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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沙 李廷龜의 對明 외교활동 - 선조와 광해군대를 중심으로 - = A Study on the Diplomatic Activities to the Ming taken by Lee, Jeong-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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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n the chaos of Japan’s invasion in the 16th century and change of Ming and Q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a member of the East Asia could be free. Lee, Jung-goo is a person who worked in this time.
      Lee, Jung-goo had been to Beijing for 2 times at the age of Sunjo and Gwanghaegun as he distinguished himself in matters of diplomacy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was sent to Beijing for the first time to justify the case that Jung, Eung-tae falsely accused and he was chosen for the second time to give a petition the king for proclaiming Gwanghaegun to the crown prince. And he was sent for the 3rd time to request an ritual costume of Gongbin Kim-ssi who was a biological mother of Gwanghaegun and he was transferred to represent the position of Joseon Dynasty to Ming Dynasty who doubted collusion with Qing. Like this, his mission was often two-dimensional issues which surrounded Joseon Dynasty and Ming Dynasty and often assumed a complicated aspect as it was involved in international conflicts and Japan or Qing. On all such occasions, he should fulfill his duty and find a way for security and profit of his own country.
      Of course, the diplomatic line which Lee, Jung-goo pursued was not in agreement with that of sovereign of the time and his diplomatic activities were not always successful. Also, he could sometimes accomplish the task easily because of the Ming Dynasty and Joseon Dynasty’s effort not to cause diplomatic friction as possible.
      But Lee, Jung-goo could solve the diplomatic problem based on the wide information network, accurate circumstantial judgement, prompt action ability with his literary attainments. He was a ‘Hwagooksudan(華國手段)’ who sovereign of the time trusted, that is, he was a diplomat who brought great honor to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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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chaos of Japan’s invasion in the 16th century and change of Ming and Q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a member of the East Asia could be free. Lee, Jung-goo is a person who worked in this time. Lee, Jung-goo had ...

      In the chaos of Japan’s invasion in the 16th century and change of Ming and Qing Dynasty in the 17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a member of the East Asia could be free. Lee, Jung-goo is a person who worked in this time.
      Lee, Jung-goo had been to Beijing for 2 times at the age of Sunjo and Gwanghaegun as he distinguished himself in matters of diplomacy afte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was sent to Beijing for the first time to justify the case that Jung, Eung-tae falsely accused and he was chosen for the second time to give a petition the king for proclaiming Gwanghaegun to the crown prince. And he was sent for the 3rd time to request an ritual costume of Gongbin Kim-ssi who was a biological mother of Gwanghaegun and he was transferred to represent the position of Joseon Dynasty to Ming Dynasty who doubted collusion with Qing. Like this, his mission was often two-dimensional issues which surrounded Joseon Dynasty and Ming Dynasty and often assumed a complicated aspect as it was involved in international conflicts and Japan or Qing. On all such occasions, he should fulfill his duty and find a way for security and profit of his own country.
      Of course, the diplomatic line which Lee, Jung-goo pursued was not in agreement with that of sovereign of the time and his diplomatic activities were not always successful. Also, he could sometimes accomplish the task easily because of the Ming Dynasty and Joseon Dynasty’s effort not to cause diplomatic friction as possible.
      But Lee, Jung-goo could solve the diplomatic problem based on the wide information network, accurate circumstantial judgement, prompt action ability with his literary attainments. He was a ‘Hwagooksudan(華國手段)’ who sovereign of the time trusted, that is, he was a diplomat who brought great honor to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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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17세기 明․淸 교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조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月沙 李廷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정구는 임진왜란 이후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선조대와 광해군대에 각각 2차례씩 북경을 다녀왔다. 1차 사행은 丁應泰가 조선을 誣告한 사건을 辨誣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2차 사행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奏請하기 위해서 선정되었다. 3차 사행은 광해군의 생모인 恭嬪 金氏의 冠服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4차 사행은 후금과 조선의 내통을 의심하는 명에게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이처럼 그의 임무는 때로는 조선과 명을 둘러싼 평면적인 사안이기도 했고, 때로는 일본이나 후금과 연계되어 국제적 대립관계에 얽히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업무를 완수하고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모색해야 했다.
      물론 이정구가 추구했던 외교노선이 항상 당대의 국왕들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외교활동이 언제나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가능하면 외교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명과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사행업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완수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정구는 그의 문학적 소양과 함께 넓은 정보 네트워크, 정확한 상황 판단력, 신속한 대응 능력을 바탕으로 외교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군주들이 신임한 ‘華國手段’, 즉 나라를 빛내는 능력을 가진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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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17세기 明․淸 교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조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月沙 李廷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17세기 明․淸 교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조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月沙 李廷龜는 바로 이런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정구는 임진왜란 이후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선조대와 광해군대에 각각 2차례씩 북경을 다녀왔다. 1차 사행은 丁應泰가 조선을 誣告한 사건을 辨誣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2차 사행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奏請하기 위해서 선정되었다. 3차 사행은 광해군의 생모인 恭嬪 金氏의 冠服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4차 사행은 후금과 조선의 내통을 의심하는 명에게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차출되었다. 이처럼 그의 임무는 때로는 조선과 명을 둘러싼 평면적인 사안이기도 했고, 때로는 일본이나 후금과 연계되어 국제적 대립관계에 얽히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업무를 완수하고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모색해야 했다.
      물론 이정구가 추구했던 외교노선이 항상 당대의 국왕들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며, 그의 외교활동이 언제나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가능하면 외교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명과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인해 사행업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완수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정구는 그의 문학적 소양과 함께 넓은 정보 네트워크, 정확한 상황 판단력, 신속한 대응 능력을 바탕으로 외교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군주들이 신임한 ‘華國手段’, 즉 나라를 빛내는 능력을 가진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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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楊雨뢰, "李廷龜의 詩文을 통해서 본 明代 中?韓文化交流" 국학연구원 139 (139): 315-346, 2007

      2 우응순, "李廷龜의 文學思想, In 韓國文學思想史" 계명문화사 1991

      3 김한규, "한중관계사Ⅱ" 아르케 1999

      4 송정수, "중국의 역사(대명제국)" 도서출판 혜안 2006

      5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6 계승범,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조선시대사학회 (34) : 5-33, 2005

      7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8 조영록, "임진왜란 전후 명과, 조선" 사명당기념사업회 1999

      9 오세현, "월사 이정구의 문한활동과 학통 의식" 51 : 2005

      10 박영호, "월사 이정구의 문학관 연구" 5 : 1989

      1 楊雨뢰, "李廷龜의 詩文을 통해서 본 明代 中?韓文化交流" 국학연구원 139 (139): 315-346, 2007

      2 우응순, "李廷龜의 文學思想, In 韓國文學思想史" 계명문화사 1991

      3 김한규, "한중관계사Ⅱ" 아르케 1999

      4 송정수, "중국의 역사(대명제국)" 도서출판 혜안 2006

      5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6 계승범, "조선감호론 문제를 통해 본 광해군대 외교 노선 논쟁" 조선시대사학회 (34) : 5-33, 2005

      7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8 조영록, "임진왜란 전후 명과, 조선" 사명당기념사업회 1999

      9 오세현, "월사 이정구의 문한활동과 학통 의식" 51 : 2005

      10 박영호, "월사 이정구의 문학관 연구" 5 : 1989

      11 안나미, "월사 이정구의 「임진피병록」에 관한 고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2005

      12 노경희, "월사 이정구 한시 연구- 관료문인으로서의 입지와 그 시세계" 8 : 2003

      13 유호석, "외교활동과 예론을 통해서 본 이정구의 현실인식" 전북사학회 (34) : 37-76, 2009

      14 정병철, "명말의 화북사회와 조선의 왜란" 10 : 1999

      15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16 "象村集"

      17 "谿谷集"

      18 "苟全別集"

      19 "苔泉集"

      20 "簡易集"

      21 "白沙集"

      22 "燃藜室記述"

      23 江文, "熊廷弼传略, In 武汉文史资料" 2004

      24 "淸實錄"

      25 "淸史稿"

      26 "浦渚集"

      27 "東溟先生文集"

      28 조영록, "東林黨과 閹黨의 투쟁, In 明末․淸初社會의 照明" 한울아카데미 1990

      29 张德信, "朝鲜辨诬陈奏上使赴明前后 - 以李廷龟庚申朝天录为中心" 28 (28): 2007

      30 "朝鮮王朝實錄"

      31 禹應順, "朝鮮中期 四大家의 文學論 연구" 高麗大學校 大學院 1990

      32 "月沙集"

      33 이종찬, "月沙 문학관과 辨誣錄" 2 : 1977

      34 岡野昌子, "明末臨淸民變考, In 明淸時代の政治と社会"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83

      35 李琳琦, "明末御边良将熊廷弼, In 军事历史" 1994

      36 김형석, "明末 東亞情勢와 徐光啓의 外交論" 8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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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明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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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明史"

      41 孟森, "明代史" 華世出版社 1975

      42 陸戦史硏究普及会, "明と淸の決戰" 原書房 1967

      43 三田村泰助, "明と淸" 河出書房新社 1990

      44 "恭聖王后追崇都監儀軌(奎 14880)"

      45 계승범, "恭嬪 追崇 과정과 광해군의 母后 문제" 민족문화연구원 (48) : 373-406, 2008

      46 "徐光啓集"

      47 李红权, "徐光启‘亟遣使臣监护朝鲜’研究, In 中国经济史论坛" 2006

      48 "尊周彙編"

      49 稻葉岩吉, "大阪屋號書店" 大阪屋號書店 1933

      50 "再造藩邦志"

      51 "五峯集"

      52 曹国庆, "万历皇帝十三讲" 中央广播电视大学出版社 2010

      53 허지은, "丁應泰의朝鮮誣告事件을 통해 본 조명관계" 한국사학회 75 (75): 169-205, 2004

      54 노경희, "17세기초 문관출신 明使 接伴과 韓中 문학교류" 한국한문학회 42 (42): 223-25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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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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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7 0.87 0.9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98 2.253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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