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부산(『조선신보』『부산상황』), 인천(『인천경성격주상보』『신조선』), 원산(『원산시사』), 목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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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2006
학위논문(석사) --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 신문방송학과 , 2006. 2
2006
한국어
070.951 판사항(16)
서울
111 p. : 삽도 ; 26 cm.
지도교수: 김진홍
참고문헌: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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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부산(『조선신보』『부산상황』), 인천(『인천경성격주상보』『신조선』), 원산(『원산시사』), 목포(『목...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부산(『조선신보』『부산상황』), 인천(『인천경성격주상보』『신조선』), 원산(『원산시사』), 목포(『목포신보』『양자신문』), 군산(『군산신보』,『한남신보』) 등지 개항장과 서울(『한성신보』『대동신보』)의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몇몇 일인 민간지가 창간되었다.
이 시기의 일인 민간지의 기본적인 성격은 주로 일본 거류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상업적 수단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정보전달 목적만이 아닌 정치적 성격을 띤 신문들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즉 쿠마모토국권당 출신 아다치 켄조의 주도하에 일본 외무성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주한 일본공사관의 기관지격으로 창간되어 명성황후시해사건의 본부 역할을 한 『한성신보』, 일본 정부조직의 외부에서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대륙침략을 준비한 대륙낭인조직인 흑룡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부산의 『조선일보』, 일본 자유당에서 변호사 신분으로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다 정부의 단속을 피해 한국으로 도항한 아리후 주로에 의해 인천에서 창간된 『대한일보』 등이 그것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인 민간지도 전국 각지에 걸쳐서 발행되어 통감부 기관지와 함께 이른바 식민지언론을 형성하게 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광복 이전 한국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경영한 민간지의 창간과 발행, 종사자 그리고 이 신문들의 성격을 '한국인관'과 '합방론'을 고찰하여 살펴 봄으로써 당시 한국의 언론계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정책 또는 논리와 일본인 경영 신문의 연관성을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지배정책이 조선 사회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발현되었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하였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