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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천도교인 朴達成의 사회 종교관과 문화운동 =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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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452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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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thesis is a paper of a believer of Cheondogyo,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In this paper, first, I reviewed the reason of his entering a faith and his education of Cheondogyo doctrines. In the second place, I examined hi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thoughts of Cheondogyo. Finally, I considered the cultural movements that he did as a member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and Young Men Cheondogyo Party.
      Park Dal-sung was born as a son of a moderate farmer on Taechon, Pyeong-an-buk-do, in 1895. He entered the Donghak under the guidance of his father. After Donghak's change to Cheondogyo, when Cheondogyo pushed ahead with modernization, he benefited from that. Having studied at the church doctrine school and Bosung high school, he had gained civilization theory, social darwinism, individualism, and liberalism.
      After 3ㆍ1 Movement in 1919, he came to Seoul. And he spreaded cultural movement theory as one of reformation thoughts, in accordance with the movement theory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He believed that ideal society would be erected by ability and force. And he thought that the foundation of making ideal society was ego or self. By the way, he thought that religion was very important for education of human being. Especially, he was convinced that Cheondogyo was very unsuitable in that it had emphasized human being and gaebyuk, a reformation.
      Park Dal-sung, who wanted to make ideal society by virtue of education of human being, advocated culturism and spiritualism from 1920 to 1923. He wrote many articles to support them in Gaebyuk and Cheondogyohoeweolbo. Also he did public lectures to support cultural movement theory traveling through out Korea. Since 1923, he developed cultural movements emphasizing on education of self-reliant and self-supporting human being. Especially, he threw his effort into made his effort on education of young men, women, peas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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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thesis is a paper of a believer of Cheondogyo,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In this paper, first, I reviewed the reason of his entering a faith and his education of Cheondogyo doctrines. In t...

      This thesis is a paper of a believer of Cheondogyo,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In this paper, first, I reviewed the reason of his entering a faith and his education of Cheondogyo doctrines. In the second place, I examined hi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thoughts of Cheondogyo. Finally, I considered the cultural movements that he did as a member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and Young Men Cheondogyo Party.
      Park Dal-sung was born as a son of a moderate farmer on Taechon, Pyeong-an-buk-do, in 1895. He entered the Donghak under the guidance of his father. After Donghak's change to Cheondogyo, when Cheondogyo pushed ahead with modernization, he benefited from that. Having studied at the church doctrine school and Bosung high school, he had gained civilization theory, social darwinism, individualism, and liberalism.
      After 3ㆍ1 Movement in 1919, he came to Seoul. And he spreaded cultural movement theory as one of reformation thoughts, in accordance with the movement theory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He believed that ideal society would be erected by ability and force. And he thought that the foundation of making ideal society was ego or self. By the way, he thought that religion was very important for education of human being. Especially, he was convinced that Cheondogyo was very unsuitable in that it had emphasized human being and gaebyuk, a reformation.
      Park Dal-sung, who wanted to make ideal society by virtue of education of human being, advocated culturism and spiritualism from 1920 to 1923. He wrote many articles to support them in Gaebyuk and Cheondogyohoeweolbo. Also he did public lectures to support cultural movement theory traveling through out Korea. Since 1923, he developed cultural movements emphasizing on education of self-reliant and self-supporting human being. Especially, he threw his effort into made his effort on education of young men, women, peas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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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글은 1920년대 천도교의 대표적 문화운동가인 박달성의 사회ㆍ종교관과 문화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박달성이 동학에 입교한 배경과 입교 후의 교리의 학습 과정과 학습 내용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어 박달성의 사회관과 종교관, 그리고 그의 천도교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박달성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주역으로 전개한 문화운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1895년 평북 태천의 궁벽한 시골, 그리 넉넉하지 않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달성은 1902년 아버지의 인도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후, 교제와 교리와 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하자, 그는 그 혜택을 입었다. 그는 천도교의 교리강습소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근대적인 교리와 지식을 수용하면서 서구의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3․1운동 후, 개조의 물결 속에서, 그도 당시를 평등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조의 시대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동력을 실력․강력과 자기․자아, 즉 자력(自力)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의 사회는 종교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고, 그 종교는 후천개벽과 인내천을 종지(宗旨)로 하는 천도교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인간에 대한 교화로써 종교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하였던 그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어 정치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하기보다 정신개조, 즉 문화의 변화를 통한 방법을 중시하였다. 먼저 그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도교청년회의 회원으로 기고,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자주․자력의 정신을 갖춘 신인간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농촌문제, 교육문제, 의식주문제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 문화운동론을 전파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1923년 9월부터는 천도교청년당의 간부로 청년부과 농민부 등에서 자립적이고․자력적인 새로운 청년과 농민 등을 육성하는 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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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1920년대 천도교의 대표적 문화운동가인 박달성의 사회ㆍ종교관과 문화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박달성이 동학에 입교한 배경과 입교 후의 교리의 학습 ...

      이글은 1920년대 천도교의 대표적 문화운동가인 박달성의 사회ㆍ종교관과 문화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박달성이 동학에 입교한 배경과 입교 후의 교리의 학습 과정과 학습 내용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어 박달성의 사회관과 종교관, 그리고 그의 천도교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박달성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주역으로 전개한 문화운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1895년 평북 태천의 궁벽한 시골, 그리 넉넉하지 않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달성은 1902년 아버지의 인도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후, 교제와 교리와 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하자, 그는 그 혜택을 입었다. 그는 천도교의 교리강습소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근대적인 교리와 지식을 수용하면서 서구의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3․1운동 후, 개조의 물결 속에서, 그도 당시를 평등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조의 시대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동력을 실력․강력과 자기․자아, 즉 자력(自力)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의 사회는 종교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고, 그 종교는 후천개벽과 인내천을 종지(宗旨)로 하는 천도교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인간에 대한 교화로써 종교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하였던 그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어 정치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하기보다 정신개조, 즉 문화의 변화를 통한 방법을 중시하였다. 먼저 그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도교청년회의 회원으로 기고,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자주․자력의 정신을 갖춘 신인간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농촌문제, 교육문제, 의식주문제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 문화운동론을 전파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1923년 9월부터는 천도교청년당의 간부로 청년부과 농민부 등에서 자립적이고․자력적인 새로운 청년과 농민 등을 육성하는 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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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박달성, "활동기에 입한 천도교의 실력여하를 논함" (118) : 1920

      2 朴春坡, "현해의 서로 현해의 동에" (8) : 1921

      3 윤해동, "한말 일제하 천도교 김기전의 ‘근대’ 수용과 ‘민족주의’" (창간) : 1996

      4 시대일보, "청년당 분기, 비판 강연하다가, 양 박씨는 구걸까지"

      5 동아일보,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순회강연단 원산착"

      6 조규태, "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6

      7 이승렬, "일제하 천도교 계열의 자본주의 인식의 변화와 인간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48 (48): 125-158, 2006

      8 조규태, "일제의 한국 강점과 동학계열의 변화" 114 : 2001

      9 朴達成, "인생의 요구적 사업과 인내천주의" (112) : 1919

      10 박달성, "인격과 종교적 수양" (114) : 1920

      1 박달성, "활동기에 입한 천도교의 실력여하를 논함" (118) : 1920

      2 朴春坡, "현해의 서로 현해의 동에" (8) : 1921

      3 윤해동, "한말 일제하 천도교 김기전의 ‘근대’ 수용과 ‘민족주의’" (창간) : 1996

      4 시대일보, "청년당 분기, 비판 강연하다가, 양 박씨는 구걸까지"

      5 동아일보,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순회강연단 원산착"

      6 조규태, "천도교의 문화운동론과 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6

      7 이승렬, "일제하 천도교 계열의 자본주의 인식의 변화와 인간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48 (48): 125-158, 2006

      8 조규태, "일제의 한국 강점과 동학계열의 변화" 114 : 2001

      9 朴達成, "인생의 요구적 사업과 인내천주의" (112) : 1919

      10 박달성, "인격과 종교적 수양" (114) : 1920

      11 황문수, "이돈화의 신인철학 사상" 숭산박길진박사고희기념사업회 1984

      12 황선, "이돈화의 사상연구: 인내천 논증을 중심으로" (창간) : 1993

      13 황선희, "이돈화의 사상 연구" 동학학회 11 (11): 97-126, 2007

      14 허수, "이돈화 연구 - 종교와 사회의 경계" 역사비평사 2011

      15 봄언덕, "우리의 할 일" (124) : 12-, 1920

      16 달 성, "오직 참사람이 되기까지 사대계명" (126) : 1921

      17 박춘파, "여의 관한 생사문제" (117) : 1920

      18 朴達成, "엇던學生의告白 -十年前의學生과 至今의學生" 2 (2): 1930

      19 朴達成, "신시대를 문하노라" (121) : 1920

      20 송준석, "소춘 김기전의 아동 인격ㆍ해방의 교육사상" 17 : 1995

      21 동아일보, "서흥천도교청년회 주최 강연회"

      22 봄언덕, "부인여러분ㅺㅔ 올님" (121) : 1920

      23 동아일보, "박사직 박달성 양씨 설화? 강연이 불온하다고 종로서에 검속"

      24 朴達成, "모든 行動을 좀더 무겁게 가지소서 -昨今에 起한 우리 社會의 現象을 보고" (23) : 1922

      25 박달성, "동경에서 본 김찬" 1 (1): 6-, 1931

      26 朴達成, "나의 인생관" (109) : 1919

      27 봄언덕, "나의 믿은 바 큰 걱정과 큰 슬픔" (123) : 1920

      28 박달성, "나는 왜 술을 끊었나" 7 (7): 1932

      29 朴達成, "금후세계 종교세계" (117) : 1920

      30 조규태, "구한말 평안도지방의 동학" 21 : 1990

      31 김정의, "구천원유한교수정년기념논총" 혜안 2000

      32 朴達成, "개조의 성과 共히 세계는 어느듯 인내천세계" (129) : 1921

      33 천도교 중앙총부, "韓末 天道敎 資料集 1" 國學資料院 1997

      34 東京春弟, "鐵窓에서 느낀 그대로" (15) : 1921

      35 朴達成, "社會問題에 先하야 自我問題에 反하라 그리하야 社會에 대한 公僕이 되라" (12) : 1921

      36 박달성, "東西文化思想에 現하는 古今의 思想을 一瞥하고" (9) : 1921

      37 朴春坡, "東京에 잇는 天道敎靑年의 現況을 報告하고 아울러 나의 眞情을 告白함" (126) : 1921

      38 朴達成, "有耶無耶 朝鮮人의 ‘生道’" (29) : 1922

      39 朴達成, "是非를 明白키 하기 爲하야" (25) : 1922

      40 朴達成, "是我信仰觀" (108) : 1919

      41 가자봉인, "愛와 眞理" (114) : 19-, 1920

      42 박춘파, "往還千里" (119) : 1920

      43 鳳谷, "弔春坡朴達成道兄" 1934

      44 朴達成, "回顧 敎會生活二十有八年" (12) : 1927

      45 박달성, "倭政時代人物史料 1, 2권"

      46 ㄷㅅ생, "人의 本源에 遡함" (113) : 1920

      47 朴達成, "中學生과 夏期放學" (72) : 1926

      48 조규태,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모시는 사람들 2007

      49 황선희, "1920년대의 천도교와 신문화운동: 이돈화의 삼대개벽론을 중심으로" 화갑기념논총위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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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6 평가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3-12-23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KCI등재
      2013-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6-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7-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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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 0.7 0.62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8 0.55 0.797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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