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尹鑴(1617-1680)와 朴世堂(1629∼1703)은 反朱子學者 내지는 脫朱子學者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통주자학자로 알려진 송시열과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에 의해 ‘사문난적(斯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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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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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尹鑴(1617-1680)와 朴世堂(1629∼1703)은 反朱子學者 내지는 脫朱子學者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통주자학자로 알려진 송시열과 그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지목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학문적 성향을 가름짓는 잣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그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학문적 성향이 집중되어 진행되었다.
조선시대는 ‘學者政治人’이라고 할 정도로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윤휴와 박세당에 대해서는 학문적 성향에 대해 연구가 집중되면서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노선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심도있게 검토되지 않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윤휴와 박세당은 남인과 서인으로 黨色이 달랐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권력구조를 편제하는데 성공하였던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연대는 기해복제논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갑인복제논쟁 이후에는 정치적인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런데 윤휴는 기해복제논쟁에서 남인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지목되어 서인에게 배척되었고, 박세당은 기해복제논쟁 이후에 정계에 진출하여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갑인복제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윤휴와 박세당이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휴는 오랫동안 재야에 머물면서 정치적 논쟁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고, 박세당 역시 갑인복제논쟁(1672) 이후 실질적으로 물러났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논쟁이 될 만한 사안으로 직접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휴와 박세당은 1659년 효종의 사후에 일어난 복제논쟁에 대해 각각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개진하였다. 윤휴가 주장한 斬衰三年服은 당시 반향을 일으켜 남인의 삼년설의 근거로 활용되었고, 서인들은 윤휴를 서인의 기년복에 대항한 남인의 삼년설의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단정하였다. 반면에 기해복제논쟁이 일어났을 때 갓 정계에 입문하였던 박세당은 이 논의에 크게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견해를 「禮訟辨」이라는 글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들 역시 당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복제논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해복제논쟁에서 그들이 주장한 견해에 대해 검토하므로써 그들의 정치적 성향의 단초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들이 反朱子學的 학문성향을 공통부모로 삼고 있으면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학문적 경향성과 정치적 지향성의 연관관계를 이해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리라 생각된다.
정통주자학자들에게서 ‘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학문적으로 파문당하는 두 학자가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는 ‘기해복제논쟁’이라는 논쟁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였을까? 학문적 성향의 유사성은 정치적 성향에도 반영이 되었을까?
제출일, 연구수행기관 미상 : 알 수 없음 정보원 : 동서문화연구;10집;61-78쪽;2005
제출일, 연구수행기관 미상 : 알 수 없음
정보원 : 동서문화연구;10집;61-78쪽;2005