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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朝의 北京遷都와 盛京地域 = The Transfer of the Capital to Beijing by the Qing Empire and Mukde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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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policies implemented by the Qing empire in Manchuria after the Transition from Ming to Qing(明淸交替), especially focusing on the region of Mukden.
    In 1644, as soon as the Qing empire passage through Shanhaiguan and occupied Beijing, the capital of Ming dynasty, immediately transfer the capital from Mukden to Beijing. At the same time, the Eight Banners and their families moved to Beijing, and it is estimated that the total number of relocated peoples had reached 1 million. As a result of the army led by Chinese military leaders and their families entering China proper, Mukden was in a situation where almost all of its residents disappeared at once.
    For Manchus, Mukden meant the cradle of Qing empire. Therefore, when Qing transfer the capital from Mukden to Beijing, it immediately began to reorganize the ruling system in Mukden region. After designating Mukden as a secondary capital city, Qing set up garrisons of skeleton force and appointed ‘general of Mukden(盛京將軍)’ as the commander. In order to repopulate the region of Mukden and restore its land economy, in 1653 Qing issued the edict for repopulation and wasteland cultivation of Liaodong(遼東招民開墾令). Despite such a policy, its effect was limited. On the contrary, the number of so-called ‘wandering peoples(流民)’ who were not registered on the registry, increased rapidly, causing security problems.
    Furthermore, Shang Kaxi(尙可喜), who was stationed in Guangdong, asked for permission to retire, the movement of the Three Feudatories became closely related to the region of Mukden. This was because the Three Feudatories return from southwestern China to Mukden. The debate in the Qing imperial court over the return of the Three Feudatories to Mukden, was concerned with socio-economic issues in the Mukden area. The Qing was concerned that the return of the Three Feudatories with a huge population might cause a conflict with residents who had newly settled in the area of Mukden.
    Based on the above, we can say that the policies implemented by the Qing in Mukden region was not closely related to rule China proper, but the symbolic meaning that the region was the cradle of Qing empire had an important infl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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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policies implemented by the Qing empire in Manchuria after the Transition from Ming to Qing(明淸交替), especially focusing on the region of Mukden. In 1644, as soon as the Qing empire passage through ...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policies implemented by the Qing empire in Manchuria after the Transition from Ming to Qing(明淸交替), especially focusing on the region of Mukden.
    In 1644, as soon as the Qing empire passage through Shanhaiguan and occupied Beijing, the capital of Ming dynasty, immediately transfer the capital from Mukden to Beijing. At the same time, the Eight Banners and their families moved to Beijing, and it is estimated that the total number of relocated peoples had reached 1 million. As a result of the army led by Chinese military leaders and their families entering China proper, Mukden was in a situation where almost all of its residents disappeared at once.
    For Manchus, Mukden meant the cradle of Qing empire. Therefore, when Qing transfer the capital from Mukden to Beijing, it immediately began to reorganize the ruling system in Mukden region. After designating Mukden as a secondary capital city, Qing set up garrisons of skeleton force and appointed ‘general of Mukden(盛京將軍)’ as the commander. In order to repopulate the region of Mukden and restore its land economy, in 1653 Qing issued the edict for repopulation and wasteland cultivation of Liaodong(遼東招民開墾令). Despite such a policy, its effect was limited. On the contrary, the number of so-called ‘wandering peoples(流民)’ who were not registered on the registry, increased rapidly, causing security problems.
    Furthermore, Shang Kaxi(尙可喜), who was stationed in Guangdong, asked for permission to retire, the movement of the Three Feudatories became closely related to the region of Mukden. This was because the Three Feudatories return from southwestern China to Mukden. The debate in the Qing imperial court over the return of the Three Feudatories to Mukden, was concerned with socio-economic issues in the Mukden area. The Qing was concerned that the return of the Three Feudatories with a huge population might cause a conflict with residents who had newly settled in the area of Mukden.
    Based on the above, we can say that the policies implemented by the Qing in Mukden region was not closely related to rule China proper, but the symbolic meaning that the region was the cradle of Qing empire had an important infl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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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의 목적은 1644년에 단행된 北京遷都 이후 淸朝의 만추리아 정책과 전개양상을 특히 盛京 지역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데 있다. 주지하듯이 淸朝는 16 세기말 퉁구스계의 주션~만주인에 의해 건설된 국가로 당초 만추리아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지역국가였다. 1644년 淸朝가 산해관을 돌파하여 明의 수도 北京에입성하는데 성공하자 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동시에 八旗의 이주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원래 盛京에 거주하고 있던 旗人과 그 家屬· 奴僕의 대부분이 北京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최대 100만명에 달했으리라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漢地 정복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盛京 일대에 주둔하던 呉三桂를 비롯한 漢人降將의 병력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漢人降將 휘하의 군사와 그 家屬 약 20만명까지 추가로 빠져나감으로써 盛京 지역은 거의 모든 인구의 유출에 직면하게 되었다.
    盛京은 제국이 발흥한 發祥之地로서 그 의미가 각별하였다. 그런 까닭에 淸朝는 北京遷都에 발맞추어 즉각적으로 盛京 지역의 지배체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盛京을 陪都로 지정한 뒤 留守 부대인 駐防을 설치하고 그 사령관으로서 盛京將軍을 개설하였다. 盛京將軍이 盛京 일대의 駐防에 소속된 旗人을 관할하였다면, 행정단위로서는 설치된 府·州·縣에서는 民人을 통치하는, 이른바 旗民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도모하기 위하여 ‘遼東招民開墾令’을 반포하였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戶籍에 등재되지 않은 流民이 급증하며 치안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본토로 진군한 漢人 출신 降將들은 反淸 세력을 토벌한 공적을 인정받아 藩王에 봉해져 이후 三藩이라 불리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南王 尙可喜가 주둔지인 廣東을 떠나 盛京 지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上奏를 올린 것을 계기로 三藩의 동향은 盛京 지역과 다시 긴밀하게 맞물리게 된다. 三藩 세력이 귀환하고자 하는 지역이 盛京 일대였기 때문에 徹藩論의 핵심 의제는 三藩과 같은 대규모 집단의 이주를 승인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盛京 지역의 生計 문제에 집중되었다. 즉 遼東招民開墾令과 같은 정책을 통하여 불러 모은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새롭게 이주할 三藩 세력에 의해 빼앗길 우려가 조정 내부에서 국가적 현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처럼 盛京 일대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大淸의 초기 정책은 漢地 지배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 제국의 發祥之地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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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목적은 1644년에 단행된 北京遷都 이후 淸朝의 만추리아 정책과 전개양상을 특히 盛京 지역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데 있다. 주지하듯이 淸朝는 16 세기말 퉁구스계의 주션~만주인...

    본 논문의 목적은 1644년에 단행된 北京遷都 이후 淸朝의 만추리아 정책과 전개양상을 특히 盛京 지역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데 있다. 주지하듯이 淸朝는 16 세기말 퉁구스계의 주션~만주인에 의해 건설된 국가로 당초 만추리아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지역국가였다. 1644년 淸朝가 산해관을 돌파하여 明의 수도 北京에입성하는데 성공하자 北京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동시에 八旗의 이주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원래 盛京에 거주하고 있던 旗人과 그 家屬· 奴僕의 대부분이 北京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최대 100만명에 달했으리라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漢地 정복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盛京 일대에 주둔하던 呉三桂를 비롯한 漢人降將의 병력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漢人降將 휘하의 군사와 그 家屬 약 20만명까지 추가로 빠져나감으로써 盛京 지역은 거의 모든 인구의 유출에 직면하게 되었다.
    盛京은 제국이 발흥한 發祥之地로서 그 의미가 각별하였다. 그런 까닭에 淸朝는 北京遷都에 발맞추어 즉각적으로 盛京 지역의 지배체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盛京을 陪都로 지정한 뒤 留守 부대인 駐防을 설치하고 그 사령관으로서 盛京將軍을 개설하였다. 盛京將軍이 盛京 일대의 駐防에 소속된 旗人을 관할하였다면, 행정단위로서는 설치된 府·州·縣에서는 民人을 통치하는, 이른바 旗民制가 실시되었다. 또한 외부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도모하기 위하여 ‘遼東招民開墾令’을 반포하였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戶籍에 등재되지 않은 流民이 급증하며 치안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본토로 진군한 漢人 출신 降將들은 反淸 세력을 토벌한 공적을 인정받아 藩王에 봉해져 이후 三藩이라 불리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平南王 尙可喜가 주둔지인 廣東을 떠나 盛京 지역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는 上奏를 올린 것을 계기로 三藩의 동향은 盛京 지역과 다시 긴밀하게 맞물리게 된다. 三藩 세력이 귀환하고자 하는 지역이 盛京 일대였기 때문에 徹藩論의 핵심 의제는 三藩과 같은 대규모 집단의 이주를 승인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盛京 지역의 生計 문제에 집중되었다. 즉 遼東招民開墾令과 같은 정책을 통하여 불러 모은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새롭게 이주할 三藩 세력에 의해 빼앗길 우려가 조정 내부에서 국가적 현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처럼 盛京 일대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大淸의 초기 정책은 漢地 지배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 제국의 發祥之地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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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훈, "청대 건륭기 만주족의 根本之地 만들기 -京師 旗人의 이주와 만주의 封禁을 중심으로-" 역사연구소 (72) : 267-305, 2011

    2 유지원, "이민과 개발:한중일 삼국인의 만주 이주의 역사" 동북아역사재단 2011

    3 Elliott, Mark C,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4 "順治朝八旗男丁滿文檔案選譯" (1) : 429-430,

    5 安雙成, "順康乾三朝八旗丁額淺析" (2) : 1983

    6 范承勲等纂, "雲南通志" 鳳凰出版社 2009

    7 김선민, "雍正帝의 盛京지역 통치" 명청사학회 (34) : 143-177, 2010

    8 伊把漢, "盛京通志" 京都大學附屬圖書館 近衛文庫藏

    9 矢野仁一, "滿洲近代史" 弘文堂 1941

    10 稻葉岩吉, "滿洲發達史(增訂版)" 日本評論社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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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順治朝八旗男丁滿文檔案選譯" (1) : 42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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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神田信夫, "淸朝史論考" 山川出版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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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平漢英輯, "國朝名世宏文" 北京出版社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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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八旗通志初集 点校本, 全8" 東北師範大學出版社 1985

    48 谷井陽子, "八旗制度の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5

    49 谷井陽子, "八旗制度の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5

    50 "仁祖實錄 = 仁祖大王實錄"

    51 叢佩遠, "中國東北史 第四卷" 吉林文史出版社 1998

    52 "世祖實錄 = 大淸世祖章皇帝實錄"

    53 塚瀬 進, "マンチュリア史研究:「満洲」六◯◯年の社会変容" 吉川弘文館 2014

    54 松浦 茂, "ヌルハチ[淸·太祖]の徙民政策" 67 (67): 1986

    55 中見立夫, "「滿蒙問題」の歴史的構圖" 東京大學出版會 2013

    56 中見立夫, "「滿蒙問題」の歴史的構圖" 東京大學出版會 2013

    57 Lee, Robert H. G, "The Manchurian frontier in Ch’ing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58 Elliott, Mark C, "The Limits of Tartary: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59 (59): 2000

    59 Isett, Christopher M, "State, peasant, and merchant in Qing Manchuria, 1644-186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

    60 Kessler, Lawrence D, "K’ang-Hsi and the Consolidation of Ch’ing Rule, 1661-1684"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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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4-12-17 학회명변경 한글명 : 동국사학회 ->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영문명 : Dongguk Historical Society -> Dongguk history & culture institute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10-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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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36 0.36 0.3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8 0.4 0.758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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