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소설을 '저급한 희극성'에서 출발하여 '죽음의 비극성'을 지나 '겸허의 희극성'에 도착하는 작품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1)저급한 희극. <카라마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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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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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소설을 '저급한 희극성'에서 출발하여 '죽음의 비극성'을 지나 '겸허의 희극성'에 도착하는 작품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1)저급한 희극. <카라마조프 형제>는 마치 희곡처럼 등장인물 소개로 시작한다. 이어서 수도원에서 이뤄지는 가족 모임. 이 첫 장면은 화자에 의해서도 "배우들의 무대"이자 한 편의 "코미디"라고 예견된다. 그만큼 조화롭지 못한 상태의 인물들이 하나의 연극무대를 연상시키며 모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장면의 희극성은 마지막 장면의 희극성과는 다르다. 그 상이함은 웃음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희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현상은 웃음이다. 그런데 아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웃음을 크게 분류하면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기쁨과 환희의 웃음, 조소하는 차가운 웃음. 전자의 웃음은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웃는 모든 존재를 포괄하여 축제적인 성격을 띠는 반면, 후자의 웃음은 웃는 주체와 웃기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한다. 후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성은 상황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 있다. 희극적 상황은 그것을 겪어야 하는 인물들에게는 고통과 불안을 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관객이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차가운 웃음은 어떠한 상황에도 동화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있어서 가능하다. 그리고 하찮고 어리석고 한심한 작태에 대한 보고서가 바로 차가운 웃음이다. 기묘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첫 장면에서 그 희극성을 부각시키는 인물은 이반이다. 즉 그는 첫 장면의 관객이다.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드미트리와 표도르, 안절부절 못하는 알료샤, 심지어 이들에게 설교하는 조시마 장로도, 비록 코믹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더라도, 첫 장면의 코미디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이반만은 거리를 두고 냉정하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희극성이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그로 인한 광대짓으로 이어져 발현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수치와 굴욕에서 벌어지는 희극은 비극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굴욕을 낳는 것이 모욕과 증오이기에 그렇다.
2)죽음의 비극. 집안에서 벌어지는 저급한 코미디를 바라보는 이반은 비극의 인물이다. 부친 표도르 살해는 열정적으로 표도르를 증오하던 드미트리가 아니라 이반에 의해서 시작된다. 비극의 인물이기에 그는 죽음의 인물이기도 하다. 비극의 기반은 화해할 수 없는 절대적 대립이다.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비극적 대립을 초래하는 것은 모욕과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복수심이다. 표도르에 대한 드미트리의 분노, 자신을 버린 옛 남자에 대한 그루센카의 복수심, 카테리나와 그루센카의 대립, 심지어 조시마 시취사건으로 인한 알료샤의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분노, 개심하기 전 조시마의 결투 결심 등. 일류샤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받은 모욕에 분노한다. 그는 못난 아버지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고결한 영혼"으로 "정의를 위해서" 복수심에 불탄다. 이때 그는 여느 비극의 인물처럼 강하고 고고하다. 칼 야스퍼스가 강조하듯이 비극적 영웅은 자아가 고양되고 강화되어 온갖 한계와 선악 속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펼치는 강한 인물이다.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이러한 인물들을 대표하여 비극의 기반인 존재의 고고함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 바로 이반이고, 이반의 지성이 인간적 존재의 고고함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서는 죽음만이 횡행한다. 그리고 그의 지성을 함축하는 <대심문관>은 오히려 그의 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이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결국 이 소설에서 비극은 패한다. 그리고 비극의 패배는 인간적 논리, 작은 로고스의 패배를 뜻하며, 더 큰 로고스의 존재를 의미한다.
3)겸허의 희극. <카라마조프 형제>에는 죽음과 관련된 두 개의 플롯이 교차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의 플롯이 이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는 알료샤의 플롯이 갈려 진행된다. 이반과 같은 고민을 하던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의 죽음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조시마 장로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버려 성스러움에 이른 '성인'이다. 소설의 에피그라프는 이런 점과 연결되어 작품의 기반을 함축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에피그라프는 겸허함이 지닌 위대함과 생산성을 뜻한다. 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만한 채 자기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던 인물들이 타인을 받아들이고 서로 융합한다. 그래서 너와 나의 거리가 없는 축제적 성격의 웃음을 가능하게 한다. <카라마조프 형제>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낮아져서 이룬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