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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초기 陵幸의 정치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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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시대 능행(陵幸)은 국왕의 권위를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과시하고, 행차 중에 상언(上言) · 격쟁(擊錚) 등을 허용하여 어진 군주의 상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능행 과정에서 국왕 친림 하의 군사훈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고종 초기의 능행은 이와 같은 일반적 경향을 띠면서도 19세기 중엽 조선이 처한 독특한 대내외적 조건으로 인해 이전 시기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고종의 능행은 즉위 1년(1864)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고종의 왕통상 선고(先考)에 해당하는 익종의 수릉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과도 관련하여 국왕 친림하의 군사훈련이 병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격의 능행은 1870년 무렵까지 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성인으로 성장한 즉위 8년(1871) 무렵부터 고종은 자신이 직접 통치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능행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즉위 9년(1872) 개성 행차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제릉과 후릉에 참배하고 개경 행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사망한 군사의 수가 29명에 이르는 참사가 발생했으나, 고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다음 일정을 강행하였다. 조선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려 태조의 현릉에 친히 제사하는 한편 고려 왕실의 후예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포섭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는 대원군이 간여할 수 없는 행사를 주도하여 통치권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가 조선왕실의 단순한 구성원을 넘어 국가 통치의 주체임을 천명하는 행위였다고 생각된다.
      국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0년 말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왔고, 이를 계기로 고종은 적극적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하며 이전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진무영마저 폐지되자 대원군은 남연군 묘 참배를 거쳐 양주에 은거함으로써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개성 참배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능행을 재개하여 한 계절에 11기 참배라는 이례적인 대규모 행사로 대응하였다. 사친(私親)을 내세우는 대원군에 대해 국통(國統)을 강조하는 국왕의 대응인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5년 6월 대원군이 서울로 돌아옴으로써 양 세력의 갈등은 해소되어 국왕 고종의 친정체제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8년간 외교 현안이 되어왔던 일본의 서계(書契)문제는 한때 평화적 해결 기미를 보였다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채 운양호 사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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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능행(陵幸)은 국왕의 권위를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과시하고, 행차 중에 상언(上言) · 격쟁(擊錚) 등을 허용하여 어진 군주의 상징을 만들어내기도 ...

      조선시대 능행(陵幸)은 국왕의 권위를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과시하고, 행차 중에 상언(上言) · 격쟁(擊錚) 등을 허용하여 어진 군주의 상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능행 과정에서 국왕 친림 하의 군사훈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고종 초기의 능행은 이와 같은 일반적 경향을 띠면서도 19세기 중엽 조선이 처한 독특한 대내외적 조건으로 인해 이전 시기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고종의 능행은 즉위 1년(1864)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고종의 왕통상 선고(先考)에 해당하는 익종의 수릉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과도 관련하여 국왕 친림하의 군사훈련이 병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격의 능행은 1870년 무렵까지 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성인으로 성장한 즉위 8년(1871) 무렵부터 고종은 자신이 직접 통치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능행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즉위 9년(1872) 개성 행차는 주목할 만한 행사였다. 제릉과 후릉에 참배하고 개경 행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사망한 군사의 수가 29명에 이르는 참사가 발생했으나, 고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다음 일정을 강행하였다. 조선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려 태조의 현릉에 친히 제사하는 한편 고려 왕실의 후예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신민으로 포섭하는 다양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는 대원군이 간여할 수 없는 행사를 주도하여 통치권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가 조선왕실의 단순한 구성원을 넘어 국가 통치의 주체임을 천명하는 행위였다고 생각된다.
      국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원군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0년 말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왔고, 이를 계기로 고종은 적극적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하며 이전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진무영마저 폐지되자 대원군은 남연군 묘 참배를 거쳐 양주에 은거함으로써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개성 참배 이후 2년간 중단되었던 능행을 재개하여 한 계절에 11기 참배라는 이례적인 대규모 행사로 대응하였다. 사친(私親)을 내세우는 대원군에 대해 국통(國統)을 강조하는 국왕의 대응인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5년 6월 대원군이 서울로 돌아옴으로써 양 세력의 갈등은 해소되어 국왕 고종의 친정체제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8년간 외교 현안이 되어왔던 일본의 서계(書契)문제는 한때 평화적 해결 기미를 보였다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채 운양호 사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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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Neunghaeng of the Joseon Dynasty used to show a king's authority to all people and proclaim the justification of the royal succession to the throne. During the parade visit the incumbent king would demonstrate the symbol of a wise monarch by permitting people Sangeon or Gyeokjaeng. Also while making a parade visit, the military troops were drilled at the king's presence. Neunghaeng during the initial period of King Gojong assumed this general feature and at the same time, showed a different feature in the mid-19th century from that of those previous periods, due to exclusive conditions that the Joseon Dynasty faced at home and abroad.
      King Gojong's Neunghaeng started in 1864, the 1st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In the period, there was mainly given the focus on Sureung to be considered first of all in the royal tradition during the period of King Gojong. Besides while King Gojong made such a parade visit, military troops were drilled at the King's presence in an effort to be prepared for the invasion from western super powers. Having this character, Neunghaeng was led by Daewongun by 1870.
      From 1871, the 8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when the king grew up and became an adult, he showed his will that he would stop the nation from being ruled by Daewongun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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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unghaeng of the Joseon Dynasty used to show a king's authority to all people and proclaim the justification of the royal succession to the throne. During the parade visit the incumbent king would demonstrate the symbol of a wise monarch by permittin...

      Neunghaeng of the Joseon Dynasty used to show a king's authority to all people and proclaim the justification of the royal succession to the throne. During the parade visit the incumbent king would demonstrate the symbol of a wise monarch by permitting people Sangeon or Gyeokjaeng. Also while making a parade visit, the military troops were drilled at the king's presence. Neunghaeng during the initial period of King Gojong assumed this general feature and at the same time, showed a different feature in the mid-19th century from that of those previous periods, due to exclusive conditions that the Joseon Dynasty faced at home and abroad.
      King Gojong's Neunghaeng started in 1864, the 1st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In the period, there was mainly given the focus on Sureung to be considered first of all in the royal tradition during the period of King Gojong. Besides while King Gojong made such a parade visit, military troops were drilled at the King's presence in an effort to be prepared for the invasion from western super powers. Having this character, Neunghaeng was led by Daewongun by 1870.
      From 1871, the 8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when the king grew up and became an adult, he showed his will that he would stop the nation from being ruled by Daewongun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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