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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戊辰回軍功臣의 冊封顚末과 그 性格 = A Study of Hoegoon-kongsin(回軍功臣) in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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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9625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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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제까지의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Ⅱ에서 요동원정의 전말, 원정군의 편제, 회군이 가능했던 군부의 조직상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요동원정은 도아정세의 신국면에 대응한 불가피한 선제공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고려의 정치적 불안정·왜구의 침탈의 만연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현실적 제약에서 제한정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강경한 국가의지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화도회군은 사대부가와 관료층의 반발은 물론, 국민여론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던 것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군이 기정사실로 용인될 수 있고, 공양왕의 추대에 이르는 정치변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던 이유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첫째 우왕 14년 최영을 주축으로 한 군권세력에 의하여 정권이 탈취되고, 천여에 달하는 관료군의 대숙청이 몰아쳐 정계는 대혼란을 치렀던 것이다. 다라서 최영의 독선적인 권력도 이 사태를 제어하여 가기에는 취약성을 가졌던 점이다. 둘째는 현저히 정치적 역량이 비대하여진 무공군권자들이 전국의 병원이 결집된 상황을 계기로 이성계파의 책동에 말려들어 잠정적인 협력체계를 형성하여 정권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에서는 무진회군공신을 책봉하는 배경과 그 의의를 검토하고, 공신의 구체적인 인원과 명단을 파악하여 이를 일별할 수 있는 「회군공신일별표」를 작성하였다. 우리가 「무진회군공신」과 「태조조회군공신」을 굳이 구분하려는 이유는 공신책봉의 의의나 당공신들의 정치적기능이 판이한 때문에서 이다. 무진회군공신을 논상하려는 이유가 이성계파의 필요를 반영한 것이었다. 공양왕과 그 배신(반이성하의)들의 의사와 이성계지지파의 입장은 상위하였던 것으로 왕의 의도는 무위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결국 이성계에 대립하여 숙청된 인물들은 공로의 대소에 관계없이 모두 탈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양왕 3년 2월의 1, 2, 3등으로 구분한 사전 대상인원 48명을 무진회군공신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무진회군공신을 책봉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성계파의 정치주도권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려는 것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동조세력의 정치적 지위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Ⅳ에서는 조선왕조를 창업하는 주역으로서 무진회군공신들의 역할과 기능을 검토하였다. 무진회군공신중 개국일등공신이 8명, 이등공신이 2명이다. 이들은 이성계의 친속, 또는 인척이거나, 휘하의 막료로서 이성계의 세력기반, 바로 그것이었다. 태조가 개국공신에 대한 차훈자로서 선임한 28명의 원종공신은 그 중 11명이 무진회군공신이었다. 이들은 이성계에게 병권이 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충실한 예하의 막료로서 비중이 컸던 인물들이다. 정몽주의 잔당을 숙청하는 명분하의 마무리 작업으로 250여명의 군관이 총동원되어 갱장서명하였다는, 그 중추적 인물들인 것이다. 외군공신 중 이성계의 서형 이원계 매서인 조인벽은 조선개국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들은 또한 당당한 군권의 장악자로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인물이었던 점에서 이태조의 군권강화에 지대한 힘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잠재적인 협력기반을 제공하였을 무장이나 세족출신의 관료가 원종공신이 되거나 고위직에 서임되는 인물로 14명의 회군공신이 확인된다. 이상으로 무진회군공신 48명중 38명은 조선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동의 인물인것이다.
      실로 무진회군은 친이성계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Ⅴ에서는 이성계가 화가위국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다른 일면은 가족원과 인척집단의 결집으로 세족석 기반을 형성함으로서 당대의 세신대속과 성공적으로 제휴할 수 있었던 면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성계가계원으로서 형·제·자·서·질·질서인 당사자나 그 친속에서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이 대거 배출되었음을 확인하엿다. 바로 이 점이 인척집단의 규모와 명문세족과의 밀착도에 의하여 정치권력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시대상황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가와의 통혼에서 여흥민씨·순흥안씨 원종가계, 창녕성씨, 남양홍씨 언박가계, 광주김씨 영리가계는 중첩되는 혼인으로 밀착도가 높다. 이 밖에 진주류씨, 경주김씨, 청주한씨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특히 우왕대의 집정자 이인임의 성주이씨가와 통혼함으로써 이성계가의 문지도 상승로를 치닫게 되었을 것이다. 부원세가에서 신흥세족으로 군림한 평양조씨 조준의 가계나 한양조씨(조인옥). 정총(청주인)의 가계, 남은(의녕인)의 가계는 이성계가계와 더불어 상호 통혼을 하고 있어 환형인척집단을 이루고 있다.
      려말의 정쟁과정에서 위의 4인은 태조를 추대하는 정략동지로서 수훈자이었다. 이들의 가계는 제각기 세신대족과 나름대로 통혼을 맺고 있어, 실제는 신정권의 수혜 속에 세신대족이 원하기만 하면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인척집단의 외연의 범위가 확실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예컨대 p.125 경주이씨 가문의 경우 이달존의 직계인 자·손·손서는 거의가 반이파로 숙청되었다. 반면 이천의 가계는 혼척집단의 벌족함이 두드러지고, 원종공신이 대거 배출되고 있어 이성계파와 성공저적으로 제휴되어 조선조에서도 현달하는 가계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본고에서는 천착해 볼 여유도 없으려니와 필자의 능력으로는 석연치 못한 대목이다. 려말에 있어 가문의식은 권위주의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문의 횡적 제약은 강화되어 가계의 분기화가 활발히 이룩되었던 까닭일 것으로 생각해본다.
      Ⅵ에서는 이성계의 매서 조인벽의 가문이 이성계 가계의 성장과 짝하여 상대적 유대 위에 번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조씨는 부원반역아로 지목된 조휘로 인하여 고려의 사대부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세족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동북면에 형성된 막강한 군사기반과 이를 통률하는 권력을 소유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동북면은 쌍성총관부가 탈환된 후 익군의 편성과 군비의 강화로 거대한 군부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주력은 유랑민이었을 동북면 거주자와 여진의 내부자로 구성되고, 그 지휘체계는 이성계 가계원이나 조돈의 가계원(이들은 원의 총관직, 만호직을 세습하여 왔다)이거나 그 본계가 확실치 못한 한미한 신분의 동북면의 충세자(천호 김인찬 등)이었다. 여진 추장 이두란의 경우는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본계는 세족씨성(?본관 자체가 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을 갖은 윤호·황희석의 경우는 무장의 직임을 갖고 동북면에 부임하지만 그의 출세는 이성계의 휘하무장으로 보장되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병사가 수적으로 우세하였을 동북면의 군사력은 국가나, 왕실에 대한 의리나 충성심이 본래부터 결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군의 통사체계가 특정인물의 명령권에 의하여 조정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성계파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힘의 바탕은 바로 이들 동북면의 군사력이었다.
      Ⅶ에서는 회군공신이며 반이성계파의 논해에 열성적이었던 남은·남재형제와 윤소종의 경우를 검토하여 보았다. 의녕남씨나 무송윤은 세족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대부로서 품성이나, 관료로서의 성실성을 결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뚜렷한 정치이념이나 이상을 제시하고 있지도 못하다. 오직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하여 이성계에 빌붙은 세속인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윤회종이 우왕을 매도하는 논소는 후세인들에게 의리부동한 표본적 인물로 지탄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 려말의 시세의 변동에 좇아 이성계파에 부차적으로 가담하게 되는 세족가계원의 유형을 죽주박씨 전지의 가계, 청주경씨 복흥의 자·손, 능성구씨 성노와 그 매질의 집단세력에서 살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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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의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Ⅱ에서 요동원정의 전말, 원정군의 편제, 회군이 가능했던 군부의 조직상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요동원정은 도아정세의 신국면에 대응한 불가...

      이제까지의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Ⅱ에서 요동원정의 전말, 원정군의 편제, 회군이 가능했던 군부의 조직상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요동원정은 도아정세의 신국면에 대응한 불가피한 선제공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고려의 정치적 불안정·왜구의 침탈의 만연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현실적 제약에서 제한정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강경한 국가의지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화도회군은 사대부가와 관료층의 반발은 물론, 국민여론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던 것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군이 기정사실로 용인될 수 있고, 공양왕의 추대에 이르는 정치변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던 이유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첫째 우왕 14년 최영을 주축으로 한 군권세력에 의하여 정권이 탈취되고, 천여에 달하는 관료군의 대숙청이 몰아쳐 정계는 대혼란을 치렀던 것이다. 다라서 최영의 독선적인 권력도 이 사태를 제어하여 가기에는 취약성을 가졌던 점이다. 둘째는 현저히 정치적 역량이 비대하여진 무공군권자들이 전국의 병원이 결집된 상황을 계기로 이성계파의 책동에 말려들어 잠정적인 협력체계를 형성하여 정권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에서는 무진회군공신을 책봉하는 배경과 그 의의를 검토하고, 공신의 구체적인 인원과 명단을 파악하여 이를 일별할 수 있는 「회군공신일별표」를 작성하였다. 우리가 「무진회군공신」과 「태조조회군공신」을 굳이 구분하려는 이유는 공신책봉의 의의나 당공신들의 정치적기능이 판이한 때문에서 이다. 무진회군공신을 논상하려는 이유가 이성계파의 필요를 반영한 것이었다. 공양왕과 그 배신(반이성하의)들의 의사와 이성계지지파의 입장은 상위하였던 것으로 왕의 의도는 무위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결국 이성계에 대립하여 숙청된 인물들은 공로의 대소에 관계없이 모두 탈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양왕 3년 2월의 1, 2, 3등으로 구분한 사전 대상인원 48명을 무진회군공신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무진회군공신을 책봉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성계파의 정치주도권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려는 것이었으며, 현실적으로는 동조세력의 정치적 지위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Ⅳ에서는 조선왕조를 창업하는 주역으로서 무진회군공신들의 역할과 기능을 검토하였다. 무진회군공신중 개국일등공신이 8명, 이등공신이 2명이다. 이들은 이성계의 친속, 또는 인척이거나, 휘하의 막료로서 이성계의 세력기반, 바로 그것이었다. 태조가 개국공신에 대한 차훈자로서 선임한 28명의 원종공신은 그 중 11명이 무진회군공신이었다. 이들은 이성계에게 병권이 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충실한 예하의 막료로서 비중이 컸던 인물들이다. 정몽주의 잔당을 숙청하는 명분하의 마무리 작업으로 250여명의 군관이 총동원되어 갱장서명하였다는, 그 중추적 인물들인 것이다. 외군공신 중 이성계의 서형 이원계 매서인 조인벽은 조선개국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들은 또한 당당한 군권의 장악자로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인물이었던 점에서 이태조의 군권강화에 지대한 힘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잠재적인 협력기반을 제공하였을 무장이나 세족출신의 관료가 원종공신이 되거나 고위직에 서임되는 인물로 14명의 회군공신이 확인된다. 이상으로 무진회군공신 48명중 38명은 조선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동의 인물인것이다.
      실로 무진회군은 친이성계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Ⅴ에서는 이성계가 화가위국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중요한 다른 일면은 가족원과 인척집단의 결집으로 세족석 기반을 형성함으로서 당대의 세신대속과 성공적으로 제휴할 수 있었던 면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성계가계원으로서 형·제·자·서·질·질서인 당사자나 그 친속에서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이 대거 배출되었음을 확인하엿다. 바로 이 점이 인척집단의 규모와 명문세족과의 밀착도에 의하여 정치권력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시대상황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가와의 통혼에서 여흥민씨·순흥안씨 원종가계, 창녕성씨, 남양홍씨 언박가계, 광주김씨 영리가계는 중첩되는 혼인으로 밀착도가 높다. 이 밖에 진주류씨, 경주김씨, 청주한씨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특히 우왕대의 집정자 이인임의 성주이씨가와 통혼함으로써 이성계가의 문지도 상승로를 치닫게 되었을 것이다. 부원세가에서 신흥세족으로 군림한 평양조씨 조준의 가계나 한양조씨(조인옥). 정총(청주인)의 가계, 남은(의녕인)의 가계는 이성계가계와 더불어 상호 통혼을 하고 있어 환형인척집단을 이루고 있다.
      려말의 정쟁과정에서 위의 4인은 태조를 추대하는 정략동지로서 수훈자이었다. 이들의 가계는 제각기 세신대족과 나름대로 통혼을 맺고 있어, 실제는 신정권의 수혜 속에 세신대족이 원하기만 하면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인척집단의 외연의 범위가 확실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예컨대 p.125 경주이씨 가문의 경우 이달존의 직계인 자·손·손서는 거의가 반이파로 숙청되었다. 반면 이천의 가계는 혼척집단의 벌족함이 두드러지고, 원종공신이 대거 배출되고 있어 이성계파와 성공저적으로 제휴되어 조선조에서도 현달하는 가계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본고에서는 천착해 볼 여유도 없으려니와 필자의 능력으로는 석연치 못한 대목이다. 려말에 있어 가문의식은 권위주의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문의 횡적 제약은 강화되어 가계의 분기화가 활발히 이룩되었던 까닭일 것으로 생각해본다.
      Ⅵ에서는 이성계의 매서 조인벽의 가문이 이성계 가계의 성장과 짝하여 상대적 유대 위에 번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조씨는 부원반역아로 지목된 조휘로 인하여 고려의 사대부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세족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동북면에 형성된 막강한 군사기반과 이를 통률하는 권력을 소유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동북면은 쌍성총관부가 탈환된 후 익군의 편성과 군비의 강화로 거대한 군부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 주력은 유랑민이었을 동북면 거주자와 여진의 내부자로 구성되고, 그 지휘체계는 이성계 가계원이나 조돈의 가계원(이들은 원의 총관직, 만호직을 세습하여 왔다)이거나 그 본계가 확실치 못한 한미한 신분의 동북면의 충세자(천호 김인찬 등)이었다. 여진 추장 이두란의 경우는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본계는 세족씨성(?본관 자체가 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을 갖은 윤호·황희석의 경우는 무장의 직임을 갖고 동북면에 부임하지만 그의 출세는 이성계의 휘하무장으로 보장되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병사가 수적으로 우세하였을 동북면의 군사력은 국가나, 왕실에 대한 의리나 충성심이 본래부터 결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군의 통사체계가 특정인물의 명령권에 의하여 조정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성계파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힘의 바탕은 바로 이들 동북면의 군사력이었다.
      Ⅶ에서는 회군공신이며 반이성계파의 논해에 열성적이었던 남은·남재형제와 윤소종의 경우를 검토하여 보았다. 의녕남씨나 무송윤은 세족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대부로서 품성이나, 관료로서의 성실성을 결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뚜렷한 정치이념이나 이상을 제시하고 있지도 못하다. 오직 정치권력의 장악을 위하여 이성계에 빌붙은 세속인으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윤회종이 우왕을 매도하는 논소는 후세인들에게 의리부동한 표본적 인물로 지탄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 려말의 시세의 변동에 좇아 이성계파에 부차적으로 가담하게 되는 세족가계원의 유형을 죽주박씨 전지의 가계, 청주경씨 복흥의 자·손, 능성구씨 성노와 그 매질의 집단세력에서 살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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