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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學敎團과 (合同)一進會의 일본 유학생 파견과 '斷指同盟' = Dispatch of Students Studying in Japan and 'Danji Strike' by the Donghak and the (unitedOIlchin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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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05년 11월 ‘을사늑약’ 전후로 私費留學生의 증가와 함께 종교단체 등에서 일정한 목적으로 파견하는 ‘貸費유학생’들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특히 동학교단은 일본에 체재 중이던 의암 손병희의 주도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또 동학교단의 민회조직인 진보회와 친일단체 일진회가 (합동)일진회로 합쳐진 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단지동맹’은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가 파견했던 유학생 중 1907년 1월 당시까지 남아있던 32명 중 21명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항의한 사건이다. 두 단체의 결합으로 조직된 (합동)일진회는, 1906년 9월에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와 일진회로 다시 분립했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인 문제와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같은 해 3월(또는 7월)부터 12월까지 일본 유학생들에게 지급해야 할 학비와 생활비를 중단함으로써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21명의 유학생들이 ‘단지동맹’을 결행한 것이다.
      ‘단지동맹’의 충격적인 소식이 국내는 물론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 이어졌고, 한국정부의 유학생 관리․처우 등에 대한 대책도 요구되었다. 이와 함께 ‘단지동맹’에 참여한 유학생들의 감독 주체를 둘러싸고 관심이 집중되었다.
      동학․천도교단과 통칭 ‘일진회’가 주장하는 입장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천도교단 측의 책임도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반적인 반향은 주로 ‘일진회’가 친일행적의 前歷이 빌미로 작용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가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과정과 규모를 살펴보았지만, 두 단체가 남겨 놓은 기록으로는 실체를 규명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현재까지 명단으로 확인되는 유학생의 규모는 각각 28명과 24명, 총 52명이라는 것과, 사회적으로 관심을 일으켰던 ‘단지동맹’에 참여한 21명의 행적,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 어떠했는지 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 시기에 파견된 유학생들의 정확한 명단 확인과, 두 단체에서 유학생을 파견한 정확한 시기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 ‘단지동맹’이 결행된 후 한국 정부와 감독 관청인 學部가 유학생 전반에 대해 제도적인 정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동맹’에 참여한 학생들을 어떻게 조처했는지, 그리고 이 학생들이 이후 일본에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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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1월 ‘을사늑약’ 전후로 私費留學生의 증가와 함께 종교단체 등에서 일정한 목적으로 파견하는 ‘貸費유학생’들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특히 동학교단은 일본에 체재 중이던 의암 ...

      1905년 11월 ‘을사늑약’ 전후로 私費留學生의 증가와 함께 종교단체 등에서 일정한 목적으로 파견하는 ‘貸費유학생’들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특히 동학교단은 일본에 체재 중이던 의암 손병희의 주도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또 동학교단의 민회조직인 진보회와 친일단체 일진회가 (합동)일진회로 합쳐진 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단지동맹’은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가 파견했던 유학생 중 1907년 1월 당시까지 남아있던 32명 중 21명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항의한 사건이다. 두 단체의 결합으로 조직된 (합동)일진회는, 1906년 9월에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와 일진회로 다시 분립했다. 이 과정에서 재정적인 문제와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같은 해 3월(또는 7월)부터 12월까지 일본 유학생들에게 지급해야 할 학비와 생활비를 중단함으로써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21명의 유학생들이 ‘단지동맹’을 결행한 것이다.
      ‘단지동맹’의 충격적인 소식이 국내는 물론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 이어졌고, 한국정부의 유학생 관리․처우 등에 대한 대책도 요구되었다. 이와 함께 ‘단지동맹’에 참여한 유학생들의 감독 주체를 둘러싸고 관심이 집중되었다.
      동학․천도교단과 통칭 ‘일진회’가 주장하는 입장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천도교단 측의 책임도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반적인 반향은 주로 ‘일진회’가 친일행적의 前歷이 빌미로 작용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가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과정과 규모를 살펴보았지만, 두 단체가 남겨 놓은 기록으로는 실체를 규명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현재까지 명단으로 확인되는 유학생의 규모는 각각 28명과 24명, 총 52명이라는 것과, 사회적으로 관심을 일으켰던 ‘단지동맹’에 참여한 21명의 행적,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 어떠했는지 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 시기에 파견된 유학생들의 정확한 명단 확인과, 두 단체에서 유학생을 파견한 정확한 시기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 ‘단지동맹’이 결행된 후 한국 정부와 감독 관청인 學部가 유학생 전반에 대해 제도적인 정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동맹’에 참여한 학생들을 어떻게 조처했는지, 그리고 이 학생들이 이후 일본에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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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Around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on Nov. 1905, the students were steadily sent abroad by the religion organization with the increase of the students studying abroad in their own money. Especially Donghak sent the students to Japan by Eui Am Sonbyonghui who stayed there. Also many students were dispatched abroad after the organization of (united)Ilchinhoe between the Chinbohoe which was the people's organization of Donghak and pro-Japanese Ilchinhoe.


      ‘Danji Strike’ was that 21 ones among 32 students who stayed on Jan of 1907 protested in the letter written in their blood by cutting their little finger. They were sent by both the Donghak and the (united)Ilchinhoe. On Sep. of 1906 the (united)Ilchinhoe was divided into Chondokyo and Ilchinhoe. In the process from March(or July) to Dec., both organization had stopped the school expenses and living expenses for students. The students who suffered from the grim realities of life carried out ‘Danji Strike’.
      As this incident became known to the Korean residents abroad including Japan as well as to Korea, the supervisory agent to these students who participated in ‘Danji Strike’ was the center of attention. Also it led to the fund-raising for them and the measures by the Korean government were asked.
      There is a limit to clarify who was responsible for the incident because the position of the Donghak was contrary to that of Ilchinhoe. Chondokyo was to blame to some extent. But the public criticized the Ilchinhoe on account of its pro-Japanese activities.
      In this thesis, I reviewed the dispatch process and scale of the students studying in Japan by the Donghak and the (united)Ilchinhoe. But it was much limited to examine the realities by the document of two organizations. Until now I identified total number 52 students studying in Japan by the name list(28 and 24 by each organization) and 21 students' activities after they participated in 'Danji Strike' which caused the social concern.
      However, there are some remaining subjects such as how the measures to that incident were executed after 'Danji Strike' and how 21 students finished their studying under what condition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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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ound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on Nov. 1905, the students were steadily sent abroad by the religion organization with the increase of the students studying abroad in their own money. Especially Donghak sent the students to Japa...

      Around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on Nov. 1905, the students were steadily sent abroad by the religion organization with the increase of the students studying abroad in their own money. Especially Donghak sent the students to Japan by Eui Am Sonbyonghui who stayed there. Also many students were dispatched abroad after the organization of (united)Ilchinhoe between the Chinbohoe which was the people's organization of Donghak and pro-Japanese Ilchinhoe.


      ‘Danji Strike’ was that 21 ones among 32 students who stayed on Jan of 1907 protested in the letter written in their blood by cutting their little finger. They were sent by both the Donghak and the (united)Ilchinhoe. On Sep. of 1906 the (united)Ilchinhoe was divided into Chondokyo and Ilchinhoe. In the process from March(or July) to Dec., both organization had stopped the school expenses and living expenses for students. The students who suffered from the grim realities of life carried out ‘Danji Strike’.
      As this incident became known to the Korean residents abroad including Japan as well as to Korea, the supervisory agent to these students who participated in ‘Danji Strike’ was the center of attention. Also it led to the fund-raising for them and the measures by the Korean government were asked.
      There is a limit to clarify who was responsible for the incident because the position of the Donghak was contrary to that of Ilchinhoe. Chondokyo was to blame to some extent. But the public criticized the Ilchinhoe on account of its pro-Japanese activities.
      In this thesis, I reviewed the dispatch process and scale of the students studying in Japan by the Donghak and the (united)Ilchinhoe. But it was much limited to examine the realities by the document of two organizations. Until now I identified total number 52 students studying in Japan by the name list(28 and 24 by each organization) and 21 students' activities after they participated in 'Danji Strike' which caused the social concern.
      However, there are some remaining subjects such as how the measures to that incident were executed after 'Danji Strike' and how 21 students finished their studying under what condition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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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최정간, "해월 최시형家의 사람들" 웅진출판 1994

      2 노동은, "친일인명사전 전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3 최정간, "최초 발굴: 비운의 혁명가로 살다 간 동학 교주의 아들" 1992

      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진상보고서" 2010

      5 이계형, "일진회의 학교 설립과 운영" 한국근현대사학회 (45) : 47-79, 2008

      6 나가시마 히로키, "일진회의 일어학교에 관한 고찰" 7 : 1997

      7 金允植,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솔출판사 1999

      8 "본교력" 1915

      9 文一平, "나의 東京留學時代" 1938

      10 春園 李光洙, "나의 告白" 春秋社 1948

      1 최정간, "해월 최시형家의 사람들" 웅진출판 1994

      2 노동은, "친일인명사전 전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3 최정간, "최초 발굴: 비운의 혁명가로 살다 간 동학 교주의 아들" 1992

      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진상보고서" 2010

      5 이계형, "일진회의 학교 설립과 운영" 한국근현대사학회 (45) : 47-79, 2008

      6 나가시마 히로키, "일진회의 일어학교에 관한 고찰" 7 : 1997

      7 金允植,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솔출판사 1999

      8 "본교력" 1915

      9 文一平, "나의 東京留學時代" 1938

      10 春園 李光洙, "나의 告白" 春秋社 1948

      11 이광수, "나의 40 반생기" 1935

      12 이용창, "韓末 최린(崔麟)의 일본유학과 현실인식" 한국역사연구회 41 : 2001

      13 金淇周, "韓末 在日韓國留學生의 民族運動" 느티나무 1993

      14 李敬南, "雪山 張德秀" 東亞日報社 1981

      15 국사편찬위원회, "要視察韓國人擧動 3"

      16 "西友, 太極學報, 大韓留學生會學報, 大韓興學報"

      17 曺圭泰, "舊韓末 平安道地方의 東學-敎勢의 伸張과 性格에 대한 檢討를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1 : 1990

      18 "舊韓國官報, 梅泉野錄"

      19 井上右, "興亞風雲譚" 平凡社 1942

      20 義菴孫秉熙先生紀念事業會, "義菴孫秉熙先生傳記" 1967

      21 국사편찬위원회, "統監府文書 3"

      22 "第一高等學校一覽, 1906.2, 1907.2"

      23 內田良平, "皇國史談 日本の亞細亞" 1932

      24 李鉉淙, "甲辰開化革新運動의 顚末" 韓國思想硏究會 12 : 1970

      25 李光淳, "現代韓國人物全集 3" 태극출판사 1970

      26 이돈화, "東學의 史的考察(前承)" 1926

      27 康弼道, "東學道宗繹史" 史云硏究所 29 : 1990

      28 이용창, "東學敎團의 民會設立運動과 進步會" 한국중앙사학회 21 : 2005

      29 李庸昌, "東學․天道敎團의 民會設立運動과 정치세력화 연구(1896∼1906)" 중앙대학교 2004

      30 林雄介, "朝鮮社會の史的硏究と東アジア" 山川出版社 1997

      31 天道敎史編纂委員會, "天道敎百年略史 (上)" 天道敎中央總部 1981

      32 "天道敎會史草稿" 亞細亞文化社 1978

      33 "天道敎書 Ⅲ"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3

      34 李光洙, "天道敎大領 鄭廣朝 縱橫觀" 1931

      35 "天道敎創建史" 亞細亞文化社 1978

      36 "大韓每日申報, 皇城新聞, 萬歲報, 帝國新聞, 大阪每日新聞, 東亞日報"

      37 "咸興과 元山의 人物百態" 1924

      38 韓詩俊,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 論叢" 正音文化社 1985

      39 李寅燮, "元韓國一進會歷史" 文明社 1911

      40 白大鎭, "人物評論: 天道敎 大宗司長 鄭廣朝君" 1918

      41 永島廣紀, "一進會立 「光武學校」考" 朝鮮學會 178 : 2001

      42 永島廣紀, "一進會の活動とその展開-特に東學․侍天敎との相關をめぐって" 九州大學朝鮮學硏究會 5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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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12-23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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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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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8 0.55 0.797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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