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開土太王의 무훈을 전하는 陵碑文의 정복기사 첫머리는 稗麗정벌 기사로 장식되어 있는 데, 왜 고구려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두인 廣開土境의 출발점이 당대 고구려의 호적수인 백제나 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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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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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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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太王의 무훈을 전하는 陵碑文의 정복기사 첫머리는 稗麗정벌 기사로 장식되어 있는 데, 왜 고구려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두인 廣開土境의 출발점이 당대 고구려의 호적수인 백제나 後...
廣開土太王의 무훈을 전하는 陵碑文의 정복기사 첫머리는 稗麗정벌 기사로 장식되어 있는 데, 왜 고구려 전성기를 상징하는 화두인 廣開土境의 출발점이 당대 고구려의 호적수인 백제나 後燕이 아니라 정체가 모호한 패려로 기술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기사를 분석하였다.
먼저 영락 5년 기사는 단일 기사가 아니라 패려 정벌과 遼東巡狩기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전반부의 패려는 시라무렌하 유역에서 유목하던 契丹의 일부임을 재확인하고 그 주지인 염수구는 시라무렌하에서 遼帝國의 수도인 上京臨潢府사이의 구릉지대로 추정하였으며, 능비문의 원정기록을 『삼국사기』광개토왕 원년 조 기사와 비교하여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작전임을 논증하였다.
후반부의 요동순수 기사의 사실성 여부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요동 지배시점에 대해서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고구려의 요동진출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하여 고국양왕이 요동에 진출한 385년 이후 후연은 요동에 대한 전면적인 관할을 포기하고 방어와 후퇴가 용이한 千山산맥 이서의 平郭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현도군이 관할하였던 요동동부는 고구려가 관할하였음을 지적하고 비문의 순수 기사는 허구나 과장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생생히 전하는 역사기록임을 밝혔다.
패려 정벌을 통하여 군마를 다량으로 획득한 고구려가 그 이듬해 숙적인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유역의 생산지대를 획득한 것은 초원 원정의 효과였다. 이처럼 패려 정벌은 유목민족을 물리친 단순한 1회적 승리가 아니라 광개토태왕대 고구려 대외 팽창의 전기가 되는 대사건이었으며, 요동 동남부 지역의 순수 기사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으로 이후 후연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기선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사관이 훈적비의 서두를 패려 정벌 기사로 장식하였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hich reports the Great King Kwanggaeto’s feats of arms begins with the record of his conquest of Paeryeo(稗麗). This paper analyses the record along with the question why the starting point of the wide-open territ...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hich reports the Great King Kwanggaeto’s feats of arms begins with the record of his conquest of Paeryeo(稗麗). This paper analyses the record along with the question why the starting point of the wide-open territory symbolizing the glory of Koguryo was recorded not as either Baekje or Later Yan(後燕) both of whom were Koguryo’s rivals but as Paeryeo whose identity was vague.
Firstly, it is pointed out that the article on the 5th year of Yeongrak(永樂) is not of a single event but consists of two separate events which are of the conquest of Paeryeo and of Liaodong inspection-rounding. Paeryeo in the first event was re-identified as a nomadic Khitan sub-tribe in Xar Moron river valley. It was presumed that Yeomsugu(鹽水丘), Paeryeo’s homeland, was the basin between Xar Moron river and Sang-gyeong Yimhuangbu(上京臨潢府) that was the capital city of Liao empire. Through a comparison between the conquest record in the stele and the record of the 1st year of Kwanggaetowang in Samguksagi, it is verified that those two records are not of different events but of the very same military campaign.
Regarding the factuality of the Liaodong inspection-rounding record in the second half of the article, the academia does not agree on the time of Koguryo’s conguest of Liaodong Area. Yet, through stepwise analyses on the process of Koguryo’s conquest of Liaodong, this paper clarifies that after Kogukyangwang’s advance toward Liaoding in 385, Later Yan gave up its governance over Liaodong and moved to Pyeong-guak(平郭) in the west of Qian mountains. Also, as it is pointed out that the eastern Liaodong governed by Xuantu Commandery was captured by Koguryo, this paper clarifies that the Liaodong inspection-rounding record in the stele is neither a fiction nor a exaggeration but a historical record reporting such facts.
It was the effect of the grassland expedition that Koguryo acquired a lot of war-horse through the conquest of Paeryeo and then the next year attacked Baekje and captured the productive area in the Han river valley. Accordingly, the conquest of Paeryeo was not a one-time victory against nomadic people but an important turning point for Koguryo’s expansion during Kwanggaetotaewang’s reign. The article about the inspection-rounding in the southeastern Liaodong region is also a record reporting real facts; and the inspection-rounding can be regarded as a momentum in which Koguryo took an advantage of fierce war against the Later Yan. This is why Koguryo historian began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of Kwanggaetotaewang’s feats of arms with the record of the conquest of Paeryeo.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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