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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미디어와 근대 시공간--1930년대 상하이 대중문화의 지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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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전파되는 소리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 의해 인간의 삶의 방식을 새로운 공간 속으로 짜 넣는다. 크게는 국가라는 공간을 창출하는가 하면, 좁게는 개인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데, 이는 기존의 물리적인 공간과 대비하여 일종의 의사공간이다. 즉 다양한 방식의 개폐를 가능케 하는 음향 테크놀러지의 발달에 의해 소리 미디어는 국가나 혹은 개인의 밀폐된 공간과 같은 다양한 형식의 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하나로 1876년 그레이엄 벨에 의해 발명된 전화는 1881년 상하이에 유입되면서 영국과 미국 자본의 외국 기업들이 전화통신 사업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국 자본이 중국의 전화 사업을 손쉽게 장악하고 상업용 뿐 아니라 정부 공공기관과 군사용으로까지 전화 업무에 속속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이다. 또 하나는 중국에서 전화는 서구와 같은 대중오락 혹은 방송매체의 특성과는 동떨어진, 처음부터 국가질서나 치안유지, 지역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통신 업무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전화는 업무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서 쾌적한 생활방식을 즐기기 위한 소비재와 기호품으로 빠르게 탈바꿈된다. 이러한 사적인 미디어로의 전환은 전화가 사생활과 개인적인 내밀성을 구축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화 발명에 뒤이어 1895년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장치 발명으로 중국에 라디오가 출현한 것은 1920년대로, 이 또한 중국인이 주도하여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지 못하고 외국 자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또 수신기의 값이 비싸 라디오 매체의 사회적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1927년 중국 최초의 민영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중일전쟁 시기 관영은 물론 민영 방송국도 점차 기존의 상업화 경향에서 탈피하여 라디오 방송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민족의식과 국민국가 개념을 공고히 하는 미디어로 부상해갔다. 이와 동시에 라디오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가족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형성해갔다. 당시의 라디오 방송은 남성의 관심사인 경제뉴스와 주부대상 교양 강좌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오락 형태를 제공하고 있다.
      유성기 레코드의 보급과 라디오 방송은 도시의 일상을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다. 상하이 南京路 중심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카페와 재즈 빠, 백화점, 무도장은 라디오와 유성기의 소리 문화가 그 힘을 발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890년 유성기가 중국에 상륙한 이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라디오와 비슷한 시기인 대략 1920년대 말부터인데, 각종 신문과 잡지에 유성기나 음반과 관련된 생활 기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때가 이 무렵이다. 눈에 띄는 점은 이들 기사와 광고 속에서 유성기의 용도가 새로운 유형의 가족적 이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성기는 당시 신여성, 신가정이란 모토와 연결되어 이상적인 생활양식의 전형을 제시하며 이를 서양과 근대의 이름을 빌어 합리화시켰다.
      유성기의 보급에 따라 음반업이 커다란 시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지만,이 역시 처음부터 서구세력의 확장과 식민자본의 독점적 지배에 놓여있었다. 중국에서 직접 음반제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 회사 “百代”,“勝利”, “大中華”는 프랑스 자본과 영미자본, 일본자본이 투여된 기업들로, 이들이 발행한 음반이 중국 시장의 대부분을 점거할 정도로 중국 음반업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들 외국자본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은 모두 식민모국으로 회수되었으니, 중국의 음반시장 자체가 당시 전지구적인 제국의 큰 시장판도에 귀속되어있는 일각에 불과한 형국이었다.
      20년대말 규모가 커진 음반 시장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유행가와 재즈 음악은 무도장과 나이트클럽 뿐 아니라 심지어 일반 중산층 가정의 응접실에서도 유성기나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무도장에서 가수들이 부르던 인기곡은 대중적 잡지에 그 악보가 실리거나 음반에 수록되고 이를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거나 다시 유성영화에 삽입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의 에크리튀르’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였다. 요컨대 음반업과 라디오 방송국, 유성영화란 신흥 미디어들의 긴밀한 결합을 중심으로 유성기 문화와 댄스문화까지 포함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소리의 복제문화의 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졌던 1930년대 상하이는 중국 음반업의 주축이자 라디오 방송의 중심지로, 그리고 영화산업의 핵심기지로 부상하였다. 이상과 같이 1930년대 상하이를 중심으로 괄목할 발전을 보여준 소리 미디어는 개인의 취미, 가정, 사회 영역과 문화 공간, 국가 질서에 이르기까지 중국 근대문화의 중요한 토대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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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전파되는 소리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 의해 인간의 삶의 방식을 새로운 공간 속으로 짜 넣는다. 크게는 국가라는 공간을 창출하는가 하면, 좁게는 개인이라...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전파되는 소리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 의해 인간의 삶의 방식을 새로운 공간 속으로 짜 넣는다. 크게는 국가라는 공간을 창출하는가 하면, 좁게는 개인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데, 이는 기존의 물리적인 공간과 대비하여 일종의 의사공간이다. 즉 다양한 방식의 개폐를 가능케 하는 음향 테크놀러지의 발달에 의해 소리 미디어는 국가나 혹은 개인의 밀폐된 공간과 같은 다양한 형식의 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하나로 1876년 그레이엄 벨에 의해 발명된 전화는 1881년 상하이에 유입되면서 영국과 미국 자본의 외국 기업들이 전화통신 사업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국 자본이 중국의 전화 사업을 손쉽게 장악하고 상업용 뿐 아니라 정부 공공기관과 군사용으로까지 전화 업무에 속속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이다. 또 하나는 중국에서 전화는 서구와 같은 대중오락 혹은 방송매체의 특성과는 동떨어진, 처음부터 국가질서나 치안유지, 지역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통신 업무에 맞추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전화는 업무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서 쾌적한 생활방식을 즐기기 위한 소비재와 기호품으로 빠르게 탈바꿈된다. 이러한 사적인 미디어로의 전환은 전화가 사생활과 개인적인 내밀성을 구축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화 발명에 뒤이어 1895년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장치 발명으로 중국에 라디오가 출현한 것은 1920년대로, 이 또한 중국인이 주도하여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지 못하고 외국 자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또 수신기의 값이 비싸 라디오 매체의 사회적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다 1927년 중국 최초의 민영 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중일전쟁 시기 관영은 물론 민영 방송국도 점차 기존의 상업화 경향에서 탈피하여 라디오 방송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민족의식과 국민국가 개념을 공고히 하는 미디어로 부상해갔다. 이와 동시에 라디오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가족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형성해갔다. 당시의 라디오 방송은 남성의 관심사인 경제뉴스와 주부대상 교양 강좌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오락 형태를 제공하고 있다.
      유성기 레코드의 보급과 라디오 방송은 도시의 일상을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다. 상하이 南京路 중심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카페와 재즈 빠, 백화점, 무도장은 라디오와 유성기의 소리 문화가 그 힘을 발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890년 유성기가 중국에 상륙한 이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라디오와 비슷한 시기인 대략 1920년대 말부터인데, 각종 신문과 잡지에 유성기나 음반과 관련된 생활 기사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때가 이 무렵이다. 눈에 띄는 점은 이들 기사와 광고 속에서 유성기의 용도가 새로운 유형의 가족적 이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성기는 당시 신여성, 신가정이란 모토와 연결되어 이상적인 생활양식의 전형을 제시하며 이를 서양과 근대의 이름을 빌어 합리화시켰다.
      유성기의 보급에 따라 음반업이 커다란 시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지만,이 역시 처음부터 서구세력의 확장과 식민자본의 독점적 지배에 놓여있었다. 중국에서 직접 음반제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 회사 “百代”,“勝利”, “大中華”는 프랑스 자본과 영미자본, 일본자본이 투여된 기업들로, 이들이 발행한 음반이 중국 시장의 대부분을 점거할 정도로 중국 음반업의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들 외국자본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은 모두 식민모국으로 회수되었으니, 중국의 음반시장 자체가 당시 전지구적인 제국의 큰 시장판도에 귀속되어있는 일각에 불과한 형국이었다.
      20년대말 규모가 커진 음반 시장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유행가와 재즈 음악은 무도장과 나이트클럽 뿐 아니라 심지어 일반 중산층 가정의 응접실에서도 유성기나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무도장에서 가수들이 부르던 인기곡은 대중적 잡지에 그 악보가 실리거나 음반에 수록되고 이를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거나 다시 유성영화에 삽입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의 에크리튀르’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였다. 요컨대 음반업과 라디오 방송국, 유성영화란 신흥 미디어들의 긴밀한 결합을 중심으로 유성기 문화와 댄스문화까지 포함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소리의 복제문화의 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졌던 1930년대 상하이는 중국 음반업의 주축이자 라디오 방송의 중심지로, 그리고 영화산업의 핵심기지로 부상하였다. 이상과 같이 1930년대 상하이를 중심으로 괄목할 발전을 보여준 소리 미디어는 개인의 취미, 가정, 사회 영역과 문화 공간, 국가 질서에 이르기까지 중국 근대문화의 중요한 토대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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