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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왕조례(王朝禮)와 사가례(私家禮)의 변주 ―국휼(國恤) 중 사가례 논의를 중심으로― = Variation of Royal Rituals and Family Rituals in the late Chosun Dynasty ―Focused on Family Rituals during the Royal Fu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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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40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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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후기 국휼은 사대부의 가례 실천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吉한 의례인 관례·혼례·제례의 시행은 국휼로 인한 슬픔의 표현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상례 역시 왕에 대한 尊尊과 ...

      조선후기 국휼은 사대부의 가례 실천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吉한 의례인 관례·혼례·제례의 시행은 국휼로 인한 슬픔의 표현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상례 역시 왕에 대한 尊尊과 부모에 대한 親親의 조율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국조오례의』 계령조에는 혼인과 제사 금지 규정이 있었지만, 16-17세기 사대부의 예학적 지식에는 어긋나는 측면이 많았다. 혼인의 경우, 주자의 「군신복의」를 토대로 관품에 따라 차등을 두고자 했다. 그러나 官制의 차이로 인해 「군신복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웠고, 『국조오례의』를 수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문적인 논의에 그칠 뿐이었다. 제사의 경우, 국가의 제사를 정지하는 상황에서 사가의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명분이 중시되었다. 자체적으로 시제를 금지하고 기제와 묘제를 간략히 지내는 등 평소의 行禮와는 차이를 보이고자 했다. 이러한 논의는 국휼로 인한 변례의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스스로의 行禮를 규정하기 위한 것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규제와는 분리되어 있었다.
      18세기 『국조상례보편』의 편찬은 사가례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동시에 사대부의 예학이 왕조례에 반영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혼인의 경우 숙종상을 계기로 「군신복의」에 따른 상복 개편이 이루어지고, 허혼의 차등화가 규정되었다. 『국조상례보편』에서는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내용이 수정되었고, 대상·내상·소상·소내상에 따른 구분이 명시되었다. 상례의 경우 장례는 국휼 중이라도 그대로 시행되었는데, 喪祭의 시행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였다. 『국조상례보편』의 편찬과정에서 영조는 상례란 효의 실천임을 강조하며 상제를 그대로 허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사대부의 예설과 인현왕후상 이후의 전례를 모두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1720년 숙종상에서 사가의 제사는 국가가 규제하지 않고, 다양한 예설에 따라 자체적으로 거행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런데 1758년 『국조상례보편』에서는 국휼 졸곡 전 기제와 묘제를 금지하는 규정이 마련되어 國制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규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해석의 차이를 두고 새로운 차원의 예학 논의들이 진행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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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royal funeral was a variable for family rituals, because people were in sadness. Nevertheless literary noblemen tried to do the right rites. The clause of warning about wedding and worship in Gukjo-oryeu was against the knowledge of ritual in 16-1...

      The royal funeral was a variable for family rituals, because people were in sadness. Nevertheless literary noblemen tried to do the right rites. The clause of warning about wedding and worship in Gukjo-oryeu was against the knowledge of ritual in 16-17th century chosun. Literary noblemen tried to follow ZhuXi's opinion on mourning dresses of sovereign and subject to grade in marriage and to stop worship before Jolgock of national funeral. But their dispute controversy was a personal, non-official claim.
      18th century, the clause of warning about wedding and worship was changed according to literary noblemen's knowledge of ritual. This provision was more specific and refined, and was legalized in Gukjo-Sangryebopyeon. It was be said that it was a part of the legal system maintenance project and the practical direction due to the development and accumulation of ritual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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