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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골남씨와 수락산 玉流洞의 주인 남용익-한문학 자료가 지닌 인문 유산 콘텐츠로써의활용 방안을 겸하여- = Nam-Yong-Ik(南龍翼), the owner of Ok-Ryu-Dong(玉流洞), Su-Rak Mountain(水落山)and Dong-Hak-Gol-Nam's(東鶴골南氏) -Using Korean Chinese literature Materials as Humanities Heritage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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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25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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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plore the traces left by Hogok(壺谷) Nam-Yong-Ik(南龍翼, 1628∼1692 and his extended family(世系) in the area of Cheong-Hak-ri, Byeol-Nae-Myeon, Nam-Yang-Ju-Si and to use them as a humanities heritage. Nam-Yong-Ik and Dong-Hak-Gol-Nam’s are examples of people and families who left distinct traces in a region. The focus of this article is not on raising a specific individual and a specific family.
      In the past, Byeol-Nae-Myeon belonged to Song Mountain(松山), and the area of Cheong-Hak-ri, was called Dong-Hak-Gol(東鶴골), Dong-Hae- Gok(東海谷), and Do-Gok(陶谷). The relationship between Ui-Ryeong- Nam-Ga(宜寧南氏) and Song Mountain in Yang-Ju dates from Nam-Jae(南在), the founding contributor of the Joseon(朝鮮) Dynasty. But it was from Nam-Hyo-Ui(南孝義) in the 16th century when they revealed their presence as Dong-Hak-Gol-Nam-Ga(東鶴골南氏) based in Cheong-Hak-Ri. Nam-Hyo-Ui's sixth-generation descendant, Nam-Yong-Ik, changed from Seo-In(西人) to No-Ron(老論), and with the closing of the 17th century, his descendants rose to the ranks of the Gyeong-Hwa-Se-Jok(京華世族) and maintained the reputation of a prestigious family.
      Cheong-Hak-ri, Byeol-Nae-Myeon, served as their manor until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reason why there are still many Nam's inhabitants here is that the heritage of their ancestors, including family grave(先塋) and land, remains.
      While searching for its traces, I discovered that the grave of Nam- Yong-Ik’s Great-grandfather was being misinformed as grave of Nam- Yong-Ik and correct it. In addition, I found the head of Moon-In-Seok(文人石), a grave in Nam-Bok-Si(南復始), which was presumed to be stolen, and described the related information. Also I mentioned the last traces of Nam-Yong-Ik’s descendant at Cheong-Hak-Neighborhood Park in Cheong-Hak-ri.
      Ok-Ryu-Dong(玉流洞) of Su-Rak Mountain(水落山), a famous place in Dong-Hak-Gol is a place where Nam-Yong-Ik visited for life. Furthermore, the letters of “Ok-Ryu-Dong” engraved on the rock wall were recently discovered, allowing the specific tourist attractions of Nam-Yong-Ik to be specified. This area is still visited by many due to its beautiful natural landscape. Seeing that Korean literary materials need to be used here, I have introduced the poems and related records left behind by Nam- Yong-Ik.
      Ok-Ryu-Dong of Su-Rak Mountain is scenic spot. Accordingly, several opinions were presented, including the installation of a cultural heritage sign and the use of QR. In addition, I proposed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Heritage Notify Application" modeled after the "Safety Notify Application" and presented ideas on a platform for various subjects such as government offices, citizens, researchers, and cultural property owners to co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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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plore the traces left by Hogok(壺谷) Nam-Yong-Ik(南龍翼, 1628∼1692 and his extended family(世系) in the area of Cheong-Hak-ri, Byeol-Nae-Myeon, Nam-Yang-Ju-Si and to use them as a humanities heritage. Nam-Y...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plore the traces left by Hogok(壺谷) Nam-Yong-Ik(南龍翼, 1628∼1692 and his extended family(世系) in the area of Cheong-Hak-ri, Byeol-Nae-Myeon, Nam-Yang-Ju-Si and to use them as a humanities heritage. Nam-Yong-Ik and Dong-Hak-Gol-Nam’s are examples of people and families who left distinct traces in a region. The focus of this article is not on raising a specific individual and a specific family.
      In the past, Byeol-Nae-Myeon belonged to Song Mountain(松山), and the area of Cheong-Hak-ri, was called Dong-Hak-Gol(東鶴골), Dong-Hae- Gok(東海谷), and Do-Gok(陶谷). The relationship between Ui-Ryeong- Nam-Ga(宜寧南氏) and Song Mountain in Yang-Ju dates from Nam-Jae(南在), the founding contributor of the Joseon(朝鮮) Dynasty. But it was from Nam-Hyo-Ui(南孝義) in the 16th century when they revealed their presence as Dong-Hak-Gol-Nam-Ga(東鶴골南氏) based in Cheong-Hak-Ri. Nam-Hyo-Ui's sixth-generation descendant, Nam-Yong-Ik, changed from Seo-In(西人) to No-Ron(老論), and with the closing of the 17th century, his descendants rose to the ranks of the Gyeong-Hwa-Se-Jok(京華世族) and maintained the reputation of a prestigious family.
      Cheong-Hak-ri, Byeol-Nae-Myeon, served as their manor until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reason why there are still many Nam's inhabitants here is that the heritage of their ancestors, including family grave(先塋) and land, remains.
      While searching for its traces, I discovered that the grave of Nam- Yong-Ik’s Great-grandfather was being misinformed as grave of Nam- Yong-Ik and correct it. In addition, I found the head of Moon-In-Seok(文人石), a grave in Nam-Bok-Si(南復始), which was presumed to be stolen, and described the related information. Also I mentioned the last traces of Nam-Yong-Ik’s descendant at Cheong-Hak-Neighborhood Park in Cheong-Hak-ri.
      Ok-Ryu-Dong(玉流洞) of Su-Rak Mountain(水落山), a famous place in Dong-Hak-Gol is a place where Nam-Yong-Ik visited for life. Furthermore, the letters of “Ok-Ryu-Dong” engraved on the rock wall were recently discovered, allowing the specific tourist attractions of Nam-Yong-Ik to be specified. This area is still visited by many due to its beautiful natural landscape. Seeing that Korean literary materials need to be used here, I have introduced the poems and related records left behind by Nam- Yong-Ik.
      Ok-Ryu-Dong of Su-Rak Mountain is scenic spot. Accordingly, several opinions were presented, including the installation of a cultural heritage sign and the use of QR. In addition, I proposed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Heritage Notify Application" modeled after the "Safety Notify Application" and presented ideas on a platform for various subjects such as government offices, citizens, researchers, and cultural property owners to co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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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의 목적은 壺谷 南龍翼(1628∼1692)과 그의 世系가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일대에 남긴 자취를 탐구하고 그것을 인문 유산 콘텐츠로 활용하는 데 있다. 남용익과 의령남씨는 한 지역에 뚜렷한 종적을 남긴 인물과 가문의 예시로, 특정 개인과 특정 가문을 드높이는 데 이 글의 취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남양주시 별내면은 楊州 松山에 속했고 청학리 일대는 東鶴골, 東海谷, 陶谷 등으로 불렸다. 의령남씨와 양주 송산의 인연은 조선조 개국공신인 南在 때부터지만, 이들이 청학리를 근거지로 둔 ‘동학골남씨’로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는 16세기 南孝義 때부터이다. 남효의의 6세손인 남용익은 근기 서인에서 노론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18세기부터 구한말까지 경화세족으로 명성을 유지하였다.
      별내면 청학리 일대는 구한말까지 田莊으로 기능했다. 이곳에 거주하는 남씨가 아직도 많은 이유는 先塋과 땅을 비롯한 선조들의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자취를 찾아 답사하던 중 茂朱公 南復始 묘소가 남용익의 묘소로 誤認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간 도난이라 추정된 남복시 묘소의 문인석 머리를 발굴하고, 별내면 청학리 청학근린공원에 남용익의 世系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에 관해서도 조사하였다.
      수락산 玉流洞은 동학골의 명소로 남용익이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이는 󰡔호곡집󰡕 내 숱한 시로 증명된다. 더욱이 남용익과 그곳을 찾았던 李喜朝가 훗날 옥류동 암벽에 玉流洞 글자를 새겼는데, 최근 이 글자가 발견됨에 따라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현재 옥류폭포가 있는 곳으로 여전히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찾는 장소다. 한문학 자료를 매개로 시민들에게 향유될 필요가 있다고 보아 관련된 시와 기록을 소개하였다.
      자연경관과 역사 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수락산 옥류동은 명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이에 인문 유산의 콘텐츠화 방안으로 표석 설치와 QR 활용 등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묘소 고증과 유물 발견과정을 거치며 체감한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안전 신문고 Application”을 모델로 한 “문화재 신문고 Application”의 개발을 제안하였다. 이상의 약소한 아이디어가 관, 시민, 연구자, 문화재 소유주 등 다양한 주체가 협조할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플랫폼 구축에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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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壺谷 南龍翼(1628∼1692)과 그의 世系가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일대에 남긴 자취를 탐구하고 그것을 인문 유산 콘텐츠로 활용하는 데 있다. 남용익과 의령남씨는 한 지역에 ...

      이 글의 목적은 壺谷 南龍翼(1628∼1692)과 그의 世系가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일대에 남긴 자취를 탐구하고 그것을 인문 유산 콘텐츠로 활용하는 데 있다. 남용익과 의령남씨는 한 지역에 뚜렷한 종적을 남긴 인물과 가문의 예시로, 특정 개인과 특정 가문을 드높이는 데 이 글의 취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남양주시 별내면은 楊州 松山에 속했고 청학리 일대는 東鶴골, 東海谷, 陶谷 등으로 불렸다. 의령남씨와 양주 송산의 인연은 조선조 개국공신인 南在 때부터지만, 이들이 청학리를 근거지로 둔 ‘동학골남씨’로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는 16세기 南孝義 때부터이다. 남효의의 6세손인 남용익은 근기 서인에서 노론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18세기부터 구한말까지 경화세족으로 명성을 유지하였다.
      별내면 청학리 일대는 구한말까지 田莊으로 기능했다. 이곳에 거주하는 남씨가 아직도 많은 이유는 先塋과 땅을 비롯한 선조들의 유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자취를 찾아 답사하던 중 茂朱公 南復始 묘소가 남용익의 묘소로 誤認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간 도난이라 추정된 남복시 묘소의 문인석 머리를 발굴하고, 별내면 청학리 청학근린공원에 남용익의 世系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에 관해서도 조사하였다.
      수락산 玉流洞은 동학골의 명소로 남용익이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이는 󰡔호곡집󰡕 내 숱한 시로 증명된다. 더욱이 남용익과 그곳을 찾았던 李喜朝가 훗날 옥류동 암벽에 玉流洞 글자를 새겼는데, 최근 이 글자가 발견됨에 따라 구체적인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은 현재 옥류폭포가 있는 곳으로 여전히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찾는 장소다. 한문학 자료를 매개로 시민들에게 향유될 필요가 있다고 보아 관련된 시와 기록을 소개하였다.
      자연경관과 역사 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수락산 옥류동은 명승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이에 인문 유산의 콘텐츠화 방안으로 표석 설치와 QR 활용 등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묘소 고증과 유물 발견과정을 거치며 체감한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안전 신문고 Application”을 모델로 한 “문화재 신문고 Application”의 개발을 제안하였다. 이상의 약소한 아이디어가 관, 시민, 연구자, 문화재 소유주 등 다양한 주체가 협조할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플랫폼 구축에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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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권혁명, "한시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서울 남산지역의 문화유적과 한시 지도-" 한국언어문화학술확산연구소 51 : 255-290, 2020

      2 장유승, "한시 번역을 둘러싼 논쟁" 동양학연구원 (60) : 221-235, 2015

      3 권혁명, "한문 단편 소설 <王秀才娶得龍女說>의 문화콘텐츠화 방안 연구" 동양고전학회 (80) : 299-330, 2020

      4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3" 휴머니스트 2006

      5 김세호, "조선시대 퇴계원(退溪院)의 문화사" 한국고전연구학회 (47) : 193-220, 2019

      6 김세호, "조선시대 지방문학의 문헌분석을 통한 문화관광 콘텐츠의 활용 방안-전라남도 완도군의 완도(체도)를 중심으로" 한국고전연구학회 (43) : 139-164, 2018

      7 정출헌, "조선 전기 잡록과 『추강냉화』, 남효온의 깊은 슬픔과 시대정신" 민족문학사연구소 (54) : 143-183, 2014

      8 "의령남씨지재보"

      9 "의령남씨족보"

      10 이준 ; 이상화 ; 박은미 ; 조상명, "안전신고 제도(안전신문고) 도입에 따른 효과 분석" 한국방재안전학회 12 (12): 27-41, 2019

      1 권혁명, "한시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서울 남산지역의 문화유적과 한시 지도-" 한국언어문화학술확산연구소 51 : 255-290, 2020

      2 장유승, "한시 번역을 둘러싼 논쟁" 동양학연구원 (60) : 221-23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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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3" 휴머니스트 2006

      5 김세호, "조선시대 퇴계원(退溪院)의 문화사" 한국고전연구학회 (47) : 193-220, 2019

      6 김세호, "조선시대 지방문학의 문헌분석을 통한 문화관광 콘텐츠의 활용 방안-전라남도 완도군의 완도(체도)를 중심으로" 한국고전연구학회 (43) : 139-164, 2018

      7 정출헌, "조선 전기 잡록과 『추강냉화』, 남효온의 깊은 슬픔과 시대정신" 민족문학사연구소 (54) : 143-183, 2014

      8 "의령남씨지재보"

      9 "의령남씨족보"

      10 이준 ; 이상화 ; 박은미 ; 조상명, "안전신고 제도(안전신문고) 도입에 따른 효과 분석" 한국방재안전학회 12 (12): 27-41, 2019

      11 권혁명,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근역한문학회 51 : 289-318, 2018

      12 이종묵, "명승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9-50, 2022

      13 안대회,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 산처럼 2019

      14 이형주, "남양주에도 ‘옥류동’ 바위글씨 있다"

      15 남양주시 편찬위원회, "남양주시지"

      16 김보경, "김시습과 남효온, 추방된 비전과 굴원·초사 수용 - 조선전기 정신사의 한 조망대로서 -" 동방한문학회 (67) : 171-210, 2016

      17 류제헌,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의 지정 추이와 향후 과제: 지정기준을 중심으로" 1-27, 2022

      18 이상주, "구곡문화관광특구(九曲文化觀光特區)와 그 유교문화관광자원적(儒敎文化觀光資源的) 가치(價値)" 연민학회 33 : 273-334, 2020

      19 권혁명, "고전인물 발굴을 통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 -금헌 이장곤과 역사다큐멘터리-" 우리어문학회 (68) : 171-216, 2020

      20 권혁명, "고전 인물 발굴을 통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 나주 초동 팔현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학술확산연구소 38 : 213-257, 2017

      21 南有容, "雷淵集"

      22 李喜朝, "芝村集"

      23 李翊相, "梅澗集"

      24 "朝鮮王朝實錄"

      25 상명대학교 박물관, "文化遺蹟分布地圖"

      26 "承政院日記"

      27 南龍翼, "壺谷集"

      28 南龍翼, "壺谷漫筆"

      29 경기인물지 편찬위원회, "京畿人物志"

      30 정용건, "中宗代 官僚 文人의 학적 지향과 문학의식" 고려대 2020

      31 김보성, "19세기 詠物詩 비평과 문화콘텐츠적 가치-『龜磵詩話』와 『詩家點燈』을 중심으로" 동양한문학회 60 : 203-239, 2021

      32 김우정, "16~17세기 近畿 지역 서인계 문인의 교류와 古文辭" 한국한문학회 (56) : 193-2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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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7-10-30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Society for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KCI등재
      2017-10-12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Hanmun ->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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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7 0.77 0.7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 0.86 1.77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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