代 몽골 침입과 全州" 전북사학회 (53) : 161-186, 2018

      14 李基白,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一志社 1993

      15 여원관계사연구팀, "譯註 元高麗紀事" 혜안 2008

      16 "補閑集"

      17 "東文選"

      18 "東國李相國集"

      19 高柄翊,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70

      20 강재광, "對蒙戰爭期 高宗의 出陸外交와그 歷史的 性格" 한국중세사학회 (43) : 277-317, 2015

      21 "元高麗紀事"

      22 "元史"

      23 T. T. Allsen, "China among Equa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24 이익주, "1219년(高宗 6) 고려-몽골 ‘兄弟盟約’ 再論" 국학연구원 (175) : 77-1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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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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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4 0.4 0.4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45 0.43 1.181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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