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고, 그러한 배경이 ‘퇴계학’ 속에서 어떠한 성격과 특징으로 남아있는지를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퇴계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ttps://www.riss.kr/link?id=G3791209
-
2008년
Korean
영남사림파 ; Leehuang. ; Toegye's Learning ; (Nature)-Li Learning of Chosun ; Leeeonjeok ; Jooseibung ; Leehaenbo ; Chuheeism ; Sarim Faction ; 사화 ; 퇴계학 ; 이현보 ; 이언적 ; 주세붕
한국연구재단(NRF)
0
상세조회0
다운로드국문 초록 (Abstract)
‘퇴계학’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고, 그러한 배경이 ‘퇴계학’ 속에서 어떠한 성격과 특징으로 남아있는지를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퇴계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
‘퇴계학’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잉태되었고, 그러한 배경이 ‘퇴계학’ 속에서 어떠한 성격과 특징으로 남아있는지를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퇴계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본연구는 사화의 시대에 태어나 그 험난한 시대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다간 이현보, 이언적, 주세붕의 학문적 지향과 삶의 태도로부터 이황과의 관련성을 찾는 첫 시도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현보와 이언적, 주세붕과의 관련성 속에서 퇴계학의 형성배경을 고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이들 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적 특징과 삶의 지향이 이황에게서 통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조선 성종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기, 혹은 사화기를 거치면서, 그 사화의 참상을 목격한 일부 학자들은 정계진출을 꺼리거나 정치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성리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분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화기와 거의 일치하는 시기에 관직생활을 했던 이현보는 늘 지방관을 지내며 중앙정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고, 또 그러한 관직생활 속에서도 항상 산림과 강호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로 짓고, 중앙정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귀거래의 지향을 보여준 이황의 태도와 유사하다. 특히 이현보와 이황은 함께 안동 예안에 거주하며 오랫동안 교류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정서적 지향은 단순한 공통성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언적은 단순히 윤리적 실천원칙과 그 방법에 대한 논의로 이해되던 주자학을 철학적인 이론체계로 이해하기 시작한 학자였다. 초기 사림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소학에 대한 강조이다. 이것은 길재로부터 시작하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 등 초기 사림파의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이 소학을 통해 주자학을 이해하였다는 것은 곧 주자학을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물어 가는 철학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윤리적 실천규범학으로 이해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종조 이후 사림파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실천규범의 정치적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림파의 이러한 목표는 훈구파와의 갈등 속에서 좌절되었고, 사림파의 후계자들은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사림파의 이념을 실천하는 방법 혹은 노선의 수정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가 바로 이언적에게서 나타나는 성리학의 질적 전환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언적의 자각적 의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분명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로부터 이제 주자학은 단순히 실천규범학 또는 정치적 이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전환적 사유는 이황에게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퇴계학으로 정립되었고, 이후 조선성리학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언적과는 다른 방향에서 주세붕은 초기 사림파의 실천방식을 수정하고 있다. 즉 주세붕은 단순한 윤리규범의 강조이전에, 1300여 편에 이르는 시가의 창작과 서원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object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relation between Toegye‘s learning, early Sarim sect, and especially Yeongnam Sarim sect which had been collapsed over the Sahwa period. No one can easily deny that emergence of 'Toegye‘s learning' was an a...
The object of this paper is to study the relation between Toegye‘s learning, early Sarim sect, and especially Yeongnam Sarim sect which had been collapsed over the Sahwa period. No one can easily deny that emergence of 'Toegye‘s learning' was an academic event to bring qualitative change to Chosun's Neo-confucianism. The problem of what made this academic event possible to happen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 of Toegye‘s learning.
This paper shows the establishment background of Toegye theory based on the appreciation of Neo-confucianism and intention of life shown by Yi-Hyeonbo, Yi-eonjeok and Joo-Seboong, who lived when Yi-hwang was alive and also experienced the culmination of Sahwa period where the Yeongnam Sarim sect was collapsing. If you question when Neo-confucianism, which was simply considered as a study of daily life model or political ideology, started to be understood anew as the philosophy to discover the origins of cosmos and human kind, and get the attention and attempt for its social dissemination, you could see the political frustration and introspection about it that early Sarim sect had experienced during the Sahwa period became a significant turning point. And Yi-Hyeonbo, Yi-eonjeok and Joo-Seboong can be evaluated as the ones who declared their intention and prepared for the establishment of Toegye‘s lea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