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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영화정책과 스크린 쿼터제의 변천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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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334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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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 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사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2년 7 월 l일부터 연간 73일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두 번의 시행과정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1935년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에 시행된 것이며 또 한 번은 1967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는 기간이다. 전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영화를 정치선전 수단£로 활용하려던 일본인들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시행되었다. 1935년에는 외국영화의 상영비율이 전체 영화의 4분의 3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1936년에는 3분의 2, 1937 년에는 절반을 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제한 비율을 확대했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밀어난 이후에는 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외국영화의 상영을 제한했던 이유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국산영화의 상영을 강제적으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쟁수행을 위한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후자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경쟁력 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정책의 보호로 시장을 독과점한 한국의 영화사들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개 발하는 대신 외국영화의 수입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설립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사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한국영화를 외면했으며 외국영화를 더 좋아했다. 게다가 스크린 쿼터제는 극장측에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함으로서 제작과 유통을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경쟁력이 미약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극장 측은 정부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제작자, 극장 운영자, 관객 어느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과도한 보호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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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 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사키는 요...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 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사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2년 7 월 l일부터 연간 73일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두 번의 시행과정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1935년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에 시행된 것이며 또 한 번은 1967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는 기간이다. 전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영화를 정치선전 수단£로 활용하려던 일본인들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시행되었다. 1935년에는 외국영화의 상영비율이 전체 영화의 4분의 3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1936년에는 3분의 2, 1937 년에는 절반을 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제한 비율을 확대했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밀어난 이후에는 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외국영화의 상영을 제한했던 이유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국산영화의 상영을 강제적으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쟁수행을 위한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후자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경쟁력 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정책의 보호로 시장을 독과점한 한국의 영화사들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개 발하는 대신 외국영화의 수입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설립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사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한국영화를 외면했으며 외국영화를 더 좋아했다. 게다가 스크린 쿼터제는 극장측에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함으로서 제작과 유통을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경쟁력이 미약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극장 측은 정부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제작자, 극장 운영자, 관객 어느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과도한 보호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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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it hurts the quality of the Korean movies. The number of days, for which Korean movies have to play on local screens, has been reduced to 73, starting on July 1st, 2006. Actually, it is 50 percent fewer than the previous year.
      In fact, Korea has implemented the screen quota. system two times. First, it was practiced from 1935 to 1945,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to regulate imported movies, especially American ones, as the Japanese government was to use movie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In 1935, the number of foreign movies screened had to be less than three fourths of the total. And they gradually reduced the size by two thirds in 1936, and again by half in 1937.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hen the Pacific War happened, Japan completely banned importing American movies in Korea. The reason why it regulated the imported foreign films is to increase the number of domestic movies, both Japanese and Korean. It was for making propaganda films for carrying the war.
      The second practice of the screen quota is from 1967 to the present year. It was designed to boom the Korean film industry. However,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s has not been improved in spite of the practice of the system. Moreover, the film industry has gone through the depression. Korean film agencies have occupied the Korean film market thanks to the protection by government. The founding of the film agencies has been strongly regulated. So has importing foreign movies. Under the special protection like this, Korean film agencies have been enjoying the monopoly.
      In the mean time, they have pursued income not by making quality movies but by importing foreign movies. As a result, cinema audiences tum away form Korean films and prefer foreign movies. Furthermore, the screen quota system hurts the relationship between film producers and distributors, imposing the duties only on theaters. In short, the screen quota system has satisfied neither film producers, theater runners, nor film goers. In other words, the excessive protection has weakened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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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it hurts the quality of the Korean movies. The number of days, for which Korean movies have to play on local screens, has been reduced to 73, starting on July 1st, 2006. Actually, it is 50 percent fewer than the previous year.
      In fact, Korea has implemented the screen quota. system two times. First, it was practiced from 1935 to 1945,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to regulate imported movies, especially American ones, as the Japanese government was to use movie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In 1935, the number of foreign movies screened had to be less than three fourths of the total. And they gradually reduced the size by two thirds in 1936, and again by half in 1937.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hen the Pacific War happened, Japan completely banned importing American movies in Korea. The reason why it regulated the imported foreign films is to increase the number of domestic movies, both Japanese and Korean. It was for making propaganda films for carrying the war.
      The second practice of the screen quota is from 1967 to the present year. It was designed to boom the Korean film industry. However,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s has not been improved in spite of the practice of the system. Moreover, the film industry has gone through the depression. Korean film agencies have occupied the Korean film market thanks to the protection by government. The founding of the film agencies has been strongly regulated. So has importing foreign movies. Under the special protection like this, Korean film agencies have been enjoying the monopoly.
      In the mean time, they have pursued income not by making quality movies but by importing foreign movies. As a result, cinema audiences tum away form Korean films and prefer foreign movies. Furthermore, the screen quota system hurts the relationship between film producers and distributors, imposing the duties only on theaters. In short, the screen quota system has satisfied neither film producers, theater runners, nor film goers. In other words, the excessive protection has weakened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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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한미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 영화진흥위원회 2003

      2 "한국영화자료편람" 영화진흥공사 205-, 1977

      3 "한국영화자료편람" 영화진흥공사 38-, 1977

      4 "쿼터제 철폐 둘러싸고 제협" 영화인협회 이해 상반 1968.8.31

      5 "초창기 한국영화사연구-영화의 전래와 수용" 중앙대학교 대학원 25-28, 1992

      6 "위대한 한국인 나운규" 한길사 164-, 1997.6

      7 "우수국산영화의 기준은 ▲전년도 중에 문교부 상영허가를 필한 작품으로서 ▲35미리 이상으로 극영화는 8 문화영화는 4 000피트 이상이어야 하며 ▲우수 국산영화의 선정은 1년에 1회 시행하며 1회에 5편 이내로 한정했다."

      8 "신필림-한국영화기업화의 가능과 한계" (14) : 428-, 1998.12

      9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단체는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및 영화인대책위원회이며 한미 FTA 반대운동을 하는 조직은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가 대표적이다."

      10 "등록기준은 1955년 4월 10일부터 1961년 8월 31일까지 기간 동안의 제작편수를 일정 기준에 따라 사정한 평점이 15 이상인 영화사에 한해 등록할 수 있으며 기준에 미달하는 영화사는 몇 개 회사가 합동하여 평점을 채우면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1 "한미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 영화진흥위원회 2003

      2 "한국영화자료편람" 영화진흥공사 205-, 1977

      3 "한국영화자료편람" 영화진흥공사 38-, 1977

      4 "쿼터제 철폐 둘러싸고 제협" 영화인협회 이해 상반 1968.8.31

      5 "초창기 한국영화사연구-영화의 전래와 수용" 중앙대학교 대학원 25-28, 1992

      6 "위대한 한국인 나운규" 한길사 164-, 1997.6

      7 "우수국산영화의 기준은 ▲전년도 중에 문교부 상영허가를 필한 작품으로서 ▲35미리 이상으로 극영화는 8 문화영화는 4 000피트 이상이어야 하며 ▲우수 국산영화의 선정은 1년에 1회 시행하며 1회에 5편 이내로 한정했다."

      8 "신필림-한국영화기업화의 가능과 한계" (14) : 428-, 1998.12

      9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단체는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및 영화인대책위원회이며 한미 FTA 반대운동을 하는 조직은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가 대표적이다."

      10 "등록기준은 1955년 4월 10일부터 1961년 8월 31일까지 기간 동안의 제작편수를 일정 기준에 따라 사정한 평점이 15 이상인 영화사에 한해 등록할 수 있으며 기준에 미달하는 영화사는 몇 개 회사가 합동하여 평점을 채우면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11 "국산영화의 외국 수출에 대해서는 ▲ 수출지에서 10일간 이상 상영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우리나라 해외공관의 증명서와 ▲ 수출지에서 2 500달러 이상의 외화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우리나라 해외공관의 증명서를 첨부하면 해당 영화사에 외국영화 수입권을 부여했다."

      12 "朝鮮に於ける映畵國策に就て" p.45 :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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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28 학술지등록 한글명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 Academia-Industrial cooperatio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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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Korean Academic Inderstrial Society -> The Korea Academia-Industrial cooperation Society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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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8 0.68 0.6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6 0.61 0.842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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