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광개토태왕의 패려 정벌과 요동순수 = The Great King Kwanggaeto’s Conquest of Paeryeo and Liaodong Inspection-rounding

      한글로보기

      https://www.riss.kr/link?id=A99771678

      • 0

        상세조회
      • 0

        다운로드
      서지정보 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廣開土太王의 무훈을 전하는 陵碑文의 정복기사 첫머리는 稗麗정벌 기사로 장식되어 있는 데, 왜 고구려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두인 廣開土境의 출발점이 당대 고구려의 호적수인 백제나 後...

      廣開土太王의 무훈을 전하는 陵碑文의 정복기사 첫머리는 稗麗정벌 기사로 장식되어 있는 데, 왜 고구려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두인 廣開土境의 출발점이 당대 고구려의 호적수인 백제나 後燕이 아니라 정체가 모호한 패려로 기술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기사를 분석하였다.
      먼저 영락 5년 기사는 단일 기사가 아니라 패려 정벌과 遼東巡狩기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전반부의 패려는 시라무렌하 유역에서 유목하던 契丹의 일부임을 재확인하고 그 주지인 염수구는 시라무렌하에서 遼帝國의 수도인 上京臨潢府사이의 구릉지대로 추정하였으며, 능비문의 원정기록을 『삼국사기』광개토왕 원년 조 기사와 비교하여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작전임을 논증하였다.
      후반부의 요동순수 기사의 사실성 여부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요동 지배시점에 대해서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고구려의 요동진출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하여 고국양왕이 요동에 진출한 385년 이후 후연은 요동에 대한 전면적인 관할을 포기하고 방어와 후퇴가 용이한 千山산맥 이서의 平郭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현도군이 관할하였던 요동동부는 고구려가 관할하였음을 지적하고 비문의 순수 기사는 허구나 과장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생생히 전하는 역사기록임을 밝혔다.
      패려 정벌을 통하여 군마를 다량으로 획득한 고구려가 그 이듬해 숙적인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유역의 생산지대를 획득한 것은 초원 원정의 효과였다. 이처럼 패려 정벌은 유목민족을 물리친 단순한 1회적 승리가 아니라 광개토태왕대 고구려 대외 팽창의 전기가 되는 대사건이었으며, 요동 동남부 지역의 순수 기사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으로 이후 후연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기선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사관이 훈적비의 서두를 패려 정벌 기사로 장식하였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더보기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hich reports the Great King Kwanggaeto’s feats of arms begins with the record of his conquest of Paeryeo(稗麗). This paper analyses the record along with the question why the starting point of the wide-open territ...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hich reports the Great King Kwanggaeto’s feats of arms begins with the record of his conquest of Paeryeo(稗麗). This paper analyses the record along with the question why the starting point of the wide-open territory symbolizing the glory of Koguryo was recorded not as either Baekje or Later Yan(後燕) both of whom were Koguryo’s rivals but as Paeryeo whose identity was vague.
      Firstly, it is pointed out that the article on the 5th year of Yeongrak(永樂) is not of a single event but consists of two separate events which are of the conquest of Paeryeo and of Liaodong inspection-rounding. Paeryeo in the first event was re-identified as a nomadic Khitan sub-tribe in Xar Moron river valley. It was presumed that Yeomsugu(鹽水丘), Paeryeo’s homeland, was the basin between Xar Moron river and Sang-gyeong Yimhuangbu(上京臨潢府) that was the capital city of Liao empire. Through a comparison between the conquest record in the stele and the record of the 1st year of Kwanggaetowang in Samguksagi, it is verified that those two records are not of different events but of the very same military campaign.
      Regarding the factuality of the Liaodong inspection-rounding record in the second half of the article, the academia does not agree on the time of Koguryo’s conguest of Liaodong Area. Yet, through stepwise analyses on the process of Koguryo’s conquest of Liaodong, this paper clarifies that after Kogukyangwang’s advance toward Liaoding in 385, Later Yan gave up its governance over Liaodong and moved to Pyeong-guak(平郭) in the west of Qian mountains. Also, as it is pointed out that the eastern Liaodong governed by Xuantu Commandery was captured by Koguryo, this paper clarifies that the Liaodong inspection-rounding record in the stele is neither a fiction nor a exaggeration but a historical record reporting such facts.
      It was the effect of the grassland expedition that Koguryo acquired a lot of war-horse through the conquest of Paeryeo and then the next year attacked Baekje and captured the productive area in the Han river valley. Accordingly, the conquest of Paeryeo was not a one-time victory against nomadic people but an important turning point for Koguryo’s expansion during Kwanggaetotaewang’s reign. The article about the inspection-rounding in the southeastern Liaodong region is also a record reporting real facts; and the inspection-rounding can be regarded as a momentum in which Koguryo took an advantage of fierce war against the Later Yan. This is why Koguryo historian began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of Kwanggaetotaewang’s feats of arms with the record of the conquest of Paeryeo.

      더보기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陵碑文의 구성과 북방관계기사
      • Ⅲ. 稗麗 정토전의 내용과 성격
      • Ⅳ. 요동 순수의 역사적 의미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陵碑文의 구성과 북방관계기사
      • Ⅲ. 稗麗 정토전의 내용과 성격
      • Ⅳ. 요동 순수의 역사적 의미
      •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遼史"

      2 "梁書"

      3 任世權,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1) 광개토왕비(圖錄篇" 한국국학진흥원 2002

      4 김한규,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 2004

      5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In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6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91 : 2001

      7 李基東, "백제사연구" 일조각 1996

      8 김경남, "백제 한성시대 후기의 북방경역" 69 : 2004

      9 임기환, "남북조기 한중 책봉, 조공 관계의 성격 -고구려, 백제의 책봉, 조공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32 : 13-54, 2003

      10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1 "遼史"

      2 "梁書"

      3 任世權,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1) 광개토왕비(圖錄篇" 한국국학진흥원 2002

      4 김한규,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 2004

      5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In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6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91 : 2001

      7 李基東, "백제사연구" 일조각 1996

      8 김경남, "백제 한성시대 후기의 북방경역" 69 : 2004

      9 임기환, "남북조기 한중 책봉, 조공 관계의 성격 -고구려, 백제의 책봉, 조공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32 : 13-54, 2003

      10 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11 이병도, "광개토왕의 웅략, In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2 김윤우, "광개토왕의 남하정복지에 대한 일고 - 관미성의 위치를 중심으로 -, In 차문섭교수 화갑기념 사학논총" 1989

      13 여호규, "광개토왕릉비의 서사구조와 훈적기사의 서술체계" 국립중앙박물관 2011

      14 李基東,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백제관계 기사의 검토" 17 : 1986

      15 문상종, "광개토왕릉비 영락 17년조 기사에 대한 재검토" 4 (4): 2001

      16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17 서영수, "광개토대왕능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 上" 96 : 1982

      18 윤일녕, "관미성위치고 -광개토대왕비문, 三國史記, 대동지지를 바탕으로-" 2 : 1990

      19 임기환, "고구려전기 산성연구" 82 : 1998

      20 임기환, "고구려의 요동진출과 영역" 45 : 2012

      21 박경철, "고구려의 동몽고 경영" 71 : 2005

      22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서경문화사 1998

      23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

      24 이도학,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2006

      25 정명광, "고구려 광개토왕대의 후연 정벌" 백산학회 (92) : 83-127, 2012

      26 이재성, "거란 고팔부 연맹의 형성과 해체" 27 : 1993

      27 田中俊明, "高句麗의 北方進出과『廣開土王碑文』-北方境域形成史에 있어서 廣開土王時代" 2 : 1996

      28 여호규, "高句麗와 慕容燕의 朝貢冊封關係연구, In 한국 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관계" 동북아역사재단 2006

      29 浜田耕策, "高句麗廣開土王陵碑文の硏究" 11 : 1974

      30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1989

      31 那珂通世, "高句麗古碑考" 47 : 1915

      32 강재광, "高句麗 廣開土王의 遼東確保에 관한 新考察- 廣開土王碑 ‘丁未年條’의 새로운 해석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 : 5-52, 2009

      33 "資治通鑑"

      34 손진기, "東北歷史地理 1~2" 흑룡강인민출판사 1989

      35 "晉書"

      36 공석구, "廣開土王의 遼西地方 進出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학회 (67) : 125-158, 2012

      37 井上直樹, "廣開土王의 對外關係와 永樂 5年의 對稗麗戰" 한국고대사학회 (67) : 201-245, 2012

      38 申采浩, "廣開土王의 北進政策과 鮮卑征服, In 朝鮮上古史, 단재신채호전집(상)" 을유문화사 1972

      39 공석구, "廣開土王陵碑의 동부여에 대한 고찰" 70 : 1990

      40 千寬宇, "廣開土王陵碑再論, In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일조각 1979

      41 임기환, "廣開土王碑에 보이는 百濟관련 기사의 檢討" 2005

      42 王健群, "廣開土王碑硏究" 역민사 1985

      43 武田幸男, "廣開土王碑文辛卯年條の再吟味, In 古代史論叢 上" 古代史論叢 1978

      44 武田幸男, "廣開土王碑原石拓本集成" 東京大學出版會 1988

      45 林基中,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東國大學校出版部 1995

      46 武田幸男, "廣開土王碑 からみた 高句麗の 領域支配" 78 : 1979

      47 서영수, "廣開土大王陵碑文의 정복기사 재검토 中" 119 : 1988

      48 方起東, "好太王碑, In 중국명저비첩선집27" 길림문사출판사 1999

      49 "北史"

      50 "三國志"

      51 "三國史記"

      52 여호규,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고구려의 대중인식(對中認識)과 대외정책" 한국역사연구회 (55) : 25-60, 2005

      53 여호규, "4세기-5세기 초 高句麗와 慕容‘燕’의영역확장과 지배방식 비교" 한국고대사학회 (67) : 81-123, 2012

      54 여호규,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국경 변천" 한국역사연구회 (84) : 169-213, 2012

      55 이성제, "4世紀 末 高句麗와 後燕의 關係- 396년 後燕의 廣開土王 冊封 問題를 중심으로 -" 한국고대사학회 (68) : 35-66, 2012

      56 이재성, "4~5세기 고구려와 거란" 14 : 2002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 0.6 0.7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3 0.59 1.723 0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