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양은 1588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주의 주학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정구를 찾아갔고 이후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 을 강마했다. 손기양은 임진왜란이 일...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7783423
2021
-
손기양 ; 손사익 ; 밀양 ; 오한집 ; 칠탄서원 ; Son Gi-yang(孫起陽) ; Son Sa-ik(孫思翼) ; Milyang(密陽) ; Ohanjip(聱 ; 漢集) ; Chiltan Seowon(七灘書院)
900
KCI등재
학술저널
5-31(27쪽)
0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손기양은 1588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주의 주학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정구를 찾아갔고 이후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 을 강마했다. 손기양은 임진왜란이 일...
손기양은 1588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주의 주학교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정구를 찾아갔고 이후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 을 강마했다. 손기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고 지방관으로 왜군을 막는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도의 퇴계학파 인물인 정경세·조호익·이윤우·이전·이준·성안의·신지제·여대로·조정·서사원·이후 경·손처눌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손기양은 조정의 당쟁이 심화되자 1609년 창원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 고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해 점필서원을 중수하고 밀양향교를 재건하였으며, 밀 양사림을 대표해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촉구하는 등 향촌사회 질서를 안정시키 고자 노력했다. 손기양 사후 그의 후손들은 유고를 정리하고 유허를 정비하였는데, 이 과정 에서 손기양의 퇴계학파 내 위상을 정립하고 학문적 권위를 형성하기 위해 노 력했다. ‘이황-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근기 남인 계보의 핵심 인물인 이익에 게 손기양의 행장을, ‘이황-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로 이어지는 영남 남 인의 핵심 인물인 이상정·이광정 형제에게 『오한집』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 한편, 칠탄서원을 건립하고 손기양을 향사하는 과정에서 이상정 이후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학자인 류치명은 「칠탄서원봉안문」과 「상향축문」을 지었으며, 이황의 10세 종손인 이휘녕은 「칠탄서원청절사상량문」을 지었는데, 이들은 퇴 계학파 내에서 칠탄서원 건립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기양은 퇴계학파 그중에서도 한강 정구 문인이자 밀양 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Son Gi-yang(孫起陽) passed the examination in 1588, and was appointed state school professor in Seongju the following year. At this time, he visited Jeong Gu, who was living in Seongju, and since then, he frequently exchanged letters and discussed ...
Son Gi-yang(孫起陽) passed the examination in 1588, and was appointed state school professor in Seongju the following year. At this time, he visited Jeong Gu, who was living in Seongju, and since then, he frequently exchanged letters and discussed scholarships. Whe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on Gi-yang organized an army and fought, and became a regional officer and worked hard to defend the Japanese army. In this process, Son Gi-yang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Jeong Gyeong- se, Jo Ho-ik, Yi Yun-u, Yi Jeon, Yi Jun, Seong An-eui, Sin Ji-je, Yeo Dae-ro, Jo Jeong, Seo Sa-won, Yi Hu-geong, and Son Che-nul, the Toegye schools of Gyeongsang Jwado. As the political party of the court intensified, Son Gi-yang left his office in 1609 at the end of Changwon governor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Milyang(密陽). Afterwards, he rebuilt the Jeompil Seowon and Milyang Hyanggyo, and tried to stabilize the local order on behalf of Milyang scholors. After Son Gi-yang s death, his descendants organized his writings and rearranged the ruins. In this process, they tried to establish the status of Son Gi- yang within the Toegye School and to form academic authority. Son Sa-ik(孫思翼) asked Yi Ik, who was a key person in the genealogy of Nam-in in metropolitan area, which lead to ‘Yi Hwang→Jeong gu→Heo Mok’, to write Son Gi-yang s biography. Also he asked brothers Yi Sang-jeong and Yi Gwang-jeong, who are the key persons of Nam-in in Yeongnam, who lead ‘Yi Hwang→Kim Seong-il→Jang Heung-hyo→Yi Hyeon-il→Yi Jae’, to correct Son Gi-yang s writing and write the preface. Afterwards, his descendants built Chiltan Seowon and performed a ritual of Son Gi-yang. At this time, Ryu Chi-myeong, the scholar representing Nam-in in Yeongnam, wrote “Chiltan Seowon Bonganmun” and “Sanghyangchukmun”, while Yi Hwi-nyeong, tht descendant of Yi Hwang, wrote “Chiltan Seowon Cheongjeolsa Sangryangmun”. These were the figures who could give the legitimacy of the construction of Chiltan Seowon within the Toegye School. Through this process Son Gi-yang became a member of the Toegye school and a scholar representing Milyang by his descendants.
목차 (Table of Contents)
참고문헌 (Reference)
1 "龍蛇日錄"
2 장동표, "조선후기 향촌 재지사족의 동향과향촌사회 활동 - 18세기 밀양지역 향촌지식인 사례를 중심으로 -" 부경역사연구소 (45) : 151-184, 2019
3 鄭景柱, "밀양의 퇴계 학맥" 퇴계연구소 (31) : 45-68, 2002
4 "茶山詩文集"
5 "聱漢集"
6 "竹圃集"
7 "湖溪答問"
8 "樊巖集"
9 "星湖全集"
10 "宣祖實錄"
1 "龍蛇日錄"
2 장동표, "조선후기 향촌 재지사족의 동향과향촌사회 활동 - 18세기 밀양지역 향촌지식인 사례를 중심으로 -" 부경역사연구소 (45) : 151-184, 2019
3 鄭景柱, "밀양의 퇴계 학맥" 퇴계연구소 (31) : 45-68, 2002
4 "茶山詩文集"
5 "聱漢集"
6 "竹圃集"
7 "湖溪答問"
8 "樊巖集"
9 "星湖全集"
10 "宣祖實錄"
12 孫八洲, "國譯・原文 聱漢先生文集" 빛남 1992
13 孫八洲, "國譯・原文 竹圃集" 빛남사 1997
14 孫八洲, "國譯・原文 七灘誌" 第一文化社 1989
15 "國朝文科榜目"
16 "乙酉八月司馬榜目"
17 "七灘誌"
18 孫八洲, "《七灘誌》所載 漢詩 硏究" 6 : 1991
19 장동표, "17세기 초반 밀양 재지사족 孫起陽의 향촌활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34) : 171-201, 2009
학술지 이력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 |
2005-04-26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The Korean Society of History of Historiography | ![]() |
2005-04-1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韓國史學史學報외국어명 : 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Historiography | ![]()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 |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47 | 0.4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1 | 0.54 | 1.937 | 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