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러시아 은세기 문화의 시초로서 러시아 상징주의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전 역사를 통해 가장 복잡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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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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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러시아 은세기 문화의 시초로서 러시아 상징주의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전 역사를 통해 가장 복잡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
본 연구는 러시아 은세기 문화의 시초로서 러시아 상징주의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전 역사를 통해 가장 복잡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은 1860년대식 물질주의적 유산에 대한 명백한 반향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에게 있어 상징은 세계관으로 나타나고, 이는 결국 인간의 창조 행위와 결부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상징주의적 세계관과 창작의 시학을 통해 러시아 은세기 문예부흥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19세기 말 유럽 사회는 철학적, 사상적 위기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적 불안에 직면한다. 19세기 유럽은 과학과 기술, 산업은 전례 없이 강세를 보였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그 신념과 법칙을 강요하며 여타 다른 지역에 자신의 문화를 전파했다. 증대하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감지되었고, 위기의식은 러시아에도 전해졌다. 러시아는 서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사회발전 단계를 겪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서유럽식 르네상스를 놓쳤지만, 러시아는 교육 받은 상류 계급을 통해 그 계몽의 힘을 드러냈다. 인텔리겐챠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의 작가나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으로 세기말적 현상에 빠져있었고, 그 가운데 빠른 균열의 조짐이 감지되었다.
균열은 유물론에서 비롯된 무신론에 대한 반향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신앙의 세기를 지나온 나라로서, 정교가 국교로서 정연하게 관리되는 국가였다. 이러한 러시아에서 서구의무신론은 필연적으로 호전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는 자유로운 진보주의자에게 있어 유물론은 자신의 문화를 위협하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념론(Idealism)이나 실증주의(Positivism)와 같은 다른 체제를 흡수했다. 그러나 무지에서 오는 카오스와 믿음에서 오는 가능성은 모두 ‘인식의 한계 너머’(beyond the limits of cognition)로 내몰렸고, 인류는 ‘도덕적 법칙’, 즉 ‘어떤 개인의 가치나 목적에 대한 느낌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칸트의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여태까지 꿈꿀 수 없었던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부여했고, 그 지배력을 점점 증가했다. 인류가 정언적 명령으로 무장한 다수의 이해를 위해 그 지배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종교는 잔여의 도덕심을 이식했다. 그러나 안나 파블로브나의 집이 은세기의 첫 번째 잡지인 쟈길레프의 『예술세계』(Мир искусства)의 사령탑이 되었던 1898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고귀한 필로소포바의 이타주의는 이미 쇼펜하우어와 보들레르의 유럽, 또한 극단적 이기주의를 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Человек из подполья)의 유럽으로 나타났다. ‘세상이 멸망해도 나는 차 한 잔을 마시겠다’고 지하생활자가 말했을 때,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시대인들에게 있어 도덕적 파탄을 의미했지만, 그 다음 세대에게 있어서는 단지 현실에 대한 정직한 증언일 뿐이었다. ‘인간(The Human Being)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라고 니체(Friedrich Nietschze)는 말했다. 이타주의도 더 이상 존중받지 못했다. ‘우리가 왜 약한 사람이 잘 살도록 도와야 하는가 ’ 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이는 도덕적인 안심 때문이라고 답해졌고, 그 다음에는 도덕적 안심에 수반되는 자기 만족감은 약한 자에 대한 강한 자의 폭압과 생명력의 말살로 이어진다는 설명이 수반되었다.
이렇게 끔찍한 선택적 상황에 대한 반동으로 강한 부정이 있었다. 심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잃어버린 확신을 찾으려는 지름길을 모색했다. 일부는 고답파(Parnassian)로 회귀했고, 자연세계에 비해 의식적으로 예술 세계를 선호했다. 다른 일부는 기이한 의식이나 강신술, 심령론에 복귀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보다 아카데믹하게 정신을 전환시켜, 과거 문화, 동양의 종교, 인간이 자연 세계와 보다 조화로운 시대의 과거신화의 재현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렇게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은 서구 인식론의 위기의 근원으로서 신앙의 위기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러시아에는 민중의 신앙으로 회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었고, 이는 러시아 상징주의 발생의 정신사적 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