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에 즈음하여 주요 오순절 교단들은 흑인들의 인권 쟁취 추진을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그 해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인내는 인종 차별과 혐오를 용납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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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학위논문(석사) --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 교역학전공 , 2006. 2
2005
한국어
234.8 판사항(4)
248.4 판사항(21)
전북특별자치도
89p. ; 26cm
참고문헌: p. 8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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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즈음하여 주요 오순절 교단들은 흑인들의 인권 쟁취 추진을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그 해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인내는 인종 차별과 혐오를 용납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인권"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는 1966년 차별화되어 있던 "유색인들의 모임"을 철폐하고 교단에 속한 흑인 교회들을 교단의 본체로 흡수함으로써 완전한 통합을 이루었다. 감리교회는 아직도 전체가 흑인인 "중앙관할 구역"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고 이 일의 진행이 완료되었딘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오순절주의자들은 실제로 보다 전통적인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의 업적을 능가하였다.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보다 짧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므로 오순절 단체들이 20세기 인종문제에 관한 요구 사항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국 기독교에 있어서 단 하나의 유력한 인종혼합적 조합으로 시작한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압력에 고개를 숙여야 했고 피부색의 차이로 분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세기 동안 오순절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교회의 인종 간 단결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 오순절의 성령운동이 성장하는 이유는 한국문화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고대 또는 원시 종교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형시켰다. 기독교가 불교와 만났고 유교와 만났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흑인신학이 출발했던 조건들과 만난다. 그것은 민족 특유의 고유의 문화와 다른 문화가 만날 때 전적인 수용이 일어나지 않고 거부되거나 의심되어지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발전한다. 흑인신학이 백인들만의 예수를 거부하고 회의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인식해 갔던 것이다.
둘째로, 치열한 경쟁의 도시 사회 속에서 소외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회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 가지 문제점들도 야기되었다. 첫째로는 성령을 받은 자는 물질적인 축복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측은히 여긴다. 이것은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에 비교하여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이든지 수치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의 경우에도 몇 명 정도 전도되었는지 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수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특정 성령운동 교회의 제도화와 그 교회 지도자의 카리스마화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교를 기독교에 지나치게 수용함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가난했던 한국사회의 이농자들의 안식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 가난과 소외의 조건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복음은 한없이 기복화 되고 세속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가져오는데 일조(一助)했을지 모르지만, 내적인 부분에 많은 부실을 가져왔다. 복음주의가 담고 있는 약점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는 수단이 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성숙한 기독교인이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상실케 했으며 나아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다. 또한 기독교가 가지는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흑인신학 역시 복음주의와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흑인 특유의 풍부한 감성과 고단했던 그들의 역사는 자칫 현실을 잊고 피안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주의의 감각적 마취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흑인 교회가 극복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21세기 신학에서 '흑인' 은 누구인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 만인가? 오늘날의 세계는 여전히 흑인과 유색인종들과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슬람의 선량한 사람들은 백인 그리스도인들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선상에 놓여있다. 안타깝게도 이 권력 행사의 주체는 미국 기독교이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독선적이고 감성적인 그리스도인은 만들어 냈지만, 예수의 정신을 인지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타문화와 타종교와 타 인종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여전한 그들의 멈추지 않는 성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안한 미래를 사는 인간의 고독한 자화상과 기복적 개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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